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외전1. 마왕성의 루미에르
휴가에서 복귀한 제냐는 그간의 게으름이 무색하게 엄청나게 몸이 갈리고 있었다.
“일을 하시긴 한 거예요?”
손목이 부서져라, 일을 하던 제냐가 우는소리를 하자 마왕이 고개도 들지 않고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그 질문이 몇 번째인지 아나?”
제냐는 그녀의 등 뒤에 가득 쌓인 서류들을 보며 외쳤다.
“몇 번이나 물을 정도로 일이 많으니까 그렇죠!”
그러자 마왕이 꼭 이 모든 게 네 탓이라는 것처럼 말했다.
“휴가가 너무 길었어.”
그래 봐야 몇 달인데! 인력 하나 사라졌다고 이렇게 일이 쌓이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10년 치를 몰아서 쓴 거거든요?”
“그러니까. 눈치껏 적당히 나눠서 써야지.”
악덕 상사 같으니. 일하는 인력을 더 뽑으면 되잖아? 하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는 제냐도 알았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일을 맡길 만한 마족이 없다는 걸.
‘그나마 멀쩡한 건 귀족들인데.’
그치들도 자기들 성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귀족들이라고 다 멀쩡한 것도 아니니까…….
“쯧.”
마왕이 혀를 차는 소리에 제냐가 창밖을 바라봤다. 제 귀엔 들리는 게 없었지만, 마왕의 반응을 봤을 때 바깥은 꽤 소란스러울 것이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래를 쳐다보고 싶었다. 제냐가 마왕을 향해 은근하게 물었다.
“안 말리세요?”
“말려야 하나?”
마왕의 얼굴에는 ‘난 저 일에 관심 없다’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것 같지만, 제냐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신경 쓰이시잖아요.”
불편하게 찌푸려진 마왕의 미간을 바라보자 그가 부정하지 않고 답했다.
“거슬리지, 내 영역에서 제멋대로 힘을 다 풀어 재끼니까.”
흐음, 그런 의미로. 하지만 뭐가 됐든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건 맞잖아?
“그런데요?”
어째서 저 상황을 말리지 않는 걸까? 여기는 마왕성이고, 마계인 이상 그의 한마디면 저 소란들도 빠르게 정리될 텐데.
마왕은 꼭 남 일을 보듯, 이 모든 일을 방관하고 있었다.
긴 휴가를 마치고 마계에 돌아온 지 한 달.
처음에는 얌전하다 싶었던 마족들이 슬금슬금 루미에르를 건드리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암살자도 아니면서 루미에르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말로는 내 짝으로 적합한 놈인지 시험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다 핑계였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시작인지, 루미에르가 아주 강한 인간이라는 소문이 퍼져 버리고. 호승심이 차오른 싸움광들이 제 버릇 남 못 주고 미친 듯이 싸움을 걸어 대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그들을 상대하던 루미에르도 끝도 없이 달려드는 마족들에 점차 진심으로 변했고.
물론 그로 인한 파생 효과는 제냐의 업무 과중이었다. 마왕성이 하루가 멀다고 이제까지 규모와 비교도 되지 않게 박살이 났으니까.
결국에 이틀 전부터 루미에르는 성 밖에서만 마족들의 싸움을 받아 주고 있었다.
‘거기다가…….’
처음에는 사용인들에 한정되어 있던 도전자들도, 지금에 와서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귀족들까지 더해지고 있었고.
‘멀쩡한 놈들이 없다니까.’
제냐가 짜증스레 미간을 좁히는데 마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저 녀석이 마계에 적응하길 바라는 것 아닌가?”
“맞죠.”
“그럼 놔둬. 무식한 것들은 힘이면 다 받아들일 테니까. 그게 인간이라도.”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식한 만큼 단순하기 짝이 없으니 한번 힘으로 눌러 주면 숭배했으면 했지, 루미에르를 우습게 볼 마족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쉬지 않고 싸우는 건 이래저래 걱정됐다. 그래서 제냐는 슬쩍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아니면 루미에르가 저랑 같이 여기서 일하는 건…….”
꼭 무력적인 강함이 아니더라도 제냐처럼 다른 의미로도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름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왕의 반응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뚜둑, 대화를 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던 마왕이 손에 들린 펜을 부서트리고, 제냐를 쳐다봤다.
마왕은 눈으로도 욕을 참 잘했다. 제냐는 괜히 말을 더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사각사각, 펜을 움직이면서도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울상을 짓던 제냐는 시선이 떨어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괜히 둘이 붙여 두면 싸움만 나지.’
사람 하나 죽여 버릴 것 같은 그 흉흉한 시선을 떠올리며 제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이번 제안은 너무 생각이 없었다.
‘마왕이나 루미에르나 서로를 보면 으르렁거리기 바쁘잖아.’
물론 그런 것치고는 루미에르도 마왕도 두 사람이 마계에서 머무는 게 당연하다는 듯 굴어서 좀 이상하긴 하지만.
제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 그래도 일이 넘쳐흐르는데, 다른 데에 신경을 쏟고 있을 틈은 없었다. 계속 바깥에 신경을 쓰니까 마왕이 일에 집중하라고 직접 마법까지 둘러 주지 않았던가?
‘지금 안 하면 내일의 내가 고생이지.’
휴우, 과거의 제냐가 저지른 똥을 치우느라 바쁜 현재의 제냐가 지친 얼굴로 손을 놀렸다.
* * *
마왕성 주방 소속 조리사 투투는 감탄 어린 눈으로 이어지는 싸움을 지켜봤다.
“우와.”
그런 투투의 감탄사를 들은 친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를 타박했다.
“봐 봐, 진작 오자고 그랬지?”
“아니, 나는 이렇게 수준 차이가 크게 날 거라고는…….”
투투도 제냐의 연인, 루미에르가 마왕성의 사용인들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긴 했다. 하지만 마왕성 사용인들이라고 해 봐야 수준은 거기서 거기였고, 그래 봐야 별 볼 일 없는 싸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뭣보다 인간이라고 했잖아.’
아무리 제냐의 연인이라도, 비프의 명령이 있어서 그에게 호의적으로 군다고 해도, 투투의 인식 속 루미에르는 얼굴만 잘생긴 인간이었다.
아무리 강해 봐야 그래도 인간.
하지만 지금 투투의 앞에 있는 진실은 그의 편견을 깨부수는 중이었다.
“나뭇잎이 휘날리는 것 같네…….”
루미에르에게 덤벼들었다가 휘리릭, 날아가는 사용인 무리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용인 중에서도 제법 제정신이 박혀 있다는 평을 받으며, 온건한 마족 축에 속하는 투투의 호승심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물론 덤벼도 지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 진심으로 공격해 보고 싶은 것이다. 심장이 간질거리는 이 느낌이 얼마 만인지!
투투가 쿵쿵 뛰는 심장과 함께 저 무리에 뛰어들까 말까 고민하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거칠게 투투의 손을 붙잡았다.
“망했다!”
“…응?”
싸움에 집중하느라 주변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던 투투는 친구의 호들갑에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곧 경악의 빛이 어렸다.
“저, 저분이 왜?”
못된 얼굴로 씨익, 웃고 있는 저 마족은…….
투투의 흔들리는 목소리에 친구가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사용인들만이 아니라, 소문을 듣고 귀족분들도 몰려오긴 했었어. 하지만 저분이 올 거라고는…….”
“뭐? 귀족들이 왔었다고? 그건 어떻게 됐는데?”
“당연히 루미에르가 다 이겼지.”
“귀족들보다 강하다고?”
기겁하는 투투에 친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껏 왔던 귀족들은 전부 남작이나 자작이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경우가 다르지 않냐는 말에 투투가 눈에 불을 켜고 루미에르와 상대의 수준을 가늠해 봤다.
“야, 불똥 튀기 전에 얼른 도망가자.”
친구의 말에 투투가 눈에 힘을 줬다.
“뭐? 다 보고 가야지.”
그러자 친구가 제정신이냐며 투투의 팔을 마구 두드렸다.
“야! 저분이 누군지 몰라?”
누굴 바보로 아는 건지, 투투가 코웃음을 쳤다.
“뭘, 몰라. 베리스 백작님이잖아!”
쨍한 파란 머리에 파란 눈. 누가 봐도 피에 미친 미치광이 베리스 백작이었다. 투투의 답에 친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내리쳤다.
“그니까 도망가야 한다고!”
“절대 안 돼! 내 피가 말하고 있어, 이건 정말 엄청난 싸움이 될 거라고!”
절대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꼭 이 두 눈으로 담아야 했다. 잔뜩 흥분한 투투를 보며 친구가 질색했다.
“미친놈아.”
얌전하고 온순하다던 그간의 평가를 날려 버린 투투가 베리스 백작을 욕한 것 따위는 우습게 제정신이 아닌 얼굴로 강하게 친구의 팔뚝을 붙잡았다.
“보고 가자, 너도 보고 싶잖아. 응?”
“죽고 싶으면 너 혼자 죽으라니까?”
“죽기 전에 이런 걸 보고 죽을 수 있는 건 큰 영광이지, 암.”
마족으로 태어나 이런 자리를 피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말을 덧붙이는 투투에 친구가 발버둥을 쳤다.
“난, 아직 죽기 싫다고. 나는 아직 앞날이 창창한 이백 살이야!”
“내가 너보다 열 살 어린 거 알지?”
“그럼 이건 뭐, 젊은이의 객기냐?!”
“어허, 젊은이의 호승심이지!”
어떻게 해도 매달리는 투투에 친구가 몇 번이나 도망을 가려다가 결국 자리에 붙잡혔다.
“내가 다치면 다 네 탓이야.”
기어이 원하는 바를 이룬 투투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친구야. 우리만 남는 것도 아니거든.”
그 말대로였다.
베리스의 등장 이후, 혼비백산했던 것이 우습게 대다수의 사용인들이 자리에 남아 곧 시작될 싸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마족들은 다들 피에 미친 미치광이가 맞았다.
그리고 잠시 뒤, 투투는 이 자리에 남아 있기로 한 스스로에게 큰 칭찬을 건넸다.
“와아!”
“엄청나!”
우승자를 확인한 사용인들이 마구 손뼉을 쳤다. 그리고 그건 투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대단해!’
처음과 다름없이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사내를 보며 투투는 사랑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