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제레미야는 경계 가득한 눈으로 그들의 앞에 나타난 상대를 바라봤다.
얼굴의 반을 가린, 피가 살짝 묻은 하얀 천. 한때는 길었을 게 분명하지만 지금은 한쪽이 엉망으로 잘린 은발. 피가 묻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쉬울 것 같은 옷까지.
갑자기 나타난 남성은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분명 마족일 텐데.’
꼴을 보아하니, 상대는 제레미야를 가지고 놀던 그놈보다 더 심각한 또라이가 틀림없어 보였다.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 해서 고문하고 논 건가?’
엉망진창인 꼴과 달리 우아한 말투조차 상대의 돌아 버린 면모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런 마족과 그래논 백작이 친분이 있는 사이처럼 보인다는 거였지만.
마족이 나타나자마자 반색하며 그를 맞이한 그래논 백작은 이제는 아주 친근하게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백작이 오늘 마족이 신전에 침입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건 전부 저놈 때문인 걸까?
‘저런 거를 믿는다고?’
꼴이 저 모양인데? 완전히 피에 미친 놈 같은데? 어떻게 저런 걸 믿고 일을 감행한단 말인가?
제레미야가 그래논 백작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데 백작과 이야기를 하던 마족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러니까, 그대가 바로 황녀군?”
생긴 것과 달리 친절한 척 건네지는 물음이 소름 끼쳤다. 제레미야가 입 안의 살을 씹으며 태연한 척 말했다.
“네, 누구시죠?”
“레라지에라네. 제냐와도 아는 사이지.”
이름만 알아도 아는 사이지. 제레미야가 불신 가득한 시선으로 레라지에를 쳐다보는데 그래논 백작이 나섰다.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 아스트리아 공주님과 함께 다니시는 분이니까요.”
제레미야가 눈매를 좁히며 다시 한번 상대를 살피는데, 머리 위에서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인간이 있다!”
그에 흠칫 몸을 굳히는 일행과 달리, 마족이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몸이 무언가에 짓눌리듯 무거워지고, 귓가에 부드러운 말투가 흘러들어 왔다.
“물러가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에게 달려오던 마족들이 기겁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레라지에 후작님?”
“허억.”
“꼴이 왜 그러…….”
“미친놈아! 조용히 해!”
“죄, 죄송합니다. 가자!”
그들이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자 레라지에가 눈매를 늘어트렸다.
“미안하군, 다들 적잖이 흥분해서.”
가볍게 사과를 건넨 그가 그래논 백작을 돌아보며 물었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같이 이동하겠나? 그게 안전할 것 같은데.”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백작의 답에 제레미야의 얼굴이 삐딱해졌다. 정말 같이 움직인다고?
“이쪽도 일정이 있으니 바로 움직이는 게 좋겠군.”
하지만 뭐라 의견을 낼 틈도 없이 그들의 동행이 결정됐다.
그리고 정말 어이가 없지만 은발 마족, 레라지에와의 동행은 일행에게 큰 도움이 됐다.
제레미야는 벌써 세 번째 그들을 발견했다가 레라지에를 마주하고는 허겁지겁 도망가는 마족들을 바라보며 혀를 씹었다.
‘마족들 사이에서도 미친놈으로 소문난 놈인가?’
이미 마족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가득한 제레미야의 속에서 레라지에의 평가가 바닥을 찍을 때쯤, 그가 자리에서 멈춰 섰다.
“여기까지만 함께 가도록 하지. 나와 같이 있는 게 들켜서 좋을 일은 없을 테니까.”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래논 백작의 인사를 받은 레라지에가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사라졌다.
주변을 살피며 정말 그가 사라진 걸 확인한 제레미야가 백작을 바라봤다.
“믿어도 되는 거예요?”
꼴이 좀 그렇지 않았냐고 묻자 백작이 아,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오늘이 조금 그래 보여서 그렇지. 원래 점잖은 마족입니다.”
마족이 점잖아 봤자지. 제레미야가 코웃음을 치는데 레라지에의 등장 이후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던 진이 말했다.
“신경에 거슬리지만 않으면 아마 괜찮을 거예요.”
백작이 놀란 듯 그를 쳐다봤다.
“그대도 저분을 아나?”
“제 심장…….”
작게 중얼거리다가 가슴을 움켜쥐는 그 모습에 제레미야는 그에게 제약을 건 이가 레라지에였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것 같지 않은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의심하시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확실히 오늘은 꼴이 좀 그랬다고 중얼거린 백작이 말을 이었다.
“정보를 얻고, 얌전히 있는다면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은 저도 잘 모르긴 합니다. 다만 아스트리아 님과 용사님이 함께 계시니까요.”
그 말에 제레미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분들이 있으면 정도 이상의 일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백작이 매끄러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저도 마족이 아니라 공주님을 믿는 거지요.”
번지르르하니 말은 잘했다. 제레미야가 침묵하자 진이 눈치를 보더니 끼어들었다.
“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제냐, 그러니까 공주님은 저 후작이랑 나쁘지 않은 관계거든요.”
“…저런 거랑?”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진을 바라보자 그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거렸다.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긴 한데, 그래도 폭력적인 편은 아니었습니다. 괜히 말을 섞었다가 피곤해질까 봐 모른 척하고 있긴 했지만…….”
아니, 뒤에 붙은 말이 이상한데.
하지만 다들 괜찮다는데 더 말을 꺼내는 것도 우스웠다. 백작의 말대로 아스트리아와 용사를 믿는 걸로 넘어가는 수밖에.
대신 제레미야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들이 한곳에 모여 있을 수 있는 거죠?”
처음에는 어디에 잘 숨어 있었던 건가 싶었는데, 여기로 이동하면서 마주했던 마족들을 생각해 보면 그건 불가능해 보였다.
마법을 이용해 모습을 감췄는데도 마족들은 귀신같이 그들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인간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면, 진작에 마족들이 날뛰어서 시끄러워졌을 텐데.
그러자 백작이 걱정 없는 얼굴로 설명했다.
“부상병들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봐도 부상병들이 많은 쪽을 굳이 건드리진 않더군요.”
또 한 번 제레미야의 표정이 일그러지려는데, 백작이 가볍게 말을 덧붙였다.
“발악하고 몸부림치는 쪽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 게 더 싫었다. 제레미야가 표정을 구기자 백작이 어느 한쪽을 손짓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뒀습니다.”
“저쪽입니다.”
옆에서 말을 보탠 호위 기사가 제레미야에게 충고했다.
“표정 관리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그 말에 제레미야는 얼른 일그러졌던 얼굴을 폈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정확히 뭐죠?”
그 물음에 백작의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가 어렸다.
“늘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한쪽을 은근히 깎아내리고 황실을 높이시는 것.”
사람 좋은 척, 그린 듯한 미소에는 비꼼이 가득했다.
“물론 오늘은 그 대상이 폐하가 아니라 전하가 되어야겠지요.”
하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백작의 말대로 그건 제레미야가 제일 잘하는 일 중 하나였으니까.
그녀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옷차림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엉망으로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대충 툭툭 내리치고, 구두 한 짝을 잃어버린 탓에 아무렇게나 주워 신은 형편없는 신발을 드레스 아래로 숨겼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정리해 드릴까요?”
“아니, 적당히 지저분한 게 더 좋아.”
자기들과 같은 위험을 겪은 이라는 공감이 가야 일이 쉬워질 거라는 그녀의 말에 그래논 백작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레미야가 백작을 비웃듯 씩, 웃고는 빠르게 표정을 정돈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다들 자기들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제레미야가 다친 사람들을 살피고,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자 서서히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나둘, 그녀에게 몰리기 시작한 관심은 삽시간에 무리로 퍼져 나갔다.
“어?”
“저, 저분은……?”
제레미야는 그녀에게 집중된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난 놀라움과 미약한 희망을 눈으로 담으며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무사하셨습니까?”
“…황녀 전하다.”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녀가 가진 가장 값진 것이었다.
“황녀 전하라고?”
“아!”
“살아 계셨군요?!”
제레미야는 지친 기색을 숨기지는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은 것처럼 옅은 미소를 흘리며 사람들과 눈을 마주했다.
아버지가 제일 잘하는 것이자 제레미야도 물려받은 능력.
‘그래, 제일 잘하는 일을 하자.’
그리고 이내 수군거림이 최고로 고조됐을 때. 제레미야는 입을 열었다.
* * *
선동이 끝나고 그녀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며 뿌듯해진 제레미야가 벅차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보란 듯 백작을 쳐다보는데, 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어딜 보는 거…….’
그리고 동시에 주변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누구…….”
“어?”
“맙소사!”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불안해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고개를 돌린 제레미야는 재빨리 입을 가렸다.
“이런, 씨…….”
하지만 튀어나온 말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하얀 신관복을 입은 채, 그녀의 앞에 쓰러진 사람 때문이었다.
“성녀님!”
제레미야는 그녀의 앞에 배달된 성녀를 보며 혀를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