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그러나 그 웃음에 상대를 향한 호의는 전혀 없었다. 레온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다정한 척 말을 걸었다.
“그래, 답지 않게 왜 이렇게 벌벌 떠나 했지. 변한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알았으면 이만 돌아가지 그래? 귀찮게 굴지 말고.”
“나도 그걸 원해.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내가 모든 걸 지켜보길 바라.”
여인이 입꼬리를 비틀며 빈정거렸다.
“너도 이제 홀로서기를 할 때가 되지 않았어?”
레온이 여인을 따라 비웃음을 흘렸다.
“그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식이 얼마나 된다고.”
그러고는 조금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주 잠깐이라도 그분의 그림자 아래를 벗어나 봤던 게 운이 좋았던 거지.”
레온이 한 발 더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마르바스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려는데, 여인이 마르바스의 팔목을 붙잡으며 그를 막았다.
“내 동생.”
남자는 마르바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오롯이 여인만을 바라봤다.
“우리 주제를 알자.”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너나, 나나. 우리는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야.”
“…….”
역시 이대로 지켜보고 있는 건 싫었다. 하지만 그의 팔을 쥔 손은 여전히 단단했고 그녀는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동생아. 누군가는 우리를 부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실체를 잘 알잖아?”
날카롭게 레온을 바라보던 여인이 그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야기를 하긴 해야겠지.”
그러자 차갑던 레온도 다시 부드럽게 변했다. 만족스러운 낯을 한 그가 뒤로 크게 물러났다.
“좋아, 그럼 내일 보자.”
레온이 아쉬운 것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고개만 뒤로 해 마르바스에게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외면하듯 여인을 쳐다보자 그녀가 옅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내가 쟤를 왜 무서워하는지, 알고 싶어?”
평소라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이 그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레온은 떠나기 전 마르바스를 쳐다봤고.
긍정을 표하자 여인이 한숨을 쉬더니 그를 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여인은 따뜻한 차를 전부 비워 내고 나서야 마르바스를 쳐다봤다. 마르바스가 여인의 볼에 옅게 홍조가 어린 걸 확인하고 물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멈칫한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허를 잘 찌르는 편이네. 그래, 이제 좀 괜찮아.”
“이야기할 기분은 되시고요?”
“…이야기할 기분이 되는 날은 없을 거야. 그래도 이야기해 주기로 했으니까.”
“왜 그 사람을 어려워하세요?”
“내 과거 때문에.”
“과거요?”
마르바스는 순식간에 어둡게 변하는 여인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과거라고 해 봐야 그보다 고작 세 살 많으면서 뭐가 그리 대단한 과거가 있다고 저렇게 세상 다 산 것 같은 얼굴을 할까?
“응, 내 과거.”
마르바스가 도전적으로 물었다.
“뭐 엄청난 짓이라도 했어요?”
그러자 여인이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대꾸했다.
“…나쁜 짓을 많이 했지.”
“얼마나 나쁜 짓인데요?”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 싫을 만큼.”
꼬치꼬치 캐물은 것치고 마르바스는 더 질척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지 마세요.”
눈을 동그랗게 뜬 여인이 입술을 떨었다.
“…그게 다야?”
마르바스가 되물었다.
“더 물어도 돼요?”
여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도 돼.”
크게 결심한 듯,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 훤히 보였다. 마르바스는 그런 여인을 가만히 쳐다보다 물었다.
“하고 싶어서 했어요?”
“어?”
왜, 내가 무슨 짓 했냐고 물을 줄 알았나 보지? 흥, 코웃음을 친 마르바스가 빨리 답하라고 눈짓했다.
“…아니. 나도 시켜서 했지.”
마르바스가 반쯤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시킨 사람 탓하세요.”
“뭐?”
“원래 그런 건 윗사람이 다 뒤집어쓰는 거예요.”
마르바스를 따라 빈 잔을 내려놓은 여인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만큼 공을 세웠을 때 대접받고, 평소에도 대접받잖아요. 아가씨가 여기서 그랬던 것처럼.”
여인이 흔들리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나도 결국에는 시킨 대로 했잖아.”
마르바스가 답답함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쁜 짓을 했다고 해 봐야, 여기 오기 전일 텐데. 그럼 미성년자 때 했던 짓 아니에요?”
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르바스가 말을 정정했다.
“성인이 되고 몇 달 뒤에 왔으니까, 아닌가?”
그러자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미성년자 때는 맞지만.”
그렇다면 더욱 문제는 없었다.
“그럼 당신에게 명령시킨 사람 잘못이에요.”
그 확고한 답에 여인은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쉬워?”
따지듯 묻는 여인에도 마르바스는 그의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래야 살기 편하니까요. 너무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면 사는 게 피곤해져요.”
말을 이렇게 해도 그도 막 사는 편은 아니지만. 사실 이제껏 마르바스는 그가 모시는 여인처럼 자유롭게 사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게 멋있다고 생각했고 그 점 때문에 여인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맞았다.
그런데 콩깍지가 참 대단한지, 여인이 그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인 것이 참 만족스러웠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이제는 그의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녀에게 손을 뻗어도 될 것 같아서.
마르바스가 음흉한 속내를 숨기며 생긋 웃었다.
“아무리 해도 쉽게 생각하기 힘들면 주변에 도움을 청해도 되고요. 위로를 받고, 위로를 주고 하면 좀 기분도 나아지잖아요?”
주변 누구에게? 눈으로 묻는 여인에 마르바스가 가볍게 말했다.
“가족이나, 친구요.”
“…난 그런 가족 없는데.”
마르바스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없어요.”
그러자 여인이 눈에 힘을 주며 따지듯 말했다.
“친구는 있잖아.”
“뭐, 없진 않죠.”
“…….”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인이 눈을 홉떴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자랑하니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뭘, 자랑씩이나 된다고.”
“하.”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는 여인에 마르바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친구가 없으면 사귀면 되죠.”
“그게 쉬워?”
역시 여인은 종종 어린애 같을 때가 있었다.
“뭐가 어려워요? 그냥 자연스럽게 하면 되지.”
마르바스가 성큼 여인에게 다가가 털썩, 그 옆에 앉으며 쾌활하게 웃었다.
“친구 할까요?”
여인이 멍하니 마르바스를 쳐다봤다. 그 맹한 얼굴에 절로 기분 좋은 웃음이 났다. 그래, 이 얼굴이 바로 마르바스가 좋아하던 얼굴이었다.
마르바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대답해야, 친구를 만들죠.”
그 놀리는 듯한 웃음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여인이 마르바스의 어깨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뭐야, 유치하게.”
마르바스가 아프지도 않은 어깨를 손으로 쓱 쓸어내리며 답했다.
“원래 이런 건 유치한 거예요.”
여인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다가 휙, 고개를 돌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고.”
말을 그렇게 하지만 붉어진 얼굴이나 귀를 보면 그녀의 답은 뻔했다.
마르바스는 더 여인을 놀리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네, 뭐 시간은 많으니까요.”
* * *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여인은 종종 우울해 보였지만.
“아가씨.”
“왜?”
그래도 눈이 마주치면 이렇게 환하게 웃곤 했다.
레온과 따로 독대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긴 했지만 흔들림 없는 여인의 얼굴에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레온이 마을에 오고 한 달. 사람들은 마을에 있는 신전에 익숙해졌고, 신관들 역시 마을에 적응해 나갔다. 레온은 굳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지만, 마르바스는 그편이 마음이 편했다.
오전 시간 동안 마법을 공부하고, 사용인들과 함께 점심을 먹은 뒤 여인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정말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르바스.”
“네.”
마르바스가 여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야 할 것 같아.”
“무슨 짓이요?”
여인이 느릿하게 답했다.
“그냥…, 하기 싫은 일.”
말투에서 느껴지는 음울함에 눈이 가늘어졌다. 마르바스가 창문 앞, 햇빛을 등지고 선 여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하기 싫은데 왜 하세요?”
“해야 해서.”
레온과 관련된 일인 걸까?
역광이 진 여인의 얼굴은 차갑지도 냉랭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넘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마르바스가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녀가 제안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생각이 안 돼. 그래서 말인데, 그때 친구 그거 하자.”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마르바스는 그 가면 너머 여인의 불안함을 읽어 냈다.
“네, 그래요.”
바로 답을 돌려주자 그녀는 온몸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긴장을 풀던 것도 잠시, 여인의 분위기는 다시 가라앉았다.
“해선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아는데 그래도 하는 거면 이번에는 정말 내 잘못이 맞겠지?”
“그렇죠.”
마르바스의 긍정에 여인이 눈을 깜빡였다.
“내 잘못이 된다는 걸 아는데도 결국에는 시키는 대로 하면?”
“시키는 대로 하는 이유가 뭔데요?”
“…무서워서.”
밀랍 같던 여인의 얼굴에 감정이 생겼다.
“뭐가 무서운데요?”
“다 잃어버릴까 봐.”
여인은 확연하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더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녀를 달래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마 그녀에게 하기 싫은 일을 시키는 자는 레온의 뒤에 있을 교황일 것이다.
그러니 답을 구하듯 그를 쳐다보는 여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교황이니, 뭐니 그런 높으신 분들 이야기에 이렇다 저렇다 말을 보탤 지식이나 머리가 있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딱 하나 해 줄 수 있는 말은 있었다.
“그럼 이제 당신도 책임을 피해 갈 순 없을 거예요. 무슨 핑계를 대도요.”
“…그렇겠지?”
마르바스는 움찔 떨린, 여인의 입가를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그래도.”
그리고 여인의 턱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의 곁에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