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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황제의 외모가 내 취향이라 곤란하다-1화 (1/150)

1화

늦여름의 살랑이는 바람이 뺨을 간지럽혔다.

머리 위로는 맑고 푸른 하늘 위를 잔잔히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

‘날씨 좋다.’

신 세이칸의 가호를 받는 오디트리아 대륙의 날씨는 오늘도 평화 그 자체였다.

다만, 그 대륙의 정점.

오디트리아 대륙에 군림하는 젠달 제국의 황궁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난간에 올린 한쪽 팔 위에 얼굴을 기댔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황궁에서 가장 높은 탑의 꼭대기 층.

오랜 역사를 지닌 종탑이지만, 평소에는 사용하는 일이 없어 나만의 아지트로 삼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황궁이 속속들이 보였다.

‘어, 헨켈 대장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사들 속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우직하게 서서 부하들의 보고를 받는 황실 근위대장, 헨켈 레바르튼.

오늘도 목까지 단추를 채운 말끔한 모습이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네모를 만들어 그 안에 헨켈 대장을 넣어 보았다.

근위대장의 제복 밖으로도 느껴지는 꽉꽉 들어찬 저 근육.

크. 역시 커프스단추를 풀 때 가장 섹시한 남자 1위 타이틀을 거머쥘 만 하다니까.

보다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어 아는 척을 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저기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엄지손톱보다 작게 보일 거다.

이 세계에서 나만큼 시력이 좋은 사람은 아직 보질 못했으니까.

내 자랑이지만 나는 청력도 꽤 좋다.

평소에는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좋은 정도지만.

집중하면 지금 탑의 입구 앞에 모인 기사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지까지도 들을 수 있다.

“성녀님은? 그쪽에 계시나?”

“이쪽엔 계시지 않습니다!”

“저쪽은?”

“가보겠습니다.”

한곳으로 모였던 기사들은 다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후후, 등잔 밑이 어둡답니다. 이 경우는 등잔 위인가?

“이래서야 이번 주 내내 여기 숨어 있어도 못 찾겠어.”

그래 주면 나야 감사지만.

정말이지 이번에는 그 얼굴에 넘어가고 싶지 않다.

“……라고 생각한 지 1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감사는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다.

저렇게 발소리를 죽이고 오는 것도 재주란 말이야.

나는 뒤를 돌아 몸을 난간에 기댔다.

“마지막 발소리는 저 들으라고 일부러 내신 거죠?”

커다란 종 뒤에서 싱그러운 미소를 띤 엄청난 미남이 모습을 드러냈다.

꼭대기 층으로 이어진 계단이 그렇게 많았는데, 내가 들은 발소리가 지금 탁, 하고 난 소리 하나뿐이라니.

고의적이었던 게 분명했다.

“아닙니다. 여기 계셨군요. 성녀.”

너무 맑아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에 내가 담겼다. 결 좋은 금발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며 반짝였다.

“그렇게 난간에 기대시면 위험합니다.”

내 쪽으로 내미는 손길이 상냥하다. 꿀을 발라놓은 듯 달콤한 저음의 목소리엔 걱정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곧고 시원하게 뻗는 양 눈썹의 끝이 살짝 아래로 내려오며 미간에 주름이 졌다.

아, 얼굴 구기지 말지. 내 마음도 구겨질 거 같다고요.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다 저 얼굴이 잘나서이다.

콩콩 뛰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퉁명스러운 말로 다가오는 그를 저지했다.

“오지 마세요.”

그가 말 잘 듣는 충견처럼 걸음을 멈췄다.

우리 사이에는 2m 정도의 간격이 생겼다.

그는 좁힐 수 없는 그 간격이 안타깝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수에 젖은 저 얼굴. 미친다.

‘아냐, 정신 차려! 이것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보지 말자. 얼굴에 홀리면 안 된다.

“성녀, 눈을 감으실 정도로 제가 보기 싫으신 겁니까.”

으. 귀도 막아버리고 싶다.

저 목소리로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말투는 반칙이다.

차라리 도망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 탈 인간급인 신체 능력을 갖춘 남자한테서 도망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저렇게 꼬셔도 넘어가지 마. 다 연기라고! 연기!’

그래. 나는 저 모습이 연기라는 사실을 안다.

신성 제국 젠달의 황제,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완벽한 저 남자는.

“폐하의 그 시커먼 속을 제가 다 알고 있거든요?”

“시커먼 속이라니요.”

“어제 헨켈 대장이랑 대화하시는 거 들었어요. ‘보니아 왕국의 사절단을 맞는 자리에 성녀도 데리고 가는 게 좋겠군. 능력 없는 성녀라도 제국이 건재함을 보이기엔 그만한 말이 없으니.’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저 이용하려고.”

날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하려고 할 뿐인 성격파탄자니까.

악순환처럼 돌아가는 관계를 개선하려면 한 번쯤 단호해질 필요가 있었다.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죠? 앞으론 절대 폐하한테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요. 언제까지고 폐하 뜻대로 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세요.”

“…….”

눈 꽉 감고 뱉은 말에 폐하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속이 시커멓다 그래서 마음이 상했나?

내가 한 말에 상처받았나? 설마……?

눈을 감은 내 맞은편에서 폐하가 말없이 서 있는 걸 생각하니 별의별 상상이 다 들었다.

혹시라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저 얼굴로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다면…….

‘사, 살짝만 볼까?’

만약에 지금 폐하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라면, 근데 내가 눈을 감은 탓에 그걸 놓치는 거라면.

그때 왜 그 얼굴을 각막에 박아 넣지 않았냐고 미친 듯이 자책할지도 몰랐다. 미래의 내가.

나는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실눈으로 폐하 얼굴을 살짝만 몰래 볼 생각이었는데.

“그럴 리가.”

“이익.”

어느새 내 바로 앞까지 와서 얼굴 공격을 해댄다.

또 발소리 죽였어.

“내가 성녀를 이용하려 하다니.”

저 봐, 입꼬리 살짝 비틀어진 거 봐.

목소리 톤도 좀 전보다 낮아졌고. 은근슬쩍 말도 짧아졌다.

이럴 때의 폐하는 상당히 좋지 않다.

헨켈 대장이나 에본 재상한테까지도 이미지 관리를 하면서, 왜 내 앞에선 안 하는 건데!

‘그만큼 내가 만만하다는 거겠지. 분하다……!’

일단 심장에 심히 좋지 않은 이 거리를 좀 벌리려 했는데, 폐하가 양팔로 내 몸을 가두고 난간을 붙잡은 탓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이중인격자.”

“볼을 붉히고 그렇게 말해봤자.”

……젠장.

“제가 언젠간 제국 내에 다 밝힐 거예요. 제국민에게 인자하신 레오디우스 폐하는 속 시커먼 이중인격자라고.”

“부디.”

짧게 말했지만, 폐하의 속마음이 들린다.

네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맞습니다.

난 못 해. 저 얼굴을 곤란하게 만드는 짓이라니. 흑흑.

“제가 못 할 거 같아요? 벌써 증거도 모으고 있거든요?”

“성녀께선.”

헙.

폐하는 고개를 좀 더 숙여 내 이마에 본인 이마를 갖다 댔다.

무, 무, 무슨 짓이에요!

‘아아악. 뽀송뽀송한 폐하 이마에 내 이마 기름 묻는다아악.’

근래 들어 이렇게 죄짓는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놈의 폐하는 제 이마 귀한 줄도 모르고……!

저는 지금 행복해서 이마 못 떼니까 폐하가 떼요, 빨리!

“제 얼굴을 좋아하시죠.”

아. 이래서 탑에 숨어있던 건데.

날 똑바로 보는 폐하의 벽안 속에 내 검은 눈이 담겼다.

“그래서 제 부탁도 거절 못 하시고.”

폐하에게 내 취향을 훤히 꿰뚫리고 있는 게 정말 분하지만, 저 말 대로였다.

폐하의 얼굴을 보면 나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맛대로 놀아나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번 보니아 왕국 사절단의 환영 연회. 부디 성녀님과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기분 좋은 체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시각이고 후각이고 촉각이고.

폐하는 지금 내 심장을 터지게 만들려고 작정한 게 분명했다.

이대로 있다간 암살당할 거야!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으……. 이번만이에요.”

“그럼요. 이번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번만이 스무 번쯤 되긴 했지만…….

이 와중에 웃는 건 왜 이렇게 이쁘담.

‘다음엔 지하 감옥에 숨어야겠어.’

***

나라고 처음부터 저 미남한테 휘둘리는 삶을 산 건 아니었다.

나, 신아리는 원래 한국에 살던 고등학생이었다.

그런데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신호를 무시한 채 달려오는 트럭에 치여 정신을 잃게 된 것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게임에서나 보던 소환진 위.

방안의 서구적인 외양의 외국인들은 날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울거나.

갑자기 절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꿈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쯤, 갈라지는 인파 속에서 내 앞으로 걸어온 사람이 있었다.

“미……친.”

그동안 인종을 가리지 않은 수많은 덕질로 지구상의 미남을 통달했다고 자부했던 나였지만.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그런 내 자부심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신성 제국 젠달의 황제, 알렌드 칸 레오디우스입니다. 성녀.”

차원이 다른 미남이었다.

저 외모로 황제라니. 말이 돼?

황제의 외모도 현실감이 없었지만, 주변의 상황도 모두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알지도 못하는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 나, 사방의 외국인들, 소환진 뒤의 거대한 석상까지.

모든 것이 낯선 이 공간에서 익숙한 것이라곤 교복을 입은 내 몸뚱어리 하나뿐이었다.

‘꿈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여고생인 나를 황제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성녀라며 받들어 모시다니?

더욱이.

“젠달의 재상, 에본 하이벤입니다. 이쪽은 폐하를 호위를 맡은 근위대장, 헨켈 레바르튼 경이지요.”

폐하만 잘생긴 게 아니었다.

폐하와 항상 함께 다니는 두 사람.

에본 재상과 헨켈 대장.

폐하보다는 아니었지만, 그 둘도 만만치 않은 외모의 소유자들이었다.

에본 재상은 한 떨기 제비꽃 같은 청초한 분위기의 은발 미남이었고.

헨켈 대장은 금욕적인 단정한 얼굴 아래에 꽉꽉 들어찬 근육을 품은 짐승남이었으니.

미남들이 몰려다니는 세계. 현실일 리 없다.

‘꿈인 게 분명하지만, 절대 깨지 말아다오. 꿈아.’

덕질로 뇌 주름 속속히 박아 넣었던 데이터들이 일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완벽한 미남들을 만들어낼 리 없으니까!

‘기특한 내 뇌!’

꿈속이라 단정 지은 나는 상황을 편하게 즐겼다.

즐기다 못해 좀, 많이 까불었다.

지금의 내가 당시의 나를 뜯어말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때는 정말로 모든 상황이 내 꿈인 줄 알았고, 내 꿈이니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될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폐하와 단둘이 티타임을 즐기는 자리에서 그런 망언을 뱉어버린 것이다.

“폐하는 원래 성격 안 좋으시죠?”

멍청하게도 말이지.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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