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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28)화 (128/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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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제냐는 레라지에가 나타나고 나서야 그가 자리에 없었음을 눈치챘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역시 무사했구나.”

레라지에가 생긋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신관을 순식간에 없애 버리는 걸 보면서 제냐는 어색하게 그 인사를 받아 줬다.

“아, 네…….”

“성녀는 잘 처리했군.”

제냐는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덩그러니 누워 있는 성녀를 외면했다. 마왕이나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루미에르도 완전히 정이 떨어진 걸까?

그는 성녀가 단순히 기절한 게 아니라 보석 때문에 꿈속을 헤맨다는 걸 안 뒤로도 그녀에게 별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제냐는 그녀의 옆에 딱 붙어 마왕을 경계하는 루미에르를 한 번 쳐다봤다가 레라지에에게 물었다.

“황궁에 있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은 전부 레라지에 님이 한다고 들었어요. 그쪽 상황이 어떤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냐의 물음에 레라지에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날 선 시선을 보내고 있는 마왕과 루미에르에게로 향했다. 다행히 레라지에는 금방 돌아가는 분위기를 눈치챘다.

“걱정하지 말게, 마침 여기 도착하기 전 연락을 받았거든. 성녀는 그쪽에 인계하기로 한 건가?”

제냐가 마왕의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일단은요.”

레라지에가 답을 구하듯 마왕을 쳐다보자 마왕이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라지에가 손뼉을 짝 쳤다.

“뭐, 저희한테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제냐가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그 사람들도 성녀의 처벌을 흐지부지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사형을 원하는 것이 아니니, 일이 더 잘 풀릴 것이라 말을 더한 레라지에가 제냐를 불렀다.

“제냐.”

“네?”

“그대의 사촌은 무사하고, 앞으로도 무사할 거야. 아비에 왕국 사람들과 손을 잡았거든.”

제냐의 머리가 다시 한번 굳었다. 도대체 뭘 어쩌다가 또 그들과 손을 잡은 걸까?

물론 왕국 사람들이 들고일어난 이상 황제는 실각하게 될 테고, 그러니 왕국 사람들과 손을 잡는 편이 제레미야에게도 이득인 일이겠지만…….

제냐는 또 가지를 쳐 나가는 생각을 재빨리 지워 냈다.

이 이상 생각을 해 봐야 머리만 아팠다. 이해하기 힘든 건 매한가지일 테니 지금은 그냥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나았다.

제냐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레라지에가 성녀를 허공에 띄웠다.

“자, 그럼 성녀는 내가 적당히 데려다주고 오겠네.”

“…어디를요?”

“황녀가 있는 곳에.”

지금? 가서 뭐라고 하게?

튀어나올 것 같은 질문을 삼킨 제냐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그랬듯 알아서 하겠지.

해탈한 것 같은 제냐의 표정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레라지에가 마왕을 돌아봤다. 그러자 마왕이 제냐에게 제안했다.

“저택에 가 있겠나?”

저택에 가서 쉬는 것도 좋을 것 같긴 한데, 거기에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더 있었다.

‘용사 후보들.’

적어도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과 같이 가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제냐가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레라지에 님과 같이 가시는 거죠? 오래 걸릴 것 같으세요?”

“아니.”

“그럼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래.”

간단한 답과 함께 마왕은 레라지에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자 루미에르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짜증 나요.”

줄곧 침묵하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그 이후로 줄줄 마왕에 대한 불만을 쏟아 냈다.

제냐는 그런 루미에르의 이야기를 한참 들어 주다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제멋대로 굴지 않나, 친한 척 말을 거는 것도 싫…, 왜요?”

“아니요, 그냥. 마왕 이야기 말고 다른 걸 할까 싶어서요.”

“뭘요?”

“이제 정말 다 끝난 거나 다름없잖아요. 우리가 신경 안 써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 것 같은데.”

이제 제냐는 저 복잡한 일에 전혀 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루미에르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좀 밝고 즐거운 이야기를 하면 아픈 머리도 나아질지 몰랐다. 제냐가 고개를 기울이며 루미에르에게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요? 역시 아까 말했던 그분을 보러 가는 게 좋겠죠? 성녀 전에 손을 내밀어 줬다던 사람이요.”

제냐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루미에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디 있는지 안다면서요. 가 볼래요?”

하지만 기뻐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루미에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

생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제냐가 조심스레 물었다.

“음, 안 보고 싶어요?”

그러자 루미에르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보고 싶어요.”

“그럼 보러 가요.”

그러나 루미에르는 대꾸 대신 눈을 곱게 휘어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 묘한 웃음에 제냐가 눈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웃어요?”

조금 더 짙은 미소를 흘린 루미에르가 운을 뗐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안 했죠?”

“음, 그렇죠?”

루미에르가 손을 뻗어 그의 다리 근처를 손짓했다.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이만했어요.”

“엄청 작았네요?”

“그 사람도 저랑 비슷했어요.”

뭐? 제냐가 놀라서 루미에르를 돌아봤다.

“…어른이 아니었어요?”

당연히 그를 돌봐 주던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키가 비슷했다고? 아니, 어른 중에서도 키가 작은 어른이 있긴 하겠지만 이건…….

설마 하는 마음에 그를 쳐다보는데, 루미에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또래 여자애였어요.”

지금까지 뭣 모르고 나불거리던 입을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간을 팍, 좁히던 제냐는 루미에르의 얼굴을 보고 어리둥절해졌다.

‘그런데 왜 저렇게 간질간질하게 웃어……?’

그 미소의 의미를 해석해 보려는데, 루미에르가 손을 뻗어 미간을 문질러 주며 말했다.

“그 여자애는 검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을 가진 당찬 여자애였는데, 공주님 같은 옷을 입고 있었죠.”

뭐?

“저는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제냐의 눈이 커지자 루미에르가 귀엽다는 듯 눈웃음을 쳤다.

“맞아요. 그때 거울에서 본 그 애가 저예요.”

“…농담하는 거예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묻자 루미에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걸로 왜 농담을 하겠어요?”

그럼 정말이라고? 그 조그맣던 꼬마가 정말 루미에르가 됐다고?

입을 뻐끔거리며 그를 쳐다보자 루미에르가 손을 뻗어 제냐의 턱을 닫아줬다.

“어때요. 10년 전부터 좋아했다는 말도 거짓말은 아니죠?”

그러면서 장난스레 덧붙이는 말에, 아이들과 유치하게 떠들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게 말이 돼요?”

거짓말도 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진짜라고?

“그러게요.”

정신이 없는 제냐와 달리 루미에르는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말 운명이죠?”

애교 섞인 얼굴로 웃으며 슬쩍 어깨를 부딪쳐 오는 루미에르에 제냐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까지 입이 간지러워서 어떻게 비밀로 했대?’

그 웃음에 루미에르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제냐의 존재가 제게는 흔들릴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버팀목이었어요.”

루미에르의 시선이 제냐의 눈, 코, 입을 차례로 훑어 내렸다.

“점점 흐려지는 얼굴이, 목소리가 안타까울 만큼요. 그런데 그런 제냐를 다시 만난 거예요.”

그러고는 보는 사람이 민망해질 정도로 시선 가득 애정을 담아 제냐를 쳐다보는 것이다.

“다시 만난 제냐는 예전이랑 똑같이 단단하고 멋진 사람이었고요.”

그건 사뭇 맹목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감정이었다.

“당당하게 바라는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신기했고, 그렇게 말해 놓고 아무것도 안 해도 친절하게 구는 사람도 처음이었어요.”

과거를 떠올리듯 옅게 웃던 루미에르가 다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래서 제냐가 좋아졌어요. 같이 있고 싶고, 떠나고 싶지 않아서…….”

머뭇거리면서도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몰랐는데, 난 욕심이 정말 많더라고요. 그걸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을 정도로.”

루미에르가 흔들리는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지금도 제냐가 좋아할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주려고 애쓰고 있어요.”

말을 멈추고 크게 숨을 들이쉰 루미에르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드디어 그 말을 했다.

“그래도 이런 저라도 괜찮으면, 앞으로도 제냐랑 같이 있고 싶어요.”

눈을 깜빡거리며 루미에르의 말을 집중해 듣고 있던 제냐가 이번에야말로 물었다.

“그러니까 이건 고백이죠?”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루미에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네에, 맞아요. 고백이에요.”

“흐음.”

참, 고백을 받는데 오래도 걸렸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이번에도 반쯤 돌려 말한 셈이었고.

‘나도 시간 좀 끌어 볼까.’

하지만 지금 받아 주지 않으면 또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가늠이 안 됐다.

거기다가 지금 그녀를 쳐다보는 저 얼굴이, 눈빛이, 미소가 저렇게 예쁜데.

“고향에 가 보고 싶어요.”

툭 튀어나온 제냐의 말에 루미에르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 떴다. 그러고는 혼자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제냐는 푹, 아래로 꺼지려는 루미에르의 뺨을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같이 가요. 많이 바뀌었겠지만, 소개해 줄게요.”

그 말에 흐려지던 푸른 눈이 맑게 개고, 루미에르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제냐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 이건 고백을 받아 준 게 되는 거죠?”

루미에르가 화앗-! 빛이 피어나듯 웃음을 지었다. 그 아름다운 미소를 따라 입꼬리를 올리는데, 순간 그 엄청난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걸 인지하기가 무섭게 입술에 말랑한 촉감이 닿고.

촉.

훅 다가온 루미에르의 커다란 손이 제냐의 양 뺨을 감쌌다.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스르륵,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툭, 아래로 떨어진 제냐의 손에도 루미에르는 물러나지 않았다.

입술을 감쳐물며 더 깊게 다가오는 몸짓에 그의 옷깃을 붙든 제냐가 둥둥, 기분 좋은 고동을 내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지끈거리던 머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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