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피곤함에 찌든 채 일과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서던 제냐는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금발의 사내에게 활짝 미소를 지었다.
“루미에르.”
“수고했어요, 제냐.”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루미에르는 그녀의 불규칙한 퇴근 시간에도 언제나 딱 맞춰 그녀를 데리러 왔다. 제냐가 뛰듯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정말, 어떻게 아는 거예요?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죠?”
그녀가 퇴근할 때까지 한자리에서 기다리는 루미에르라니. 제냐의 눈빛이 걱정스레 바뀌자 루미에르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쯤이다 싶어서 올라오면 꼭 제냐가 내려오고 있더라고요. 역시 우리가 운명이라서 그런 것 같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하는 루미에르에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 제냐가 그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오늘도 많이 달려들었어요? 귀찮았죠?”
딱히 몸에 상처가 나거나 옷이 해져 있지 않았지만, 마왕의 반응을 보건대 오늘도 루미에르는 엄청난 수의 마족들과 싸웠을 것이다.
‘이제 그 붉은 힘이 검을 대체한다는 건 알지만.’
맨손으로 서 있는 루미에르에게 마족들이 우르르 달려드는 건 보기 좋은 꼴이 아니었다. 제냐가 눈을 잔뜩 찌푸리자 루미에르가 눈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뭐, 어쩌겠어요. 그래도 오늘은 좀 빨리 끝났어요.”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런데…….”
루미에르와 대화를 하면서 막, 그들의 방이 있는 층으로 들어선 제냐는 그들을 쳐다보는 마족들의 시선에서 묘한 열기를 발견했다.
“왜요?”
우뚝 자리에 멈춰 서자 루미에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냐가 루미에르에게 끌려 걸음을 옮기며 다시 한번 마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뭔가 평소보다 시선이 더 끈질기지 않아요?”
보라고,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더 열렬한 빛을 내는 저 눈빛들을. 원래 이 층에 사용인들이 이렇게 많을 리가 없는데…….
제냐가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사용인들을 바라보는데, 루미에르는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음. 글쎄요.”
“아닌데, 뭔가 다른데.”
끈질기고, 동시에 뭔가 바라는 것 같은…….
하지만 계속되는 루미에르의 부정과 지친 몸 때문일까? 방에 들어서자마자 제냐는 그 시선을 머릿속에서 삭제했다.
하지만 바로 며칠 뒤, 제냐는 그날 느꼈던 기시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업무 지시를 위해 주방에 들른 제냐는 잔뜩 흥분해 그녀에게 달려오는 사용인들을 보며 일이 잘못 돌아가도 한참 잘못 돌아갔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제냐, 네 남자 친구 말이야. 남자 친구는 따로 없는 거지?”
그 남자 친구가 내가 생각하는 남자 친구가 맞는 건가?
“팬클럽, 팬클럽을 만들었어!”
불끈, 주먹을 쥐고 콧김을 뿜는 마족.
“난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열의 가득 찬 눈으로 의리를 외치는 마족.
“하, 정말 난 사랑에 빠져 버렸어.”
얼굴을 붉히며 녹아내리는 마족까지.
튀어나오는 말마다 족족 황당하다 못해 귀를 씻어 내고 싶은 이야기들뿐이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비프가 나서서 사용인들을 밀어낼 때까지 현실을 부정하던 제냐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비프, 이게 다 무슨 일이죠?”
사용인을 쫓아낸 비프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가벼운 녀석!”
“네?”
“사용인의 절반 이상이 그 녀석에게 흠뻑 빠졌어!”
“…그게 무슨……?”
정말, 정말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제냐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비프를 쳐다보자 그가 팔 근육을 움찔거리며 설명했다.
“마왕성의 새로운 스타가 등장한 거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도대체 그녀가 일하느라 바쁜 사이 루미에르는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걸까?
비프에게 밀려났음에도 루미에르를 외치는 사용인들을 바라보며 제냐가 눈을 질끈 감았다.
* * *
비프에게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은 제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리며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왔으면 얼른 일이나 다시 시작하라는 마왕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책상에 푹 엎어졌다.
마왕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제냐를 바라봤다.
“…뭐 하는 거지?”
꺼림칙한 마왕의 목소리에 한참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던 제냐가 끼기긱, 목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폐하, 요즘 성 분위기를 아세요?”
“뭐?”
제냐는 한쪽 눈썹을 치켜든 잘생긴 사내를 바라봤다. 정말 저렇게 생겼는데, 왜 일이 이렇게 됐지?
그녀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내며 중얼거렸다.
“성에서 제일가는 인기쟁이는 폐하셨는데, 이제 그 순위가 바뀌고 있어요.”
“무슨 소리야?”
밖에 나갔다가 정신머리를 두고 온 거냐는 타박에도 제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걸 용납하실 건가요? 성의 주인은 폐하이신데, 그걸 그렇게 덥석 다른 이한테 넘겨도 되나요?”
그냥 다른 마족도 아니고, 그렇게 싫어하는 루미에르에게 빼앗겨도 정말 괜찮은 걸까가?
제냐가 책상에 엎어졌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외치자 마왕이 피곤한 얼굴로 펜을 내려놓았다.
“알아듣기 쉽게 말해.”
제냐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자질을 하듯 말했다.
“사용인들이 다들 루미에르를 좋아해요.”
진중하던 마왕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쩌라고?”
도대체 그게 무슨 문제냐는 표정을 읽어 낸 제냐가 쾅,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렇게 넘어가실 일이 아니라니까요? 다들 루미에르만 보면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면서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녀요!”
마왕의 얼굴이 더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루미에르의 남친 자리를 두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팬클럽들이 자기들이 정식 아니냐고 달려들어요.”
“…뭔 소리인지.”
다다다 말을 쏟아 내자 마왕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굳이, 그걸 신경 쓸 필요가 있나?”
도대체 그런 이야기를 왜 자기한테 하냐는 마왕의 태도에 속이 답답해졌다.
“네에? 지금까지 제 말 제대로 안 들으셨어요?”
괜히 집중했다며 고개를 저은 마왕이 다시 펜을 쥐었다.
“뭐가 문제야? 완벽히 마계에 적응한 것 같은데.”
제냐는 마왕이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 얼른 말을 이었다.
“적응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건! 마족들을 다 홀리고 있다고요!”
그래, 적응하는 건 나쁘지 않다. 그런데 적응하는 걸 넘어서서 이놈 저놈 다 꼬시고 다니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연인도 있는 사람이?
세상에!
그러니까 루미에르가 마족들을 더 홀리기 전에 마왕이 나서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여기는 마왕성이고 성의 주인인 마왕이 제일 인기가 많아야 하는 곳이니까!
‘당신이 최고의 스타가 돼야지!’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을 뱉으면서도 제냐가 눈을 불을 켰다.
“폐하, 위기감을 느끼지 않으시는 건가요?”
마왕이 그런 제냐의 모습을 보며 허, 헛웃음을 흘렸다.
“뭐, 나는 나쁘지 않은데.”
하! 그래, 나만 지금 안달복달하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정말 싫다고.’
인간들이 루미에르를 보고 눈을 빛내는 것도 짜증 났는데, 이제 마족들까지 그런다고?
제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자 마왕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방에까지 쳐들어오는 건 아닐 것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니니, 이런 일이 일어난 지 꽤 됐는데도 제냐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미에르도 나한테 말 안 했고.’
일이 이 지경까지 왔다면 진작에 그에게도 마족들의 손길이 닿았을 텐데, 루미에르는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왜 말을 안 했을까?’
별로 대단치 않은 일이라 생각해서? 하지만 이게 대단한 일이 아니면 뭐가 대단한 일이지? 입을 삐죽 내미는데 마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상관없지.”
“상관없지 않다니까요?”
자기 일이 아니라는 저 태도가 짜증이 났다. 하지만 마왕은 이 이상 제냐에게 어울려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쉰 마왕이 다시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잡담은 거기까지 하지. 일이 많아.”
결론도 나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해 봐야 시간 낭비라는 말에 제냐가 결국 어기적거리며 펜을 손에 들었다.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주변에 루미에르에게 달려드는 놈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녀는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옆에서 관리를 해도 모자랄 판에.’
하지만 제냐에게 주어진 일은 너무 많았고, 이 일을 해결하기 전에는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일하는 사이에 지금도 마족들은 루미에르 주변을 껄떡거리겠지?’
애당초 이렇게 일이 많은 것도 다 성에 사는 마족 놈들의 농간이 아닐까? 허구한 날 사고를 쳐서 루미에르의 옆에서 그녀를 떼어 놓으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똑똑한 타입은 또 아닌데.’
하지만 그것들이 멍청하다고 안심하기에는…….
마족들이 좋아하는 일에는 얼마나 적극적인지 알고 있는 제냐의 얼굴이 우중충하게 변했다.
제냐가 잔뜩 우울해진 얼굴로 뭉그적 움직이자 그게 답답했는지 마왕이 한숨처럼 말했다.
“정 그러면 너도 여자 친구 만들든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제냐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마왕을 돌아봤다. 그러고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걸 농담이라고 하신건가요?”
그러나 그런 제냐의 반응이 마왕을 더 자극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남편?”
어떻냐고 고개를 까딱이는 마왕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해 보였다. 정말 저렇게 놀리고 싶나?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을까.’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뭘 바라고 마왕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서, 놀림이나 받고 있어야 하지?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마왕에게 한탄했던 제냐는 스스로의 입을 때려 버리고 싶었다.
제냐는 푸욱, 대놓고 큰 한숨을 쉬며 마왕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에 힘을 잔뜩 준 채 벅벅 글을 써 내려갔다.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가득한 고요한 방 안이었지만, 그럼에도 제냐의 속은 시장 한복판처럼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