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마왕성에서의 하루의 시작은 늘 행복한 웃음으로 시작됐다.
“루미에르, 일어나요.”
이미 진작에 일어나 있었음에도 아침잠이 많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침대에 곱게 누워 있던 루미에르는 제냐가 그를 세 번째 부르자 부러 눈꺼풀을 떨며 눈을 떴다.
“제냐.”
그를 향한 애정으로 황홀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보랏빛 눈을 마주하자 자연스레 웃음이 났다. 부드럽게 말려 가는 입꼬리에 쪽, 입을 맞춰 주는 제냐를 그대로 끌어안고 싶었다.
“일어났어요?”
이마 위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 주며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는 달았다. 루미에르는 어리광을 피우듯 그의 옆에 앉은 제냐의 배에 얼굴을 묻고 작게 웅얼거렸다.
“더 자고 싶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냐는 부드럽게 그를 달래 줄 것이다. 운이 좋으면 키스를 한 번 더 받을 수 있을 테고.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제냐는 단호했다.
“안 돼요. 오늘 레라지에 님이 찾아온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이어진 말에 루미에르는 오늘이 평소와 조금 다른 하루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래, 오늘은 그 귀찮은 귀족이 찾아오기로 한 날이었다. 루미에르가 행동을 멈추자, 제냐가 걱정스레 그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요? 역시 혼자 만나는 건 좀 그래요?”
“아니, 아니에요.”
루미에르는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그렇다고 말을 해 버리면, 약속은 저녁 시간으로 미뤄질 것이고 그러면 둘만의 즐거운 저녁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냥 내가 상대하는 게 나아.’
루미에르가 빠르게 표정을 정돈했다.
“일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그렇죠. 그래도…….”
“다른 마족들과 달리 싸우자고 달려들지도 않을 테고요.”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 걱정 말고 얼른 식사해요. 곧 출근해야 하잖아요?”
“정말 힘들면 집무실로 사용인을 보내요. 알았죠?”
“네, 그럴게요.”
루미에르는 레라지에에 대한 귀찮음과 짜증은 잠시 뒤로 물러 두고 하루에 얼마 안 되는 제냐와의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는 건 마음에 들지만.’
마왕성에 돌아온 제냐는 너무 바빠서, 그녀를 온전히 독차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녀가 출근하기 전인 지금과 퇴근한 그녀가 잠들기 전 몇 시간뿐이었다.
제냐가 고프다고 그녀를 재우진 않을 수 없으니, 그는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했다.
루미에르가 환하게 웃으며 제냐를 잡아끌었다.
* * *
언제나 그렇듯 제냐와 함께 있는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갔다. 출근하는 그녀를 배웅하고 홀로 돌아오는 길.
루미에르는 일어나는 순간부터 얼굴에 가득했던 미소를 지워 냈다.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앞으로 굉장히 바빠질 예정이었다.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루미에르가 막 서로를 향해 달려들려고 하던 사용인들의 앞으로 이동해 그들을 창밖으로 내던졌다.
“아아악!”
“헉! 루미에르-!”
제냐가 야근을 하게 만드는 마족 놈들. 그래서 제냐와 그의 시간을 빼앗는 시끄러운 것들.
이 마왕성에는 그런 쓰레기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니까 루미에르가 청소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어억, 던지지 마! 나가서 싸울게!”
“나, 나 뛰어내린다? 응? 나 혼자서도 잘해!”
물론 루미에르는 이번에도 그들의 행동을 기다려 주지 않고 냅다 그들을 내던졌다. 성안에서 싸워 성을 부서트리는 것만 아니면 저들이 서로를 죽이든 말든 루미에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니까.
물론 루미에르가 싸우는 마족들만 단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에든 물건을 내버리고 희희낙락 이동하려는 사용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빛 한 점 돌지 않은 것 같은 건조한 푸른 눈이 빤히 상대를 응시하자, 놀라 눈을 크게 뜨던 사용인이 이래저래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어색하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암, 일을 해야지. 놀긴, 뭘 놀아?”
허허, 어색한 웃음을 흘린 사용인이 들고 있던 물건을 꼭 쥐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물론 저렇게 말을 해 놓고 도망치는 놈들이 없는 건 아니라서, 루미에르는 자연스레 그 뒤를 쫓았다.
사용인이 점점 더 빨라지다 못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지만 그건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루미에르가 휙, 사용인의 옆으로 다가가자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 쫓아오는 거야?!”
저쪽에 사용인들이 많고, 루미에르는 마족들을 믿지 않으니까.
하지만 굳이 답을 해 줄 필요는 없었기에 루미에르는 당연하게 그 질문을 무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주변을 돌아다니며 내조를 이어 갔을까.
“아이고! 일이 너무 재밌다!”
“야! 싸우자…는 미친놈이 도대체 누구야?!”
“아니, 아니. 아직 안 싸웠어!”
루미에르는 당황 가득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루미에르, 그대 뭘 하는 거지?”
목소리의 주인공, 레라지에와 눈이 마주친 루미에르가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나도 반갑긴 한데. 그, 일단 손에 든 사용인은 좀 내려 두는 게,”
레라지에의 지적에 루미에르가 들고 있던 뒷덜미를 놓아줬다. 문제는 그 위치가 창밖이었다는 거지만.
“아니, 그렇게 던지면……!”
불필요한 걱정을 하는 레라지에에 루미에르가 가볍게 대꾸했다.
“이 정도로 크게 다치지 않습니다.”
만약 크게 다친다면 그만큼 사고를 안 칠 테니 좋다는 말은 삼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레라지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그렇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사용인들이 비처럼 하늘에서 계속해서 떨어지는 건 좀.”
비처럼 내릴 정도로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사용인이 많은 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고 싶었다.
오는 길에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용인들 때문에 깜짝 놀랐다고 중얼거리는 레라지에의 말을 무시한 루미에르가 목에 걸려 있던 시계를 확인했다.
자연스레 시간보다 먼저 제냐의 그림을 눈에 담은 루미에르가 조금 유해진 마음으로 물었다.
“조금 일찍 오셨네요?”
“아, 그렇지 뭐.”
“무슨 일로 뵙자고 하셨는지.”
그러니까 아주 조금. 그러나 레라지에는 그런 루미에르의 태도에 이골이 났는지 천연덕스럽게 친한 척을 하며 달라붙었다.
“응? 그러지 말고 차라도 한잔하지. 내가 아주 좋은 차를 가져왔어.”
제냐가 우리 둘의 대화를 궁금해할 거라는 말까지 보태며 그를 밀어 대는 레라지에에 루미에르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이동했다.
“여기가 좋겠군, 햇빛도 좋고. 가구도 예뻐!”
레라지에는 꼭 여기가 자기 성인 것처럼 적당한 방을 찾아냈고, 사용인들을 부리는 대신 직접 차를 타기 시작했다.
“우연히 폐하께서 다도에 능하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다도를 배우기 시작했다네. 이게 참 향이 좋아.”
정말 섬세한 작업이라며, 요새는 마음을 가꾸는 일에 전념한다는 레라지에의 외양은 그 말과 달리 여전히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루미에르가 무심하게 차를 마시는데, 차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그가 눈을 반짝였다.
“어떤가?”
뭐가? 의아해하던 루미에르는 찻잔을 바라보는 레라지에의 시선에 적절한 답을 내뱉었다.
“괜찮네요.”
제냐와 레라지에의 사이가 나쁘지 않으니 그에게 너무 무례할 수는 없어 던진 답이었다. 그리고 그런 빈말에도 레라지에는 크게 기뻐했다.
“그런가?!”
그러고는 신이 나서 챙겨 온 찻잎 통을 통째로 루미에르에게 넘겼다.
“그럼 이 찻잎은 선물로 주지. 좋은 차니까 제냐도 함께 마시게.”
허허,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던 레라지에가 허공에서 붕 뜬 손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참, 머리카락이 짧아진 걸 잊는다니까?”
그날 머리카락이 싹둑 잘린 이후, 레라지에는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머리카락이 짧아진 만큼 귀에 액세서리가 잔뜩 늘어나서 화려한 건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엘리고스와 같은 짧은 은발이라 이래저래 놀라는 마족들이 많다지.’
물론 이건 루미에르가 레라지에에게 관심을 가진 게 아니라 제냐가 해 준 말이었다.
루미에르는 그 뒤로 적당히 레라지에의 수다에 맞장구를 쳤다. 레라지에는 그 정도만으로도 훌륭히, 아니 아주 길게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마족이었다.
도대체 언제쯤, 이 의미 없는 대화가 끝날까 흘러가는 시간을 가늠해 보던 루미에르의 귓가에 레라지에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려온 건 그때였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성에 놀러 오지 않겠나?”
“성이요?”
루미에르가 관심을 가지자 레라지에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이번에 새롭게 성을 단장했다네. 얼마나 예쁜지 몰라. 데이트하기에는 딱 좋지. 제냐랑 같이…….”
루미에르가 그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데이트, 둘만의 시간. 루미에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그런 루미에르의 반응에 화색을 띠던 레라지에가 일순간 아주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 그래? 그런데 그 전에 해결해야 하는 게 있는데. 사용인들의 휴식은 대체로 집사가 처리하거든.”
아하.
순식간에 그가 해야 할 일을 알아차린 루미에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 바로 갈 건가?”
당연했다.
“아니, 그렇게 쉽게 허락해 주지 않을 텐데?”
레라지에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말렸다.
“물론 폐하보다는 쉽게 허락해 주겠지만! 응? 뭔가 좀 더 준비를 하고 가는 게…….”
물론 루미에르에게 그런 레라지에의 말을 전혀 입력되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꼬신 게 아니라 그대가 그냥 원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도 좋은데!”
루미에르는 그의 뒤를 따라오는 레라지에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곧장 엘리고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루미에르? 루미에르! 조금 진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