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오랜만에 돌아온 마계는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특별히 미화를 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
그립고 그립던 인간계와 달리 마계에 대해서는 적나라할 만큼 솔직하게 평가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부정적으로 여긴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제냐는 딱히 그걸 미안해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면 성에 발을 딛기가 무섭게 마주한 모습이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와하하하! 어떠냐? 내가 새로 개발한 기술이!”
“그걸 지금 기술이라고 자랑하는 거야? 하나도 안 통했거든?”
“그럼 이것도 막아 보시지?!”
“이긴 편이 내 편!”
업무 시간임에도 어디서 숨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1층 중앙 홀에서 대놓고 싸움판을 벌이다니. 그걸 말리지 못할망정 재밌다고 구경하는 사용인들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냐는 콰아아-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날아오는 마법을 손쉽게 막아 내고 빤히 마족들을 쳐다보는 루미에르의 팔을 두드렸다.
“됐어요, 늘 있는 일인걸요.”
“매일 이렇게 위험했다는 건가요?”
“보통은 이렇게 시끄러운 곳을 내 발로 들어오진 않죠.”
시끄러운 곳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는 법이었으니 제냐가 제일 피해야 할 곳이었다.
“지금은 루미에르가 옆에 있으니까 굳이 자리를 피하지 않은 거고요.”
도대체 지금 이 말 어디에 부끄러워할 곳이 있는 걸까? 루미에르가 눈가를 붉게 붉히고는 제냐의 옆에 딱 붙어 섰다.
“꼭 지켜 줄게요.”
으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인이 기분이 좋으면 됐다. 제냐는 영문을 모르고 루미에르를 쳐다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루미에르의 분위기에 겁을 먹던 사용인들이 그제야 제냐가 나타난 걸 알아차리고는 손을 마구 흔들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를 받아 주자 그들이 루미에르를 눈짓하더니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제냐의 귀환과 그 옆에 있던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퍼트리려고 하는 게 뻔했다.
제냐가 쯧쯧 혀를 차는데, 루미에르가 물었다.
“비프를 만나러 갈 건가요?”
“아니요, 그 전에 이거 먼저 처리하죠.”
제냐가 챙겨 온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비프는 이 일을 끝내고 편하게 만나고 싶었다.
‘이걸 들고 비프를 만날 수 있을 리가.’
제냐가 얼굴에 웃음을 지워 내고 서류를 내려다봤다. 그 표정을 확인한 루미에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왔다.
제냐는 그새 소식을 전해 듣고 마구 달려왔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며 자기들끼리 수군덕거리는 사용인들을 모른 척했다.
굳이 인사를 건네지 않는 사용인들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평소 주변에 관심이 없었던 루미에르는 이번만큼은 그들의 존재를 외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다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마족들을 경계하는 버릇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
“저랑 제냐가 잘 어울린대요.”
음, 아니었구나.
제냐가 막 떠오른 생각을 깨끗하게 지워 내며 어이가 없어,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신이 나서 줄줄 그들의 이야기를 옮겨오기 바빴다.
“도대체 누가 제냐를 차지하나 늘 궁금했는데, 저 정도는 돼야 제냐 마음에 드는 거라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요.”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제냐 보고 눈이 높다는 것들도 있고, 반대로 제냐 정도는 되니까 저 같은 애인을 만드는 거라고 말하는 것들도 있어요.”
뭐, 조금 민망하긴 해도, 딱히 기분 나쁜 이야기는 없었기에 제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도 같았고.
‘그러라고 이야기를 전해 주는 거겠지.’
루미에르는 그 뒤로도 제냐의 뒤에 딱 붙어서 사용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전했다.
“제냐가 없어서 요새 집사 엘리고스의 기분이 좋지 않데요.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고.”
뭐, 그다운 이야기였다.
“본래도 일을 잘한다고는 생각했는데, 요새 더 절실하게 제냐가 그리웠다네요.”
루미에르가 자기가 칭찬을 받은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다들 제냐가 완전히 돌아온 거길 바라고 있어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네요. 다시 나갈 테니까.”
귀엽다는 듯 루미에르를 쳐다보던 제냐가 마지막 계단을 오르며 그의 손을 두드렸다.
“도착했어요.”
“네, 그러네요.”
마계에 돌아가야겠다는 말에 대놓고 불편함을 드러냈던 루미에르를 떠올린 제냐가 물었다.
“불편하면 밖에서 기다릴래요?”
“아니요, 같이 들어가야죠.”
절대 안 된다는 단호한 표정에 제냐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싸우면 더 길어지는 거 알죠?”
“네. 열심히 참아 볼게요. 요즘 기분이 좋으니까 가능할 거예요.”
배시시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오는 루미에르의 손을 털어 내지 않는 제냐가 바로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제냐예요.”
그러자 답도 없이 조용히 문이 열렸다.
스윽,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온 제냐는 그 안에 있는 마왕과 엘리고스를 발견했다. 오랜만에 왔음에도 전혀 변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마왕은 그렇다 치지만 엘리고스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안녕하셨어요. 폐하, 엘리고스 님.”
“그래, 오랜만이군.”
모노클을 쓴 엘리고스가 제냐의 인사에 답을 해 주고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마왕이 보던 서류를 마무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왔군. 앉아.”
제냐는 마왕이 가리키는 대로 집무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이 집무실에서 그렇게 오래 일했지만, 손님으로 온 건 처음이었다.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소파를 눌러 보는데, 마왕이 아주 피로한 얼굴로 상석에 자리했다.
엘리고스가 자연스레 마법으로 차를 내오며 제냐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잠시 들른 거라고?”
“네.”
“굳이 이렇게 중간에 찾아온 건 이유가 있을 테고.”
마왕의 시선이 제냐가 들고 있던 봉투로 향했다.
“네, 여기요.”
마왕이 제냐가 건네는 서류 봉투를 받아 들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무슨 서류냐는 표정에 제냐는 설명을 더 했다.
“성녀의 처벌에 관한 서류예요. 제레미야가 아주 꼼꼼하게 적어 놨더라고요. 나중에 한 번 들러서 꼴을 지켜보는 것도 좋겠어요.”
제냐의 설명에 사뭇 날카로워지던 마왕이 작은 한숨과 함께 서류를 옆으로 밀어 뒀다. 곧장 내용을 확인할 줄 알았는데.
살짝 놀라 마왕을 쳐다보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받아 내며 물었다.
“찾아온 이유는 이게 끝?”
남은 봉투를 바라보는 마왕에 찝찝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나 더 있는데요.”
제냐가 집무실을 쭉 둘러보다가 발견한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천계의 보석과 관련된 이야기죠.”
“보석?”
마왕의 시선이 제냐를 따라 상자로 향했다. 꽉 닫혀 있어서 보석의 존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검은 상자.
제냐가 옆에 앉아 있던 루미에르와 시선을 맞추고는 들고 있던 봉투를 마왕에게 건넸다.
“그때 신전에서 저희와 잠시 함께한 마법사 기억하세요?”
“그게 왜?”
“그자가 마탑에서 전해지던 문서 하나를 건네줬는데, 성녀가 만든 예언이 여기서 시작된 게 아닐까 싶어서요.”
눈을 찌푸린 마왕이 제냐가 건넨 봉투 속 서류를 꺼냈다.
마왕은 지체하지 않고 문서의 가장 처음에 적힌 문장을 읽어 내렸다.
“짙은 어둠을 흩트릴 여명이 떠오를 것이다.”
제냐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인간 세상에서도 아주 잘 알려진 구절이었다. 성녀가 세상에 알린 예언.
“그 부분은 원래 있던 알려진 예언이에요. 그 뒤에 자잘한 내용이 붙어서 용사라는 존재를 만들었었죠. 그런데 그 문장 뒤에 숨겨진 문장이 하나 더 있더라고요.”
과대망상인지 뭔지, 보자마자 뭘 뜻하는지 알아차릴 정도로 노골적이던 문장.
“…지하에 잠긴 하늘이 떠올라 눈을 뜰 때, 가장 밝은 아침이 찾아올 것이다.”
문장을 읽어 내린 마왕이 눈만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제냐가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 내며 말했다.
“문서에는 천계의 보석을 발견하기 일주일 전에 이 예언이 내려왔다고 적혀 있어요.”
그러니까 그녀의 예상이 맞는다면, 저 문장은 제냐 자신과 천계의 보석이 연관된 문장이었다.
따라서 첫 번째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을 합치면…….
제냐가 얼굴을 굳힌 채 마왕에게 물었다.
“무슨 뜻 같으세요?”
다시 문서를 살피던 마왕이 흥미 없는 얼굴로 서류를 엘리고스에게 넘겼다. 그러고는 심드렁하게 말하는 것이다.
“작위적이기 짝이 없군.”
생각과는 다른 반응에 미간을 좁히는데, 마왕에게 받은 문서를 빠르게 살핀 엘리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예언이라고 여겨지던 모든 것들은 대부분 천족이 만드는 거니까요.”
그 말에 제냐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언을 천족이 만든다고요?”
엘리고스가 제냐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마족이 인간보다 강하지만 신은 아닌 것처럼 천족도 인간보다 강하지만 신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지?”
마족이 그렇듯 천족도 보편적인 인간들의 상식과 달리 평범한 것들이라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럼 예언은 모두 천족의 장난인가요?”
그렇다면 이걸 보자마자 심각해졌던 그녀는 뭐가 된단 말인가? 제냐의 얼굴이 험악해지는데 엘리고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
그러고는 오히려 제냐에게 묻는 것이다.
“마족들이 마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과 달리 천족은 자기들의 신에게 관심이 많은 건 아나?”
그건 마왕에게 들었던 부분이었다.
“네, 그건 들었어요.”
엘리고스가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다며 말을 더했다.
“그래, 그런 특성은 신들도 마찬가지야. 마신은 마족들에게 관심이 없고, 천신은 그래도 아주 조금이나마 천족에게 관심이 있지.”
엘리고스가 들고 있던 문서를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천족 중에서도 자기들을 신성하게 여기는 인간을 신경 쓰는 존재가 있고.”
그러고는 다시 문서를 봉투 안에 넣어 갈무리했다.
“그러니까 아주 드물게, 신이 내린 예언이 진짜로 인간계에 내려가기도 한다는 거야.”
제냐가 그 봉투를 눈짓하며 물었다.
“…그럼 이건 뭔가요?”
제냐가 가져온 건 천족의 장난인가, 아니면 신이 내린 진짜 예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