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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39)화 (139/145)

외전 5화

엘리고스가 쓰고 있던 모노클을 벗으며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제냐에게 들은 것도 있지만, 루미에르가 보기에도 엘리고스는 무력적으로나 풍기는 분위기로나 단순히 마왕성의 집사라고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집사를 찾아온 거니까.’

제냐의 휴가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인물.

그러니까 그를 평가하듯 바라보는 저 시선도, 그 속에 담긴 미약한 적대감도 다 무시할 때였다. 루미에르는 표정 하나 일그러트리지 않고 덤덤하게 엘리고스의 시선을 받아 냈다.

“그러니까 휴가를 달라?”

어이가 없다는 듯 돌아온 물음에도 루미에르는 당당했다.

“네.”

루미에르의 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침묵이 집무실을 갈랐다. 루미에르의 뒤에 반쯤 숨어 있는 레라지에가 안절부절못하며 루미에르의 어깨를 붙들었다.

“루미에르, 우리 이만 돌아가…….”

루미에르는 턱, 하며 레라지에의 손을 털어 내고는 똑바로 서서 엘리고스를 바라봤다. 안경을 벗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청백색의 눈은 깨끗하고 맑았지만 그만큼 차갑고 서늘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을까. 엘리고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달싹였다.

“싫다면?”

차가운 목소리에 레라지에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아하하, 싫다고 하시니. 우리는 이만 돌아가…….”

물론 이번에도 루미에르는 레라지에를 없는 존재 취급했다.

“그럼 주실 때까지 이곳에 있겠습니다.”

루미에르의 답에 레라지에가 흠칫 놀라며 그를 돌아봤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표정으로 우는 레라지에를 당연히 엘리고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가득 들어찬 공간의 침묵을 깬 건 엘리고스였다.

“요즘 그대가 사용인들을 단속한다지?”

“그렇습니다.”

그러자 레라지에가 다시 한번 분위기를 풀어 보기 위해 노력했다.

“하하하, 그래. 그건 그대가 할 일이 아니지. 사용인들 단속은…….”

“덕분에 귀찮은 일이 많이 줄었어.”

그러나 이어지는 엘리고스의 말에 레라지에가 입을 다물었다.

“으음?”

레라지에가 묘한 눈으로 엘리고스를 돌아봤다. 어째서인지 엘리고스는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 준다면 휴가를 허락해 주지. 단 이틀뿐이야.”

“…이틀?”

못마땅해하는 루미에르의 반응에도 엘리고스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일이 너무 밀려 있어. 더 쉬었다가 돌아와서 야근이 늘어나는 것도 싫지 않나?”

그러자 루미에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말 다음 날 이틀로 하죠.”

“그래, 그렇게 해. 마왕성을 떠날 건가? 인간계로 갈 거라면 폐하께 허가를 받아야 해.”

“레라지에 후작님의 성으로 갈 예정입니다.”

“…어디서 바람이 들었나 했더니.”

엘리고스의 차가운 시선이 레라지에에게 꽂혔다. 그러자 레라지에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휘저었다.

“의도한 게 아니라 그냥 우연히!”

하지만 엘리고스는 레라지에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다시 모노클을 썼다.

그러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위압적인 기운도 잦아들었다. 그런 엘리고스의 변화를 살피던 루미에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게 힘을 제어해 주는 건가?’

본래 고위 귀족이었다더니, 마왕성의 사용인들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뭐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평소에는 저 모노클로 마력을 가라앉히는 모양이었다.

‘만약 싸운다면 안경을 벗기 전에 처리하는 게 좋겠네.’

저도 모르게 엘리고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루미에르는 레라지에에게 이끌려 방을 나섰다.

탁.

집무실의 문이 닫히고 레라지에가 대놓고 우는소리를 냈다.

“정말, 무책임하기는!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에도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는 않을 거네!”

레라지에는 방으로 돌아가는 루미에르의 뒤를 졸졸 따라오며 잔소리를 쏘아 댔다.

“사용인들에게 한 짓도 그래. 아무리 그대가 제냐의 연인이라지만 그래도 그대는 외부인인데, 그건 월권으로 보일 수 있었던 행동이란 말일세.”

레라지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라서 당황스럽긴 했지만…….”

작게 말끝을 흐리던 레라지에가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됐어, 그래. 그대가 제냐에게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없지.”

다행히 레라지에의 잔소리는 루미에르가 짜증을 내기 전 끝이 났다.

“그나저나 차는 다 식었을 텐데, 그럼 우리는 뭘 할까?”

레라지에의 말을 흘려듣던 루미에르가 무언가를 느끼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레라지에에게 뭐라 말을 할 틈도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루미에르!”

뒤에서 레라지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보다는 그가 느낀 게 진짜가 맞는지 확인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리고 잠시 뒤, 방 앞에 멈춰 선 루미에르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고 기뻐했다.

“제냐! 왜 여기에 있어요?”

그러자 막 문을 열려고 하던 제냐가 놀라서 루미에르를 돌아보더니 작게 웃었다.

“신경이 쓰여서 말이죠. 오늘은 일찍 퇴근했어요.”

빨리 일 처리하느라 힘들었다며 장난스레 웃던 제냐가 의아한 얼굴로 루미에르의 뒤를 돌아봤다.

“그나저나 왜 혼자예요? 레라지에 님은요?”

“레라지에는…….”

루미에르가 그의 뒤를 막 따라온 레라지에에게 고개를 돌리자 제냐가 그를 따라 인사를 건넸다.

“레라지에 님, 오셨어요?”

한껏 당황한 얼굴을 했던 레라지에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는 여유로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래, 제냐. 오랜만이지?”

언제나 그렇듯 제냐와 레라지에는 가벼운 신변잡기를 이어 갈 것 같았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얼른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고 싶었다.

“인사는 여기까지 하고요. 레라지에가 바쁜 일이 있대요.”

“응?”

“네?”

레라지에와 제냐의 시선이 루미에르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는 뻔뻔하게 레라지에를 쳐다봤다.

“곧 손님맞이를 한다나 봐요.”

“아, 약속이 있으세요?”

“아니…….”

루미에르가 아무 말 없이 레라지에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눈을 이래저래 굴리더니 혼자 또 뭐라 결론을 내렸는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약속이 있어.”

뭐가 됐든 레라지에가 이대로 떠날 생각을 한 건 좋은 일이었다. 루미에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냐의 어깨를 감쌌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 들어가요. 일 몰아서 하느라 힘들었다면서요. 해 줄 말도 있고.”

“응? 그래도…….”

제냐가 그래도 되나 하는 얼굴로 레라지에를 쳐다보자 그가 얼른 들어가라며 손을 저었다.

“하하하, 그래. 나는 이만 가 보지. 어차피 우리는 또 볼 거니까?”

“아, 그 안녕히 가세요. 레라지에 님. 그래도 마중이라도…….”

다행히 이번에는 루미에르가 나서기 전, 레라지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럼.”

루미에르는 제냐가 뭐라고 말을 더 꺼내기 전 레라지에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방문을 열었다.

“자, 우리도 들어가요.”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제냐의 추궁 가득한 시선을 받았다.

“루미에르, 솔직하게 말해요. 뭔 짓 했어요?”

뭐, 그런 얼굴조차도 귀엽기 짝이 없었지만.

“음, 아니라고는 못 하겠어요.”

“네에? 무슨 사고 친 거예요? 혹시 레라지에 님을 때렸어요?”

말이 왜 그렇게 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제냐의 얼굴에는 그를 향한 걱정과 애정이 가득하니까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그에게만 집중하는 제냐라니 오히려 굉장히 좋았다.

루미에르 생글생글 웃으며 그 시선을 만끽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는 건 싫으니까…….

그는 제냐가 재촉하기 전 얼른 입을 열었다.

“레라지에가 우리를 성에 초대했어요.”

“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제냐의 얼굴에 루미에르가 줄줄 설명을 이었다.

“엘리고스에게도 허락을 받았어요. 주말 다음 이틀을 쉬어도 된다고요. 그러니까 우리 놀러 가요.”

“어…….”

제냐가 눈을 크게 뜨고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혹여 제냐가 거절을 할까 루미에르가 얼른 설득을 시작했다.

“요새 많이 피곤했잖아요? 갔다 오면 기운도 충전되고, 일도 더 잘될 거예요.”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어찌나 피곤해하는지 제냐의 눈 밑은 어두웠고 잠꼬대로도 일하기 싫다고 중얼거리는 지경이었다.

루미에르가 엄지로 제냐의 눈가를 매만지는데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제냐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놀러 가요?”

“네.”

“쉬는 거네요?”

“그렇죠?”

“마왕성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말이죠.”

“네에.”

확인을 받고 싶다는 듯 질문을 이어 가는 제냐가 귀여워 웃는데 그녀가 양손을 번쩍 들며 소리를 질렀다.

“와! 와아!”

해맑게 좋아하는 제냐를 보자 루미에르의 가슴이 참을 수 없이 벅차올랐다.

이렇게 좋아해 줄 줄 몰랐는데. 만세 삼창을 하던 제냐가 와락 루미에르를 껴안더니 너무 좋다고 웅얼거렸다.

‘아.’

루미에르는 꽈악, 그녀를 껴안고 싶은 걸 참으며 어색하게 굳었다. 제냐가 이렇게 먼저 다가올 때마다 벅차오르는, 터져 나오는 감정을 참기가 힘들었다.

‘가라앉혀.’

지금 이 힘으로 그녀를 끌어안으면 분명 제냐가 다칠 테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정한 다음에…….

하지만 그를 껴안고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에 가득 찬 웃음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루미에르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 곳곳에 키스를 내렸다.

“푸하하, 뭐 하는 거예요?”

간지럽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제냐의 양 뺨을 손으로 붙잡고 쪽쪽 입을 맞췄다.

“제냐, 너무 좋아요.”

“숨, 숨 막혀요.”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도 최대한 참고 있는 거라고, 속마음을 슬쩍 드러내며 루미에르가 제냐를 와락 들어 올렸다.

쪽쪽, 잘게 이어지던 키스가 짙은 연인의 키스로 바뀌는 건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으음.”

달콤한 제냐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마계에서의 하루가 또 흘러갔다.

-외전1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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