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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31)화 (131/145)

130화

시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제레미야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급하게도 들어온다.’

속으로 불만을 삼키며 제레미야를 쳐다보는데, 진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제레미야가 자연스레 인사를 받으며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바로 본론을 꺼내는 것이다.

“얼핏 들어 보니까, 내 제안이 싫다는 것 같은데?”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제냐가 숨도 쉬지 않고 답했다.

“당연하지.”

그런 제냐의 반응을 덤덤하게 넘긴 제레미야가 옆을 바라봤다.

“똑같은 생각이신가요?”

루미에르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섞지 않겠다는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제냐가 다시 한번 루미에르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루미에르가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나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도 제레미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진과 달리 딱히 그들을 설득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제냐가 눈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물어봤어?”

그러자 제레미야가 성격 나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나 혼자 기분 나쁘긴 싫으니까?”

그러니까 쉬운 길이지만 안 될 거 알아서 자기가 짜증 나니까, 잠깐이나마 나도 짜증 나라고? 역시 성격이…….

제냐가 눈으로 욕을 하며 보란 듯 진을 쳐다보는데, 그는 여전히 제레미야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인가?’

제냐가 진을 보며 황당한 웃음을 흘리는데, 제레미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문제는 그쯤에서 넘어가고. 다른 이야기를 해 볼까?”

다른 이야기?

“할 이야기가 더 남아 있어?”

제냐가 의아함을 드러내자 제레미야가 눈매를 찌푸렸다.

“그럼, 네 기분 상하게 하자고 이렇게 간신히 시간 냈을 것 같아?”

정말 짜증 난다. 성격 같아서는 같이 신경질을 부리고 싶은데, 괜히 루미에르의 눈치가 보였다.

‘유치한 모습을 보여 준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좀 그랬다.

제냐가 분노를 꾹꾹 눌러 담으며 그녀를 쳐다보자 제레미야가 곧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성녀와 관련된 이야기야. 처벌이 정해졌거든.”

제냐는 그녀에게 건네진 서류 봉투를 받아 들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이렇게 두툼해?”

“앞으로 머물게 될 곳, 받게 될 처벌, 지금의 처지 등등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걸 마왕에게 전달해 달라는 건가?

제냐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제레미야가 살짝 고개를 주억였다.

‘마계에 다녀와야 하나?’

제레미야의 즉위식 전까지 좀 더 놀다 갈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마계에 보고 싶은 이가 없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갔다가 다시 오자.’

최대한 가볍게 상황을 받아들인 제냐가 대충 서류 봉투를 챙겨 들고 물었다.

“이제 할 이야기 다 끝났지?”

“그래.”

그렇다면 여기 더 있을 필요는 없었다. 괜히 기분만 나쁘고.

“결혼 문제는 알아서 잘 끝내고, 즉위도 축하해.”

끄덕, 고개만 끄덕이는 제레미야가 놀랍지도 않았다.

‘잘 지내는 것 같으니까 됐지 뭐.’

곰살맞게 서로 안부를 물을 사이도 아니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제냐가 별다른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미에르가 냉큼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방을 나서려던 제냐의 귀에 루미에르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정중하게 부탁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염치가 없어도 정도라는 게 있는데.”

이 차갑다 못해, 빈정거림이 가득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정말 루미에르라고?

놀라서 뒤를 돌아본 제냐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 제레미야를 쳐다보는 루미에르를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반짝반짝 웃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경고가 그득했다.

그리고 그런 루미에르의 말에 제레미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었고. 불거진 턱과 꽉 쥔 주먹,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충고 감사합니다.”

살짝 삐끗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이 뻥 뚫렸다.

‘그래, 참긴 뭘 참아? 저렇게 대놓고 면박을 줬어야 했는데.’

제냐가 분노를 참는 제레미야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럼 가 볼게.”

인사를 건넨 제냐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루미에르의 손을 잡아당기며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고 제냐는 길을 안내해 주겠다는 사용인들을 대충 손을 저어 밀어낸 뒤 루미에르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루미에르가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유치했어요?”

아까 그녀가 했던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제냐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주 잘했어요.”

제냐가 보란 듯 손을 내려 루미에르의 엉덩이를 두드리자 그가 파드득 몸을 떨며 그녀를 피해 훌쩍 멀어졌다.

“제, 제냐!”

얼굴을 잔뜩 붉히고는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제냐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렇게 놀라요?”

“어, 어떻게…….”

솔직히 제냐도 엉덩이를 치고 좀 놀라긴 했는데, 상대가 너무 놀라니까 오히려 장난기가 솟았다. 제냐가 웃음기 만연한 얼굴로 그에게 슬쩍 한 발 다가갔다.

그러자 루미에르가 크게 놀라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자기는 허리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면서, 뭘 저렇게 놀라는 걸까?

재냐가 푸하, 웃음을 터트리는데,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사이에 그녀의 앞에 시커먼 벽이 생겼다.

“어?”

놀란 제냐가 비틀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서려는데, 자연스레 허리가 손에 감기고, 귓가에 루미에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해요.”

그리고 이어지는 차가운 말투.

“무슨 짓이지?”

그러니까 갑자기 생긴 시커먼 벽은 루미에르의 몸이었고, 제냐는 덕분에 넘어질 뻔했으며 그걸 루미에르가 붙잡아 줬다고.

그리고 루미에르가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달려든 건…….

제냐는 고개를 돌려 루미에르의 손에 들린 두툼한 봉투를 확인했다.

‘응? 내건 여전히 들고 있는데.’

제냐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녀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서류 봉투를 봤다가 완전히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잔뜩 부루퉁한 얼굴로 서 있는 진을 발견했다.

루미에르의 화가 난 말투에도 표정을 풀지 않은 진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마탑에 있던 예언과 관련된 내용이야. 너랑 연관 있는 것 같다고 했던 거.”

자기가 멍청이라며 혀를 찬 진이 대놓고 큰 한숨을 쉬었다.

“저게 뭐가 예쁘다고. 내가 저걸 받아 내려고 그냥…….”

잔뜩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것처럼 굴던 진은 루미에르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해지자 입을 다물었다.

“이제 가 버려!”

그러고는 도망치듯 빠르게 자리에서 사라졌다. 가 버리라고 말해 놓고 자기가 먼저 사라지다니, 참 여전했다.

제냐가 진이 사라진 자리를 지켜보고 있는 루미에르를 붙들었다.

“됐어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막 대해서 심통 났나 보죠.”

“좋아하는 사람요?”

어리둥절한 얼굴에 제냐가 더 어리둥절해졌다. 그녀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제레미야에게 관심 있는 것 같잖아요. 이뤄지진 못하겠지만.”

제레미야라면 분명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면서 자기에게 이득이 갈 만한 인간을 남편 자리에 앉히려고 들 것이다.

‘걔도 눈치채고 있는 것 같던데 뭘.’

계속 자기만 쳐다보던 마법사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던 제레미야를 떠올린 제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뭐, 결국 저 호감은 짝사랑으로 끝이 날 테고.

“…그래요?”

정말 몰랐다는 듯한 반응에 제냐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남한테 관심이 없네요.”

그러자 껴안듯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루미에르가 기대듯 서 있는 제냐의 허리를 붙잡아 똑바로 세워 준 뒤, 매너를 지키듯 뒤로 한 발 물러나며 손을 내밀었다.

“제 관심은 모두 한 사람한테 가 있으니까요.”

붙잡으라는 듯 건네진 손을 붙잡으면서 제냐가 대놓고 몸을 떨었다.

“으.”

그러자 루미에르가 장난기 섞인 얼굴로 웃으며 다시 길을 안내했다.

그 자연스러운 에스코트에 제냐가 슬쩍 루미에르를 훔쳐봤다.

‘까먹었나?’

진 때문에 놀란 건지 뭔지, 조금 전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없던 것처럼 구는 루미에르가 신기했다.

몰래 루미에르를 쳐다보던 제냐는 터질 것 같은 그의 귀를 발견하고는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참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연인의 노력을 모른 척하지 않기로 한 제냐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면 봐야 할 게 많네요.”

보란 듯 서로의 손에 들린 봉투를 가리키자, 루미에르가 냉큼 제냐의 손에 들린 봉투를 챙겼다. 아무렇지 않게 봉투를 넘겨준 제냐가 가까워지는 정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때 레라지에가 산 저택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마법으로 이동하거나 레라지에가 모는 마차를 타고 이동해서, 정확한 위치는 기억하지 못했다.

‘못 찾으면 그냥 적당한 호텔을 찾아야 하나.’

그러나 제냐의 고민은 루미에르의 말에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네, 기억해요. 거리가 좀 있는데…….”

잠시 주변을 돌아보던 루미에르가 제냐에게 물었다.

“말을 빌릴까요?”

말. 제냐가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말 하면 마수밖에 생각이 안 나서 영.”

그레모리 공작과 함께 신전에서 말을 타고 광소를 짓던 마족들을 떠올리며 질색하자 루미에르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걸어가도 괜찮고요.”

황궁에서 나온 사람들이 걸어서 이동한다고? 그게 얼마나 눈에 띄는지 모르나?

“그것도 싫어요.”

“그럼 업어 줄까요?”

제냐가 허, 하며 어이없다는 듯 루미에르를 돌아봤다.

“그냥 평범하게 마차를 빌려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녀의 지적에 루미에르가 짓궂게 웃었다.

‘봐 봐, 자기도 이렇게 나를 놀려 먹으면서.’

투덜거리듯 루미에르의 팔뚝을 툭, 어깨로 친 제냐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그가 소리를 내며 따라 웃었다.

그들은 그렇게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뭐, 좀 기분 나쁜 일이 있긴 했지만, 무조건적인 내 편이 있어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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