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외전2. 마르바스와 클레어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얼굴로 책을 읽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르바스에게 일을 맡긴 영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귀족은 아니다.’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했어야 하는데. 귀족은 아니라는 건 뭔가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소리이지 않은가?
귀족도 아닌 자가 평민 나부랭이한테 이렇게 큰 금액을 보수로 제시했을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 돈에 눈이 먼 마르바스는 멍청했다.
“마르바스.”
“네, 아가씨.”
마르바스는 고용주를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그 정체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이름은 클레어. 그보다 세 살이 많은, 찾아오는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는 여자.
물론 함께한 시간이 있는 만큼 표면적으로 여인이 어디 소속인지는 알았다.
‘신전.’
마르바스는 언덕 아래 지어지고 있는 새하얀 건물을 바라봤다. 여인이 마르바스가 사는 마을에 온 연유이자, 지금까지 이 마을을 떠나지 않은 이유.
마르바스는 아주 느리게 만들어지고 있는 신전을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왜 대단한 영지도 아닌, 특색 하나 없는 이런 시골 마을에 저렇게 정성 들여 신전을 짓는 걸까? 그리고 이 여자는 신관도 아니면서 왜 신전을 짓는 일을 총괄하는 거지?
‘신전 윗분의 숨겨진 자식 같은 거겠지.’
신전 쪽 높으신 분의 ‘숨겨진 자식 4’ 정도가 되는 사람이 아닐까?
왜 굳이 ‘자식 4’냐면, ‘자식 1’이나 ‘2’ 정도는 이런 시골이 아니라 제국의 수도나 다른 유명한 영지로 보내졌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르바스는 그 이상 치솟는 궁금증을 내리눌렀다. 높으신 분들의 비밀을 아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고 마르바스는 두 번째 실수를 범할 생각이 없었다.
‘더는 엮이지 말아야지.’
수상쩍은 자를 모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일적으로만 엮이는 것이 가장 좋았다.
하지만 그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종종 보여 주는 신기한 모습은 마르바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저런 거.
“비가 오려나?”
구름 한 점 없는, 쨍쨍하기 그지없는 하늘을 보며 여인이 말을 한마디 내뱉기가 무섭게 마른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르바스는 저택을 나서기 전 오늘은 무조건 챙겨 나가자는 여인의 고집에 가져온 우산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지체 없이 우산을 여인의 머리 위로 펼쳐 들었다.
“어찌 비가 올 걸 아셨습니까?”
여인이 고개를 꺾어 마르바스를 쳐다보더니 씨익, 쾌활한 미소를 지었다.
“느껴지니까?”
“날씨가요?”
여인은 답을 하는 대신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점점 더 굵어졌다. 마르바스는 여인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며 심술궂게 말했다.
“정말 비가 오는지 아셨다면 이렇게 나들이를 나올 게 아니라 저택에 계시지 그러셨어요.”
그랬다면 이렇게 한쪽 어깨가 다 젖어 내리진 않았을 텐데.
마르바스는 간신히 가려진 머리통과 달리 완전히 드러난 그의 왼쪽 어깨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장대비가 되어 버린 비를 바라보던 여인이 웃음기 섞인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오늘은 나오고 싶었어.”
가져온 책을 꽉 끌어안은 채 맑게 웃은 여인이 빗소리가 예쁘지 않냐고 헤, 웃다가 마르바스의 어깨를 발견하고 놀란 얼굴을 했다.
“오.”
마르바스는 여인의 시선이 어깨에 닿자 보란 듯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얼마나 비가 거센지 어깨가 아플 지경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얼른 돌아가요.”
사냥을 다니다 보면 산속에서 몇 날 며칠 비를 맞는 일은 허다했다. 더군다나 마르바스는 그렇게 비를 맞아도 아픈 곳 하나 없을 정도로 강골이었다.
하지만 몸에 이상이 없는 거랑 비를 맞아서 찝찝한 거랑은 다른 영역이었다.
‘생계가 걸린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이유도 아닌데 뭣 하러 비를 맞아?’
마르바스는 여인이 엉뚱하긴 해도 제법 상냥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불쌍한 척을 좀 하면 저가 먼저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겠지.’
그렇게 여인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젖은 어깨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리던 여인이 들고 있던 책을 그에게 넘겼다. 마르바스는 얼결에 여인이 건네준 책을 우산 든 손의 겨드랑이에 꼈다.
“이걸 왜……?”
의아해하던 마르바스가 그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
경악이 섞인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널리 퍼졌다. 하지만 그 외침이 여인에게는 닿지 않은 것 같았다.
“어때, 이렇게 하면 되겠지?”
마르바스는 눈 깜짝할 새에 비에 흠뻑 젖어 놓고 기분 좋게 깔깔 웃음을 터트리는 여인에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응? 그렇지만 나 조금 더 구경하고 싶은걸?”
“아니, 구경은 그냥 하시면 되지 왜 비를 맞으면서 하세요?”
마르바스가 다시 우산을 씌워 주기 위해 한 발 다가가는데 여인이 그만큼 뒤로 훌쩍 물러나며 대꾸했다.
“그야, 그대로 있으면 어깨가 더 젖을 것 아니야?”
“네?”
마르바스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는데 여인이 말했다.
“우산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한정되어 있으니, 이리하는 수밖에.”
정말 사고방식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아가씨가 우산 아래 있고 제가 나가는 게 맞지 않습니까?”
신분을 봐도, 상대적인 덩치 차이를 봐도. 마르바스의 지적에도 여인은 기분 좋게 웃었다.
“우산을 가져오자고 한 건 책이 젖는 걸 막기 위해서였어. 그러니 책이나 잘 들고 있어.”
도대체 누가 심부름꾼의 어깨가 젖는다고 우산을 넘겨주고 자기는 비를 맞지?
“진짜 이해할 수가…….”
작은 마르바스의 목소리가 거센 빗소리에 잠겨 사라지자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정말이지, 이 여자는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계속 궁금한 게 생기는……. 천진해 보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걸 발견한 마르바스가 울컥해 목소리를 높였다.
“됐고, 얼른 집으로 가요!”
“뭐? 난 좀 더 구경하고 싶은데.”
“감기 걸릴 일 있습니까? 얼른 가자고요!”
마르바스가 고집을 부리자 여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어린애들은…….”
억지로 여인의 머리에 우산을 씌워 주려던 마르바스는 여인이 중얼거리는 말에 허! 코웃음을 쳤다.
‘여기서 철이 없는 게 누구인데?’
마르바스가 억울함에 눈만 부릅뜨는데 여인이 고개를 올려 마르바스를 쳐다봤다.
“응? 왜 또 가지 않고? 어려서 그런가? 변덕이 죽을 끓는구나.”
하-!
고작 세 살 많은 주제에! 키도 작고, 운동도 하지 않아 새하얗고 뼈대도 얇은 여인과 웬만한 사내보다 머리 하나 크고 어깨가 넓은 마르바스 중 더 성숙해 보이는 건 누가 봐도 마르바스였다.
“지금 누구더러……!”
에취.
욱하는 마음에 입을 열던 마르바스의 입이 아교가 칠해진 듯 딱 다물렸다.
그제야 마르바스는 다시 한번 여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폭삭 젖은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괜히 이상한 짓을 해서!”
“응?”
씩씩거리던 마르바스가 여인에게 등을 보여 주며 외쳤다.
“업히세요!”
“어?”
“업히면 둘 다 비에 젖지 않을 것 아닙니까?”
“호오, 그래! 똑똑하구나?”
잔뜩 젖은 몸으로, 거절도 하지 않고 매달리는 여인이 황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잘잘못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젖은 상태로 오래 있으면 크게 앓을 게 분명하니까.
그렇게 마르바스는 화를 내려던 것도 잊고 얼른 여인을 챙겨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 * *
“약해 빠져선.”
하지만 열심히 내달린 보람도 없이 그날 저녁부터 여인의 얼굴에는 열꽃이 피어났다.
“그러게, 비를 왜 맞습니까?”
땀을 닦아 주며 건넨 잔소리에도 통통 튀는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열에 들떠 잠이 든 여인을 빤히 내려다보던 마르바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상하다니까. 얼른 돈이나 받고 떠나야지.”
예정보다 공사가 늦어지고 있긴 하지만 처음 영주와 약속했던 반년이라는 기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몸은 편한데, 이래저래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그러니까 더 관심을 가지기 전에, 더 신경이 쓰이기 전에 얼른 일을 관둬야 했다. 돈도 좋지만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본인의 안위였다.
“이 짓도 얼마 안 남았다는 소리지.”
작게 중얼거린 마르바스는 땀에 젖은 여인의 얼굴에 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치워 주며 다시 수건을 올려 줬다.
밤샘 간호에 조금 정신이 든 건지 여인의 눈이 가물가물 떠진 것도 그때였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마르바스.”
작은 촛불 하나만이 아른아른 방을 밝히고 있는 깊은 밤. 그 작은 불빛 속에서 흐릿하게 드러난 보랏빛 눈이 마르바스에게 닿았다.
마르바스는 기다렸다는 듯 잔소리를 늘어놨다.
“몸도 약하시면서 이상한 짓 좀 하지 마세요. 본인도 힘드시지만 옆에서 간호하는 저도 힘들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옆에서 이렇게 봐주지도 못할 텐데, 이렇게 성심성의껏 신경 써 주는 수족을 구하기 얼마나 어렵겠나?
한참 잔소리를 하던 마르바스는 그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눈만 깜빡거리는 여인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제 말 듣고 계세요?”
그러자 힘없던 여인의 눈가가 길게 늘어지더니 이내 둥글게 말렸다. 그 새롭게 만들어지는 고운 길을 눈에 담는데, 귓가에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다정하구나.”
평소보다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밤의 마법 같은 걸지도 몰랐다. 어쩌면 여인의 감기가 옮은 걸지도.
몸이 뜨끈뜨끈하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말을 마친 여인이 힘에 부친 듯 다시 눈을 감았다는 거다.
마르바스는 그렇게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여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다시 한번 위기의식이 고개를 들었다.
‘감히 올려다볼 생각도 하지 말 거라. 잘 알지?’
귓가로 경고하던 영주의 목소리가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