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럼 곧 즉위식이…….”
“세상에, 정말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어린애들한테도 정말 못 할 짓이지.”
“그러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
제냐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옆에 앉는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췄다.
“왜요?”
싱그러운 바람에 루미에르의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제냐는 은테 안경 너머 다정한 갈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네요.”
루미에르가 어색하게 안경을 매만졌다.
“그래요?”
“뭐, 여전히 잘생기긴 했지만요.”
레라지에가 건네준 안경 덕에 화려한 미인에서 단정하고 지적인 미인으로 변한 루미에르가 쑥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제냐도 예뻐요.”
잘생겼다고 말을 건네면 늘 버릇처럼 돌아오는 이야기였기에 제냐는 부끄러워하는 루미에르와 달리 태연하게 그 말을 넘겨 버렸다.
광장 한가운데에 자리한 벤치에 앉아 루미에르가 가져온 음료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하던 제냐가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왜 놀면 놀수록 사람은 더 늘어지는 걸까요?”
루미에르가 젖은 제냐의 손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며 답했다.
“으음, 아직 휴식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직도요?”
신전에서의 일이 마무리되고. 용사 후보라고 칭해지던 아이들을 전부 제레미야에게 맡겨 버리며 그쪽과 관련된 일에서 완전히 손을 턴 지 세 달.
그날부로 마계에 돌아가지 않고 그녀의 고향을 시작으로 인간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행 중인 제냐가 고개를 기울였다.
“너무 놀아서 더 처지는 게 아니라요?”
“저는 너무 좋은데요?”
확실히 요새 루미에르의 얼굴은 윤이 나다 못해 빛이 나고 있었다. 안경으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사람들이 흘끔거릴 정도로.
흥, 코웃음을 친 제냐가 루미에르에게 조금 더 가까이 앉으며 말했다.
“뭐, 나도 싫은 건 아니에요. 그냥 이래도 되나 싶은 거지.”
루미에르가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제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제냐도 10년간 열심히 일했잖아요. 조금 더 쉬어도 괜찮아요.”
보란 듯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을 쳐다본 제냐가 아무렇지 않게 루미에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즉위식이 끝날 때까지만 더 놀까요?”
“제냐가 그러고 싶으면요.”
온전히 그녀에게 선택을 맡겨 주는 루미에르에 웃음을 흘린 제냐가 다시 주변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전, 성녀, 그리고 황제와 황녀까지.
얽히고설킨 그들의 관계는 단연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래도 슬슬 정리되는 모양새지.’
초반 한 달만 해도 성녀가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를 몰아내는 건 너무하다,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점점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하나둘, 성녀와 황제의 악행과 그에 대한 증거들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여론이 변화한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용사 후보라고 칭해지던 아이들의 이야기가 퍼지면서였고.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당연히 황제와 성녀는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주를 이뤘고, 자연히 새로운 지도자가 누가 될지에 대해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신전에 황녀 전하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다며? 그럼 황녀 전하께서 황제 폐하가 되시면 신전도 황실 소속이 되는 건가?”
“교황과 성녀가 한 번에 물갈이가 되니까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신전에는 아직 그분이 계시잖아.”
남자의 말에 상대가 의아한 얼굴로 되묻다가 무언가 깨달은 낯을 했다.
“누구…, 용사?”
그러자 남자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전에는 아직 용사님이 있잖아. 그분께서 나서 주시면…….”
귀를 기울이던 제냐가 루미에르를 쳐다보자 그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저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루미에르는 저 이야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흐음.’
성녀가 완전히 민심을 잃은 이후, 사람들의 관심은 루미에르에게 쏠렸다. 문제는 그런 흐름과 달리 루미에르가 신전을 박차고 나왔다는 거고.
아니나 다를까 제냐의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의 대화는 용사의 부재에 관한 것으로 넘어갔다.
“용사는 두문불출이라며? 그냥 이쪽 일에 관여 안 하려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행방불명됐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저번에 돌아왔다고 안 했어?”
남자가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그랬는데, 마족들이 신전에 쳐들어왔을 때 실종됐대.”
“정말?”
“그래.”
상대가 기대에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번처럼 갑자기 나타나지 않을까?”
“글쎄. 나타나도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용사는 완전히 성녀의 사람이잖아?”
남자의 지적에 상대가 눈을 부릅떴다.
“에이, 아니지. 용사님과 그 여자는 완전 별개지. 황녀 전하가 발표하신 입장문에도 용사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었잖아.”
그 말에 남자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지도 모르지.”
남자의 긍정에 상대가 콧김을 뿜어냈다.
“마족 놈들 탓에 너무 무리하신 게 분명해. 이게 다 마족 놈들 탓…….”
“야, 못 들었어? 그것도 다 신전이 먼저 공격한 거라던데?”
“정말?”
“그래, 내가 황궁에서 일하는 지인이 있잖아. 신전이 마족 사칭해서 나쁜 거 다 뒤집어씌우고 다니니까 열받아서 그런 거라는 소문이 있다던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또다시 신전에 대한 악감정을 마구 풀어내던 남자가 쯧쯧, 혀를 찼다.
“맘 같아서는 신전 것들은 다 망해 버렸으면 좋겠구먼.”
“그래도 또 성력이 효율적이긴 하잖아? 마족이 아니라도 성력이 있으면 치료도 빠르고.”
“요새 신전도 눈치를 많이 봐서 예전이랑 다르게 공짜 치료도 많이 해 준다더라. 봉사 활동도 다니고.”
그 말에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
“콧대 높으신 분들 기가 죽었지.”
“좋은 일이지 뭐. 덕분에 우리 옆집 애도 발 부러진 거 한 번에 나았다던데. 그런 의미에서는 신전이 계속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상대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황녀 전하께서 잘 아우르시겠지.”
“암, 그렇고말고.”
결국에는 다시 황녀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관심을 끊은 제냐가 루미에르를 돌아봤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신전과 황실을 포괄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음, 뭐 알아서 잘하겠죠?”
생긋 웃는 루미에르의 얼굴에는 정말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어 보였다.
정말 관심이 하나도 없는 표정.
어떻게 되든가 말든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고 관심을 주고 싶지도 않다는 의지가 듬뿍 보이는 얼굴에 제냐는 입을 다물었다.
‘하긴 석 달 내내 성녀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들어도 한 번도 관심 안 줬잖아.’
석 달 동안 루미에르는 오로지 제냐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제냐도 덩달아 그쪽으로는 관심을 주지 않으니 심적으로 굉장히 편했다.
‘사실 오늘 약속이 아니었으면 나도 신경 안 썼을 텐데.’
갑작스레 잡힌 약속 때문에 갑자기 제국의 수도로 들어왔고, 그러다 보니 다시 관심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제냐가 무심하기 짝이 없는 루미에르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이번 약속, 괜히 잡은 것 같아요?”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제냐는 한 번쯤 보고 싶었잖아요.”
확실히 그렇긴 했다. 그때 제레미야와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기도 했고,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오로지 제냐의 생각일 뿐이었다.
“너무 내 의견만 따라 줄 필요는 없는데요.”
생각해 주는 건 좋지만, 그녀 때문에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할 필요는 없었다. 제냐의 말에 루미에르가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깜빡이더니 예쁘게 웃었다.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러고는 쪽,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있으니까.”
루미에르가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그녀를 옆에서 꼭 끌어안았다. 폭, 그의 품 안에 안긴 제냐가 그의 볼에 마주 입을 맞춰 주려는데, 루미에르에게는 안타깝게도 불청객이 나타났다.
“와, 여전하네. 여전해.”
이 빈정거리는 목소리. 익숙하다 못해, 짜증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린 제냐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직 약속 시간 다 안 됐는데?”
왜 네가 빨리 와서 난리냐는 말에 진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예의를 갖춘 거거든?”
발을 구르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진은 신수가 훤해 보였다.
‘제레미야 밑에서 제법 호의호식하는 모양이네.’
막판에 줄을 잘 선 덕에 잘 먹고 잘사는 중인 모양이다. 눈 밑이 조금 시커멓긴 하지만.
레라지에가 무사히 계약을 해제해 준 덕에 마법을 쓰는 데에도 별다른 무리는 없어 보였고.
‘뭐, 새로운 계약을 맺은 것 같긴 하지만 딱히 불편한 기색은 없어 보이고.’
진이 눈꼴 시리다는 얼굴로 인사처럼 말을 건넸다.
“좋아 보인다?”
“누가 할 소리를.”
제냐가 위아래로 그의 모습을 훑는데, 자기를 잊지 말라는 듯 루미에르가 그녀의 턱을 붙잡으며 쪽 볼에 입을 맞췄다.
“제가 대신해도 되죠?”
받지 못한 키스를 대신 하는 루미에르에 진이 웩,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그녀도 조금 민망했으나 제냐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목을 가다듬었다.
“큼큼, 됐고. 왔으면 가기나 해.”
마법사가 커플 타도를 외치며 그들을 쳐다봤지만 제냐는 뻔뻔하게 그 시선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끄럽다니까?”
물론 자리에서 일어난 제냐와 루미에르는 손을 꽉 붙잡고 있어 다시 한번 진의 눈총을 샀다.
“악! 진짜 내 눈 좀 지켜 줘라!”
마법사의 짜증 어린 외침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