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제냐의 질문 이후, 집무실에 감돌던 묘한 정적을 깬 건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마왕이었다.
“작위적이기 짝이 없지만, 아예 장난으로 넘기기도 힘들지. 어떻게든 끼워 맞추면 맞아떨어지니까.”
그가 눈을 돌려 제냐를 쳐다봤다. 제냐는 건조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을 보며 식은땀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마왕이 나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게 중요하나?”
뭐? 진지하던 분위기도 잠시, 마왕이 무신경하게 말했다.
“이게 진짜면 어쩔 거고, 가짜면 어쩔 건데?”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벙찐 제냐가 멍하니 마왕을 쳐다보는데, 한쪽 입꼬리를 비튼 마왕이 서류 봉투를 툭, 테이블 위로 던졌다.
“이 예언으로 인간계라도 정복하려고?”
“그게 무슨…….”
제냐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엘리고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처럼 정세가 복잡한 인간계에서는 이걸 보여 주면 바로 신전을 장악할 수 있을 테지.”
엘리고스가 제냐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더했다.
“네 신분까지 밝히면 제국도 삼킬 수 있을 테니, 다 네 손에 쥘 수 있다는 거야.”
제국, 신전까지. 아주 손쉽게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순진한 어린애를 유혹하듯 작게 속닥거리는 엘리고스에 제냐가 발끈해 외쳤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엘리고스가 은근하던 표정을 지워 내고 마왕을 쳐다봤다. 그러자 마왕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마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제냐를 응시했다.
“이게 진짜든 가짜든 뭐가 중요하지?”
뭐가 중요하냐니. 당연히 많은 게 중요……. 제냐가 생각을 마무리하기 전, 마왕이 말을 더했다.
“진짜라고 해도, 가짜라고 해도 여기에 휩쓸릴 일이 없지 않나?”
마왕이 손에 턱을 괴고는 물었다.
“세상이 말하던 용사가, 네가 그리도 원하던 용사가 실은 너였다는 게 그리 중요해?”
그는 제냐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이제 더 이상 구원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을 텐데.”
제냐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마왕을 쳐다보는데,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애당초 네가 그런 쪽에 관심 없는 걸 아니까 그 마법사가 네게 이걸 줬겠지. 정확히는 네 사촌이.”
아. 그렇구나.
‘그래, 그게 맞아.’
다른 이들은 전부 다 알고 있었는데, 혼자서 갑자기 들이밀어진 진실에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정말 나한테 쓸모없는 사실이었네.’
더 이상 제냐는 누군가에게 구원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행복 이상 다른 걸 바라지도 않았고.
제냐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자 마왕이 귀찮기 짝이 없는 얼굴로 말했다.
“뭐, 너 대신 용사로 구른 저 녀석에게는 조금 미안할 수 있겠지만, 그건 네가 저지른 짓도 아니고.”
마왕이 짜증스레 루미에르를 쳐다보며 말을 더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미안하면 너희끼리 알아서 해결해라.”
그래, 루미에르에 대한 죄책감이 아예 없었다고는 하지 않겠다. 그 모든 게 성녀가 저지른 짓이라고 해도, 왠지 모를 미안함이 제냐를 덮쳤으니까.
하지만 그런 점을 마왕이 이렇게 바로 알아차릴지는 몰랐다.
슬쩍 루미에르를 쳐다보자 그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니 오히려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낯으로 제냐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종이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을 거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나는 정말 혼자서 뭘 한 걸까.
루미에르가 미소를 지어 줌과 동시에 긴 한숨을 쉰 제냐가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정말 폐하께는 뭐든 너무 쉽네요.”
옅은 웃음을 띤 채, 마왕을 쳐다보자 그가 제냐를 가만히 쳐다봤다.
시선을 마주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왠지 모를 민망함에 눈을 돌리려던 제냐는 붉은 눈이 잘게 흔들리는 걸 발견했다.
그러나 홱, 다시 고개를 돌려 쳐다본 마왕의 눈빛은 여전히 강건했다.
‘잘못 봤나?’
흔적을 찾듯 마왕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엘리고스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끼어들었다.
“그게 아니라는 건 너도 알 텐데? 봐라, 지금도 폐하께서는 업무에 찌들어 살고 계시지.”
그 말에 제냐의 시선이 마왕의 책상에 가득 쌓이다 못해 바닥까지 쌓인 서류로 향했다.
누가 봐도 일에 파묻혀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꼴이었다. 그걸 깨닫자 자연스레 웃음이 샜다.
“그렇죠.”
원래 함께 파묻혀 있던 일을, 마왕 혼자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아졌다. 한번 새어 나온 웃음이 멈추지 않아 억지로 웃음을 지워 낸 제냐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 덕에 제가 황제나 권력자라는 위치에 관심이 없는 거고요.”
웬만한 폭군이나, 무능력자가 아니고서야 높은 분이 되면 할 일이 많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한결 편해진 얼굴로 마왕과 엘리고스를 쳐다봤다.
바로는 아니어도, 적어도 몇 달 뒤에는 다시 볼 이들.
억지로 붙잡고 있던 증오와 분노를 떨쳐 내고 바라본 두 마족은 예전과 달리 편안했다.
이대로 차나 더 마시고 갈까, 싶은데. 마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 끝났으면 가 봐.”
매정하게 느껴지는 축객령에 제냐가 어이없음을 드러냈다.
“차도 다 못 마셨는데요?”
그러나 마왕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거 다 마실 거면 이거 정리하는 것도 도와주든가.”
차를 마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저 많은 일을 같이 하자니? 그건 너무 양심이 없는 것 아닌가?
제냐가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심이세요? 누가 봐도 한쪽이 손해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가라고.”
“오랜만에 보는 건데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너한테나 오랜만이겠지. 나한테는 그냥 눈 한 번 감았다 뜬 시간이야.”
“네, 늙으셔서 좋겠어요.”
빽, 신경질을 내놓고 제냐가 은근슬쩍 엘리고스를 돌아봤다.
마왕과는 원래 이런 식으로 모난 말을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엘리고스와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엘리고스는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제냐는 마왕과 더 선이 넘는 대화를 나누기 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엘리고스 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물론 방을 나서기 전, 한 번 더 마왕을 건드리는 걸 잊지는 않았다.
“폐하도 앞으로도 몇 달 동안 혼자 고생하시고요. 눈 깜빡할 시간이시겠지만요!”
그러고는 마왕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냉큼 루미에르의 손을 잡고 집무실을 나섰다.
쾅. 닫히는 문을 뒤로하고 제냐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혹여나 문이 거세게 열리고 마왕이 속을 긁는 이야기를 할까, 반쯤 뛰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서둘러 발을 내딛던 제냐는 1층에 가까워지면서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일을 하나 끝냈으니 이제 남아 있는 일을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제냐가 멈칫거리며 자리에 멈춰 서자 이제껏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루미에르가 자연스레 손을 붙잡아 왔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묻는 것이다.
“긴장돼요?”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다. 제냐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요. 어려운 일은 다 끝났는데, 왜 더 떨리는 것 같을까요.”
그러자 루미에르가 제냐의 입가를 두드리며 답했다.
“그만큼 의미가 깊다는 소리겠죠? 이번 기회에 저도 제대로 인사시켜 주세요.”
루미에르를 올려다보자 그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리며 물었다.
“음, 어떻게 굴어야 예뻐 보일까요?”
참,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어느 각도에서 봐도 예쁘니까 괜찮아요.”
제냐의 답에 루미에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청량한 웃음에 제냐가 눈을 찌푸렸다.
“왜 웃어요?”
지금 한 말에 웃긴 부분이 어딘가 고심하는데, 루미에르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답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잘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어본 거였어요.”
아, 작게 감탄사를 내뱉자 루미에르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제냐는 나보다 더 내 얼굴에 자부심이 넘치는 것 같아요.”
틀린 말은 아닌지라 제냐가 슬쩍 눈을 굴렸다.
“그야, 잘생겼으니까요.”
“역시 제냐는 제 얼굴이 좋은 거죠?”
불쑥 다가오는 얼굴을 피하지 않고 양 뺨을 주물럭거린 제냐가 차분하게 답했다.
“저번에도 비슷한 대화 하지 않았어요? 솔직히 루미에르 얼굴을 싫어할 만한 사람은 없어요.”
이럴 때는 민망해하면 놀림이 길어진다는 걸 알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말랑한 뺨을 쓸어 주는데 루미에르가 기다렸다는 듯 그 손에 뺨을 비비며 물었다.
“그럼 비프라는 마족에게도 이 얼굴이 잘 통할까요?”
바로 코앞에 있는 잘생긴 얼굴을 가만히 살피며 제냐가 그녀가 아는 비프를 떠올렸다.
“으음.”
“아니에요?”
장난기 가득한 그 얼굴을 보면서 제냐가 가볍게 답했다.
“얼굴값 할까 봐 걱정하실 것 같은데.”
그러자 루미에르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럼 얼굴에 검댕이라도 묻히고 갈까요?”
제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못생기면 그건 그것대로 싫어하실 거예요.”
루미에르의 미소에 살짝 금이 갔다.
“…웃는 건 어때요?”
“너무 웃으면 실없다고 싫어할 것 같은데.”
“그럼 무표정으로?”
“무뚝뚝하다고 싫어하실 것……. 딱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처음의 장난 같은 분위기는 어디 가고 진지하게 답을 하던 제냐가 결론을 내리자 루미에르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네, 잘 알겠네요. 걱정하지 마요. 어떻게든 해 볼게요.”
그게 뭐람.
그래도 덕분에 조금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제냐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주방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문이 닫혀 있음에도 주방 안은 시끌벅적했는데, 아마 그녀의 도착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냐는 입가를 매만져 잘 웃고 있는 걸 확인하고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그러자 루미에르가 예쁘다고 작게 입을 달싹여 주고는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줬다.
드르륵, 열리는 문소리에 주방 안에 있던 마족들의 시선이 제냐에게 모였다. 제냐는 그 시선을 받으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그 시선 사이에 그녀가 찾던 이가 있었다. 제냐는 그녀를 돌아보는 근육질의 마족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괜한 걱정이네.’
그를 보는 순간, 이렇게 자연스럽게 미소가 나오는데.
“비프, 다녀왔어요.”
“제냐.”
제냐가 활짝 웃으며 비프에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