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응접실에 도착한 제냐는 황궁으로 오는 길, 궁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그때랑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죠?”
궁 앞을 지키던 기사, 궁을 돌아다니던 사용인, 귀족들까지. 전체적으로 느낌이 달랐다.
“그렇던가요?”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인데.”
그렇다고 막 나간다는 건 아닌데, 전체적으로 좀 유해졌달까? 제냐가 동의를 구하듯 루미에르를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윗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아랫사람은 많이 변하니까요.”
딱히 관심은 없지만 그녀가 말하니 받아 준다는 느낌이었다. 제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맞은편에 있는 진에게 물었다.
“네가 볼 때는 어때?”
진이 누가 봐도 입이 간질간질한 얼굴로 제냐를 쳐다봤다.
“뭐, 뭐가?”
바로 자랑을 하는 건 좀 그런 건지, 얼른 물어봐 달라는 얼굴로 애써 입을 다무는 그 얼굴이 웃겼다.
몇 번만 더, 아니 한 번만 더 물으면 그냥 알아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을 게 뻔했다.
저렇게 표정이 다 드러나는데 제레미야가 왜 저 인간을 옆에 두나 싶다가도, 오히려 그렇기에 옆에 두기 편한 인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냐가 뻔히 보이는 속내에 맞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네가 봤을 때는 어때? 황궁 말이야.”
“흠흠! 그렇게 궁금해하니까 알려 주지!”
제냐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는 진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그 이야기를 정리했다.
군데군데 자기 자랑이 섞여 있는 길고 긴 이야기였지만 결국에는 통제광인 황제와 기분파인 황후가 사라지고 체계적이고 규칙을 중시하는 효율적인 황녀가 권력을 잡으면서 다들 살기 편해졌다는 소리 아닌가?
“내가 머무는 방이 얼마나 좋냐면…….”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낸 제냐가 잔뜩 흥분한 진의 말을 끊어 내며 물었다.
“그래서, 귀족들 분위기는 어때?”
그러자 화악, 달아오르던 진의 분위기가 바로 가라앉았다.
“아, 귀족들?”
급변하는 태도에 제냐가 눈을 찌푸리는데 진이 피곤한 얼굴을 하고는 중얼거렸다.
“정말, 그놈의 명분, 명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진이 질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신전이나 마탑은 다른 곳보다 신분의 영향을 덜 받는 편이라 몰랐는데, 정말 귀족들은 꽉 막혔더라.”
“뭔 소리야?”
진이 발끈해 외쳤다.
“황제가 되려면 결혼을 하래!”
“…뭐?”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에 제냐가 당황한 얼굴을 하자, 진이 말을 쏟아 냈다.
“황녀 전하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셔. 여기서 세력을 나눌 사람을 더 만들고 싶지 않으신 눈치거든.”
그것참 제레미야다운 답이었다.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진이 말을 이었다.
“적어도 황제로서 입지를 단단히 다지고 나서, 욕심 없는 놈으로다가 짝을 고르려고 하시는데, 어찌 미혼의 황녀가 황제가 되냐, 어쩌고저쩌고.”
귀족들에 대한 욕을 구시렁거리는 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제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즉위식 날짜는 정해진 거 아니야?”
즉위식 날짜는 이미 잡혔고, 곧 황제가 될 건데 굳이 귀족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즉위식 뒤에 바쁘다고 하면서 조금 더 시간 끌면 되잖아.”
누가 봐도 핑계가 분명했지만 즉위 초반에는 원래 바쁜 게 당연했다.
“그러면 좋지! 그런데 그것들이 즉위식 때 새로운 약혼자를 같이 발표하자잖아.”
하긴 귀족들이 줄을 대려면 제레미야가 아직 완벽하게 자리를 잡기 전이 더 효율적이긴 했다.
윗선이 바뀌었다고 해서 귀족들의 생태가 바뀌는 건 아니니까.
제냐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진이 신경에 거슬리는 말을 뱉었다.
“전하께서는 자기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 말로 그 청을 거절하는 중이지만.”
제레미야의 약혼자라면…….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루미에르에게로 향했다. 제냐의 손을 가지고 하던 손장난을 하던 루미에르의 손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제냐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루미에르를 바라보고 있는데, 진이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사람처럼 운을 뗐다.
“사실 오늘 두 사람을 부른 것도 이것 때문인데.”
정말 이 분위기가 안 보이는 걸까? 아니면, 너희 분위기랑은 상관없이 이야기는 해야겠다는 고집인 걸까.
“아마 한동안 루미에르는 계속 전하의 약혼자로 남게 될 거야. 둘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널리 퍼질 테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제냐가 재빨리 진의 말을 잘라 냈다.
“장난해? 누구 맘대로?”
날카로운 제냐의 목소리에 루미에르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마찬가지로 흠칫 놀랐던 진이 변명처럼 말했다.
“아니, 그편이 귀족들 입을 다물게 하기도 좋고. 백성들의 지지를 사기도 좋잖아…….”
진이 제냐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려 애썼다.
“성녀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상태에서 용사까지 갑자기 사라지면서 말도 많아졌고.”
제냐의 눈꼬리가 계속해서 치솟자 진의 동공이 마구 떨렸다.
“그, 그러니까 이름, 형식으로나마 전하의 옆자리에 루미에르의 이름을 올려 두면, 정세 안정에 도움이 될 거라는 거지!”
진이 입을 다물기가 무섭게 제냐가 비꼬듯 물었다.
“내가 멍청이야? 그건 다 핑계잖아.”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제냐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정세 안정 좋아하시네. 내가 갤 몰라? 이건 그냥 나 엿 먹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그런 제냐의 말에 진이 펄쩍 뛰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막말이야? 우리 전하가 왜?”
우리 전하? 아주 충신 납셨네.
“왜긴 왜야? 걔는 원래 그랬어.”
제냐의 비난에 진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라니까? 신전을 이런 식으로 전하가 먹는 게 너도 좋잖아. 성녀도 처벌하기 쉽고. 지금도 신전에서는 성녀를 지하 감옥에 가둔 건 너무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성녀의 처벌과 관련해 아직도 말이 나오고 있다는 건 제냐도 알았다. 그래서 처벌이 제대로 정해지기 전까지 성녀가 신전에 있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 정도 반발도 예상 못 했던 거 아니잖아.”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태도에 진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게 제일 쉬운 방법이라니까?”
“알게 뭐람?”
배 째라는 입장을 고수하자 계속 저자세를 유지하던 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뱅뱅 돌아서 어렵게 가는 것보다 쉽게 가는 게 좋잖아? 효율적이고!”
그리고 그에 맞춰 제냐의 목소리도 한껏 높아졌다.
“참, 더럽게도 효율적이다! 덕분에 루미에르는 평생 역사나 기록 속에 첫 여황제의 첫사랑이자 세기의 사랑,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정도로 서술되겠지!”
최악이었다. 감히 누구 멋대로, 남의 연인을 그런 식으로 가져다 붙인단 말인가?
제냐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치자, 진이 발을 퍽퍽 굴렀다.
“이 욕심쟁이야! 실제로는 네가 가졌으니까 기록 정도는 좀 줘라!”
웃기는 소리!
“내가 왜? 다 내 거거든?”
제냐가 발끈해 외치는데, 곧장 그녀의 말을 받아칠 것 같았던 진이 입을 딱 다물고는 토할 것 같은 얼굴로 그녀의 옆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고개를 돌린 제냐는 배부른 맹수처럼 웃고 있는 루미에르를 발견했다.
평소처럼 예쁘게 웃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느른해 보이는 게……. 시선이 마주친 루미에르가 사르르 나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진짜!”
짜증스러운 진의 목소리와 함께 제냐가 홱 고개를 돌려 진을 바라봤다. 이대로 있다가는 분명 저 얼굴을 감상만 하느라 이야기가 흐지부지될 게 뻔했다.
‘절대 안 되지. 무슨 일이 있어도 확실하게 반대 의사를 표해야 해!’
그런 제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미에르가 목을 울려 기분 좋게 웃는 얼굴로 달라붙더니 어깨에 볼을 비벼왔다.
“그런 것 좀 하지 말라니까?”
질색하는 진을 보면서, 제냐가 어떻게든 다시 이야기를 본론으로 돌렸다.
“아무튼 안 돼. 싫어. 돌아가.”
절대 안 된다고, 다시 한번 강하게 말하는데, 딱 붙어 앉은 루미에르가 제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저도 싫어요.”
여전히 웃음기가 섞이긴 했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좀 도와주지 이 짜증 나는 것들!”
바쁜 건 그쪽 사정이고. 제냐가 슬금슬금 깍지를 껴 오는 루미에르의 손을 토닥거렸다.
‘잘했어!’
눈으로 말을 전하자 루미에르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볼을 문질렀다. 제냐가 진을 돌아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알아서 하라 그래, 정 뭣하면 네가 약혼자 하든가.”
“…뭐, 뭐?”
그 말에 진이 화들짝 놀라다가 테이블에 무릎을 부딪쳤다.
뭐지, 저 반응? 그냥 알아서 하라고 대충 던진 말에 돌아온 반응이 너무 컸다.
제냐가 눈을 가늘게 좁히고 그를 쳐다보자 확 얼굴을 붉힌 진이 꼭 무언가에 찔린 사람처럼 과민 반응을 했다.
“뭐! 왜 그렇게 봐?”
“네가 이상하잖아.”
저 홍조는 아파서 빨개진 게 아니라 꼭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제냐의 지적에 진이 더욱 발끈했다.
“뭐가 이상해?!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오호. 제냐가 눈을 반짝 빛내자 무언가 불길함을 느꼈는지 진이 얼른 말을 바꾸려 했다.
“그 이야기는 됐고! 내가 그때 그거 찾았단 말이야. 마탑에서 찾은 예언과 관련된 기밀문서! 그거 줄 테니까 좀 도와주라. 응?”
예언과 관련된 기밀문서?
‘그게 뭐였더라.’
잠시 고민하던 제냐는 이내 흥미를 지웠다. 그런 기억도 안 나는 것보다는 진의 마음이 더 궁금했다.
관심 없다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진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새는데, 시녀의 목소리와 함께 제레미야가 등장했다.
“황녀 전하 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