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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34)화 (13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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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제냐가 돌아온 마왕성은 시끌벅적했다. 돌아온 그녀를 반가워하는 이들이 반, 기회를 틈타 놀고 싶어 하던 이들이 반인 것 같긴 했지만.

그러나 그런 성의 분위기와 다르게 여전히 적막한 곳이 있었다. 바로 마르바스의 집무실이었다.

마르바스는 소란스러운 성의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쌓여 있는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는데, 그건 그의 옆에 있는 엘리고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일을 이어 갈 것 같았던 두 마족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몇 초 뒤, 노크 소리와 함께 곧장 문이 열렸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마르바스와 엘리고스의 시선을 받으며 문을 닫았다.

“제냐는 주방장과 이야기 중입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제냐의 행방을 이야기한 루미에르에 마왕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걸 알려 주려고 온 것 같진 않고.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지.”

그러자 루미에르가 기다렸다는 듯 본론을 꺼냈다.

“일부러 가볍게 이야기해 준 건 고맙습니다.”

주어가 생략된 이야기임에도 집무실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예언.

마르바스는 오늘 제냐가 들고 왔던 문서를 떠올렸다.

제냐에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 그게 천신에 의해 내려진 신탁이었다면 그 의미가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르바스가 그런 태도를 보인 건, 전부 제냐를 위해서였다.

이제야 간신히 사람답게,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흔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저 둘의 관계에서 제냐가 저자세인 것도 별로고.’

천계의 보석을 제냐가 소유하지 않는 한, 그녀가 예언에 휘둘릴 이유도 없으니 그냥 가볍게 넘어가자고. 그 짧은 순간 사이 엘리고스와 합의를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건 저 용사 나부랭이에게 인사를 받을 일이 아니었다.

마르바스가 표정 변화 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는데, 루미에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에 머무는 걸 허락해 줬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바스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펴고 무심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제가 여기에 머물러도 계속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아하, 왜 찾아왔나 했더니.

순간 마르바스의 입가에 피식, 바람이 샜다.

‘그래, 멍청한 놈은 아니군.’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제냐가 그에게 마음을 주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저 아름다운 외모도, 용사라는 신분도 아니라 단지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마르바스를 꺼리는 게 분명함에도 이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를 찾아온 거겠지.

마르바스의 웃음에 눈썹을 치켜세우던 루미에르가 한숨처럼 말했다.

“진실만을 말해 주길 부탁드리죠.”

꾸벅, 숙이는 고개를 보면서 마르바스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래, 제냐를 위해서는 이렇게 자존심도 죽일 수 있는 사내이니 그녀를 놓아줄 수 있는 것이다.

‘잠시뿐이겠지만.’

일이 마무리되고, 제냐가 루미에르와 여행을 떠나겠다고 한 순간부터. 아니, 제냐가 그가 저지른 짓을 알게 된 순간부터 다짐했던 일이었다.

제냐는 그가 마족인 한, 끝까지 마음 전부를 열지 않을 거라는 걸 받아들이자고.

마족들과 함께하는 한, 이번 생의 제냐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벌도 참 지독하지.’

정말 그에게는 최악의 벌이었지만, 원래 벌이라는 게 다 그런 거였다.

성녀가 그렇듯 마르바스 역시 그에게는 가장 타격이 큰 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건 전부 벌의 일종이었다.

“내가 마족이 된 게 특이 케이스였다고 봐야 하지.”

마르바스가 입을 열자 루미에르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나오는 이야기가 진실이 맞는지 파헤치는 눈빛.

“네 몸 안에 있는 힘을 다 쓰지 않는 이상 문제는 없을 거다.”

마르바스는 루미에르가 질문을 던지기 전 설명을 이었다.

“네 몸 안의 힘을 다 쓴다는 건, 죽기 직전까지 힘을 끌어다 쓴다는 거야.”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건 알지 않냐는 시선에도 루미에르의 얼굴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래도 정 걱정된다면, 종종 인간계로 나가서 힘을 쓰고 마나를 받아들이면 될 일이고.”

대안까지 제시해 주자 루미에르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들어찼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자기가 질문을 해 놓고, 성심성의껏 답해 줬더니 돌아오는 게 이런 거라니.

“글쎄. 예언을 봐서?”

루미에르가 황당한 시선을 보냈다.

“하.”

비웃음에도 마르바스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굳이 적을 늘릴 필요는 없지. 나는 지금도 바쁘거든.”

어떻게 해도 그에게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은 루미에르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상관없습니다. 그걸로 내가 제냐의 옆에 있을 수 있다면요.”

정말 끝까지 짜증 나는 놈이었다. 마르바스가 굳을 것 같은 표정을 애써 폈다.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자기 볼일은 다 끝났다며 빠르게 방을 나서는 용사의 뒷모습을 보던 마르바스는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서류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있던 이는 마르바스가 혼자서 감정 정리를 할 시간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끝까지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군요.”

마르바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엘리고스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뭐가 문제냐는 듯 답했다.

“그래도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건 사실이잖아?”

그 말에 엘리고스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죠. 하지만 마왕이 되면 영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셨지 않습니까?”

이번에야말로 마르바스는 비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모든 걸 다 말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인데.

“저게 마족이 된다고 해서,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마왕이 되기 위해서는 전대 마왕을 이겨야 하니까.

‘내세의 저 녀석에게 기회는 없어.’

마르바스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엘리고스에게 되물었다.

“그렇지 않나?”

탁. 모노클을 벗은 엘리고스가 맨눈으로 마르바스의 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죠. 누가 가르쳤는데, 폐하께서 지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거짓말을 하는 이는 아니니, 이게 진실은 맞았다.

누군가는 어차피 이길 싸움이라면, 모든 걸 알려 준 뒤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선택지에 포함됐던 루미에르와 마족이기 때문에 선택지에 들지도 못한 마르바스.

그러니 내세에도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오히려 더 정정당당한 게 아닐까?

물론 꼭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고.

“과거의 연을 잡고 늘어지는 건 귀찮아.”

과거를 붙잡고 매달리는 건 마르바스 하나로 족했다.

“경쟁자는 사전에 치워 놔야지.”

마르바스가 그랬듯 지금의 기억을 안고 환생한 그녀 앞에서 알짱거리는 용사라니. 딱 질색이었다.

마르바스가 그녀를 내줄 수 있는 건, 딱 이 순간.

그가 벌을 받는 지금뿐이었다.

“아주 잠시, 인내하고 나면 그 뒤는 결과가 다를 테니.”

엘리고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 어쩌면 이게 제일 마족다운 건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될 줄 알았지만, 엘리고스는 엘리고스였다.

“하지만 언제나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이번 일을 통해 배우시지 않으셨습니까?”

기분 좋은 꼴을 못 본다니까.

하지만 엘리고스의 말도 일리는 있다. 또 언제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래도 이런 생각이라도 해야 살 것 같으니. 별수 있나.

마르바스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펜을 들었다.

“…그렇지.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그러니까 그가 희망을 잃기 전, 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으면 했다.

아주 빨리.

* * *

제냐는 비프가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다시 나타난 루미에르에 미간을 좁혔다.

“어디 다녀왔어요?”

한참 비프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 순간 루미에르가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비프가 너무 그를 견제하고 행동 하나하나를 지적해 대니, 미안하기도 했었고.

“그냥, 주변을 좀 둘러봤어요.”

자기가 여기서 둘러볼 곳이 어디 있다고? 제냐가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사고 친 거 아니죠?”

그러자 루미에르가 억울하다는 듯 눈매를 축 늘어뜨렸다.

“날 못 믿어요, 제냐?”

부러 순한 표정을 짓고 약한 척을 하는 그 얼굴을 보며 제냐는 느리게 답했다.

“…어떤 의미에서는요?”

자기 얼굴을 너무나 잘 활용하는 그를 보고 있자면, 이 모든 게 다 그녀의 탓이 아닐까 싶어졌다.

‘너무 얼굴을 좋아하는 티를 냈지?’

저 얼굴에 잘 넘어가 주니까, 자기가 불리하면 맨날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저게 만들어진 표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 얼굴에 넘어가는 그녀였지만.

제냐가 결국 참지 못하고 푸스스, 웃어 버리자 루미에르의 얼굴에도 짙은 미소가 생겼다.

“너무해요. 상처받았으니까 안아 주세요.”

슬쩍 주변을 돌아보는데 손을 벌리기도 전에 루미에르가 냉큼 그녀에 안겨 왔다. 제냐가 그런 루미에르를 피하지 않고 마주 안았다.

“비프가 오기 전까지만이에요.”

“너무해요.”

어리광을 피우듯 작게 앓는 소리를 낸 루미에르가 작게 속삭였다.

“제냐는 제가 예쁘고, 잘 웃고, 옆에 딱 붙어 있어서 좋죠?”

딱 비프가 지적했던 부분만을 언급하는 게 참 루미에르다웠다. 뭐, 그래도 미안했던 건 사실이니까.

제냐가 그녀를 꽉 끌어안는 루미에르를 슬쩍 밀어내고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다시 확인한 뒤, 힘들었다고 웅얼거리는 예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고마워요.”

비프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서 그를 비난했는데도 계속해서 웃는 얼굴로 그 모든 말을 받아 준 게 참 고마웠다.

제냐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다시 한번 쪽, 입을 맞추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루미에르가 화르륵, 얼굴을 붉히더니 훌쩍 뒤로 물러났다.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요!”

자기가 했던 짓은 다 까먹는 건가? 어이가 없었지만 잔뜩 당황하고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꼭 내가 먼저 다가가면 저렇게 어리숙하게 군단 말이야.’

흘러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않은 제냐가 졸졸, 그를 따라가 손을 붙잡자 루미에르가 그녀를 피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받아 주지도 못하고 그녀의 손짓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 웃긴 모습에 제냐가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깔깔, 맑게 퍼져 나가는 웃음소리에 주방에 모여 있던 사용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보기 좋네.”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즐거운 연인의 모습을 눈에 담은 사용인들도 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지. 본격적으로 놀아 보자!”

물론, 그건 내내 루미에르를 보며 툴툴거리던 비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안 그래도 시끌벅적하던 주방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사용인들이 우르르 제냐와 그녀의 연인을 감쌌다. 맛있는 음식과 활기찬 웃음, 즐거운 음악.

참가한 이들 모두가 즐거운 축제였다.

『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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