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마르바스!”
그는 그들을 덮친 것이 여인에게 관심을 주지 않게 하려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지 말고, 조용히 계세요!”
마르바스는 비척거리는 몸에 힘을 줘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향해 살기를 드러내는 존재가 무엇인지 살폈다.
겉모습은 멧돼지와 엇비슷해 보였지만, 크기는 곰에 비견될 만큼 컸고 엄니 역시 보통의 것보다 두 배는 컸다.
마르바스는 그의 피가 묻은 엄니를 보며 다친 옆구리를 꾹 눌렀다.
“마물인가.”
마족도, 마물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저건 마족이라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약하다는 놈에게 옆구리가 뚫린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그는 지금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왜지?’
마르바스가 기이함을 느끼는 사이 피 맛을 보고 흥분한 것이 역력한 마물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르바스!”
조용히 있으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마르바스는 달려오는 마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여인을 지켜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르바스는 그대로 마물의 엄니를 붙들었다. 가까이에서 마물과 눈을 마주하자 몸을 타고 흐르는 혈관이 팽창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흥분했나?’
몸 전체에 열이 오르고, 입가가 올라갔다.
지이익- 발이 바닥에서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밀리는 건 마르바스가 아닌 마물이었다.
우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엄니가 그의 손아귀 힘에 부서져 갔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 방을 만들 무기가 필요했다. 그는 빠르게 주변을 훑다 손아귀에서 반쯤 부서진 엄니를 내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마르바스는 거칠게 숨을 내뱉는 마물과 눈을 맞추며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손안에 생긴 무기를 안광이 번쩍이는 눈에 쑤셔 넣었다.
“끼에에엑!”
자기 엄니에 눈을 깊숙이 찔린 마물이 거세게 몸을 흔들며 고통을 호소했다. 마르바스는 아직 하나 남은 엄니를 움켜쥐고 그 몸부림을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죽음의 고통에 마물도 마지막 힘을 끌어 쓰는지, 조금 전과 달리 마르바스는 점점 더 뒤로 밀려났다. 마물의 피와 그의 땀 때문에 손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 변화를 느꼈는지 마물의 눈이 번쩍였다.
호위 겸 시종이라고는 하지만 호위를 서 본 일은 거의 없어서, 검 한 자루 제대로 챙기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멍청한 놈.’
하지만 자책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이를 악물며 힘을 주자 옆구리의 상처가 더 벌어지는지 피가 줄줄 샜다. 어떻게든 버티려 악을 쓰는데, 익숙한 향기가 달려왔다.
옆을 돌아보지 않고도 그 존재를 눈치챈 마르바스는 흉 하나 없이 고운 손이 마물의 눈을 찌르고 있던 손 위에 얹어지자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얼른 다시 돌아가요!”
안 그래도 힘이 다 떨어져 가는데, 제정신이냐고. 당신이 잘못되면 나는 어떡하라고? 하지만 마르바스가 분노를 표하기 전 귀 옆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괜찮아. 그냥 내가 쓰러지면 잘 챙겨 가기만 하면 돼.”
뭐라고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온몸에 열이 잔뜩 오르는데, 마물이 강하게 꿈틀거렸다. 마르바스가 마물을 똑바로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가만히 있어!”
그러자 거짓말처럼 마물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잠깐의 틈에 그의 손을 덮었던 여인의 손에서 신성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성력?’
마물의 상처가 급격하게 악화하고 그 덕에 엄니가 더욱 깊숙이 안을 파고들었다. 이제까지의 혈투가 우습게 마물의 눈에서 빠르게 빛이 꺼져 가고, 이내 쿵 소리와 함께 마물이 바닥에 쓰러졌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기쁨에 환호할 법도 한데 마르바스는 곧장 비틀거리는 여인을 붙들었다.
“아가씨?”
“괜, 찮아. 그냥 힘이 빠져서, 그래.”
잔뜩 지친 목소리이긴 하나 답은 돌아와 안심됐다. 마르바스는 바닥으로 천천히 쓰러지는 여인을 붙들며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성력을 쓰실 수 있으셨어요?”
여인이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신관이 될 수 있을 정도는 아니고…….”
이런 힘을 가지고 있어도 신관이 못 되나?
“그런 것치고는 제 옆구리 상처도 다 나았는데요.”
마물을 해치운 건 둘째 치고 심각하던 그의 상처도 한순간에 완전히 나았다.
“뭐라는 거야, 나 그럴 힘 없어. 그리고 이제 곧 기절할 것 같은데.”
그런 일이 생길 리 없다는 불신 때문인지, 여인은 그의 상처를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마르바스가 그녀의 손을 당겨 와 옆구리에 올렸다.
“기절하셔도 돼요. 무사히 나아서 아가씨 정도는 업어서 내려갈 수 있어요.”
“상처가 치료됐어?”
더듬더듬, 여인의 손가락이 찢어진 옷가지 아래 마르바스의 옆구리를 매만졌다. 손에 힘이 없는 건지, 아니면 상처가 있을까 두려운 건지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간질거리고, 소름이 돋았다.
자기가 먼저 손을 올려놓고 부끄러워진 마르바스가 크흠, 헛기침하며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이제 됐죠?”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네?”
“어떻게……. 왜 이제야?”
상처를 치료해 준 건 자기면서 왜 이렇게 놀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의문을 해소하기 전, 여인은 정신을 잃었다.
“아가씨?”
이미 여인이 경고를 한 덕에 크게 놀라지 않은 마르바스는 여인의 업고 무사히 뒷산을 내려왔다.
둘의 꼴을 보고 놀란 사용인들의 잔소리를 잔뜩 듣긴 했지만 아무튼 그래도 무사하니 그걸로 된 것 아니겠는가?
* * *
그걸로 된 게 아니었다. 사용인에게 여인을 넘겨주고 집으로 돌아갈 때만 해도 마르바스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 놓고 생각해 보니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실감이 났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너무 긴장을 놓아 버렸다. 자괴감에 휩싸인 마르바스는 여인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가 사죄를 고했다.
“왜 사과를 하지?”
하지만 그 사과에 여인은 화가 난 것 같았다.
“네?”
“뒷산을 가자고 한 것도 나고, 힘도 내가 쓰고 싶어서 쓴 건데.”
마르바스가 찌푸려지는 여인의 눈가를 보며 말했다.
“아니, 그것도 제가 다치지 않았으면…….”
여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는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그의 말을 잘라 냈다.
“됐어, 내가 내 힘을 맘대로 쓰지도 못해?”
조금 예민해 보이는 여인에 마르바스는 말을 보태지 않기로 했다.
“그런 뜻은 아닌데요.”
아무래도 몸 상태가 아직 별로인 듯 여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해 보였다. 평소보다 핏기가 없는 여인의 입술이 열렸다.
“그것보다 내가 왜 쓰러진 건지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데? 왜 그런 거야?”
윗분들의 사정에 제멋대로 입을 나불거리는 건 마르바스의 원칙에 어긋났다.
“밝히고 싶으셨다면 진작에 밝히셨겠죠.”
그리고 그 원칙은 이번에도 통했다. 여인의 날 선 얼굴에 따뜻한 기운이 어렸다.
“…맞아.”
뾰족하던 모서리가 둥글게 변하자 긴장이 슬슬 풀렸다. 마르바스가 침대맡에 기대앉아 있는 여인을 살피며 물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응.”
“저, 그 일로 화를 내시려던 게 아니면 왜 부르셨는지…….”
방에 올라오면서 사용인들에게 여인이 깨어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질책을 하려던 게 아니라면 도대체 왜 이리 급하게 그를 부른 걸까?
“아, 그거.”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창밖을 바라보며 침묵하던 여인이 다시 마르바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여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이제껏 듣고 싶은 말이었고 동시에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관두지 말고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어.”
마르바스는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갑자기 왜요?”
질문을 하면서도 마르바스는 스스로가 무슨 답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능력이 있잖아.”
하지만 적어도 원하던 게 저 답은 아니었다. 여기 있으면 안 되냐는 말 한마디에 흔들리던 마음은 그녀가 내뱉은 말 한마디에 다시금 단단해지려 했다.
“별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
여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번 일 전에 마물이랑 만나 본 적이 있었니?”
“아니요, 어제가 처음입니다.”
뒷산에서 마물이 나온 적이 있었다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여인을 그곳에 데리고 갔을 리가 없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그렇게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도대체 그게 뭐라고 여인이 급작스레 태도를 바꾼 걸까? 여인이 신경 쓰는 그 능력에 괜한 반발감이 들었다.
“혼자서 해치운 것도 아니고, 마족도 아니고 마물인데요?”
하지만 여인은 무언가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훈련만 좀 받으면 마족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리 와 봐.”
머리를 굴리던 마르바스가 여인의 부름에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어정쩡하게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서자 여인이 불쑥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아당기더니 말도 없이 마르바스의 옆구리에 손을 댔다.
“왜, 왜요?”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물리려는데 여인이 옷 너머 상태를 가늠하듯 옆구리를 매만지며 이야기했다.
“따로 치료받은 건 아니네.”
당연했다. 여인 덕에 상처는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으니.
옆구리 이곳저곳을 눌러 보던 여인이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보통 인간은 마물과 그렇게 힘겨루기를 못 해.”
그리고 마르바스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네가 일반적인 남자들보다 강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래도 어제 보여 준 건 그 수준을 넘어섰어.”
여인이 마르바스의 옆구리를 눈으로 더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내 힘에 상처가 그렇게 낫는 것도 평범한 건 아니고.”
마르바스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어제와 오늘 여인의 태도로 짐작해 보건대, 그녀가 가장 신경 쓰는 건 바로 이 점인 것 같았다.
여인의 힘에 나아 버린 그의 상처.
‘일반적인 치유와 뭔가 다른 건가?’
여인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나 말고 따로 성력을 쓰는 사람을 만난 적 있어?”
“아니요.”
“마법사는?”
“만날 일이 있겠습니까?”
마르바스의 답에 안도의 한숨을 쉰 여인이 피곤한 얼굴을 했다.
“…앞으로도 그 둘은 피하도록 해. 정확히는 다친 상처를 보이는 걸 피하라는 소리야.”
마르바스가 솔직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여인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마르바스.”
그리고 그 부름 하나에 여러 의문으로 복잡하던 머리가 깨끗해졌다.
“이건, 이건 너무 특이한 일이야. 그러니까 내가 이 상황이 어떤 건지 조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도 그럴 게 그 부름 안에 마르바스를 향한 걱정과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널 지켜 줄게. 억압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무슨…….”
“그러니 제발 내 옆에 있어.”
제대로 된 설명도 뭣도 없었다. 하지만 저 보랏빛 눈에 가득 찬 감정 때문에 마르바스는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움직임에 환하게 웃는 얼굴이 눈이 부셔서 멍청하게 고개를 숙였던 것도 같다.
그리고 그날부터 정말 생뚱맞게 마르바스는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