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마왕의 답을 기다리던 제냐는 돌아온 답에 귀를 의심했다.
“잘 끝났는데 뭐가 문제야?”
세상에. 이게 지금 저 입에서 튀어나올 말인가?
제냐가 태연하다 못해 뻔뻔한 마왕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라고 하셨어요?”
마왕이 상자에 보석을 넣으며 대꾸했다.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거 아니야.”
“하!”
와, 이건 진짜 너무 한 거 아닌가? 적어도 미안하다고 사과는 해야…….
제냐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붙잡고 보석 상자를 갈무리하는 마왕을 노려보는데, 루미에르가 끼어들었다.
“제냐, 저자에게 상식을 바라선 안 됩니다.”
루미에르가 얼른 제냐를 그의 뒤로 숨기며 마왕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뒤로 물러나 있어요.”
그리고 동시에 루미에르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저거 분명, 루미에르가 진심으로 싸울 때마다 나오는 그거 같은데.
‘아니 나도 화가 나긴 하지만…….’
지금은 둘이 싸우기 좋은 때가 아니었다. 때문에 속마음과 달리 제냐는 어쩔 수 없이, 루미에르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싸우지 말아요.”
“하지만…….”
서늘하게 마왕을 쳐다보던 루미에르가 잔뜩 시무룩한 얼굴로 제냐를 돌아봤다. 삭삭,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는 게 정말 대단했다.
제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일이 다 끝나거든 따로 싸워요. 지금은 안 돼요.”
그러자 그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물론 말려야 할 이는 루미에르뿐만이 아니었다.
제냐는 뭘 잘했다고, 루미에르가 기세를 끌어 올리자마자 지지 않고 흉흉한 기운을 드러내던 마왕의 시선을 끌어왔다.
“장난치지 마시고 빨리 설명해 주세요.”
마왕이 험악한 기운을 가라앉히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지금 한숨을 쉬고 싶은 게 누군데?
다행히 제냐가 화를 내기 전 마왕이 설명을 시작했다.
“성력은 인간을 치유하고 보호하는 힘이지. 그런데 네가 가진 힘은 인간만이 아니라 마족까지 치료해. 누군가에게는 더 특별하게 작용하기도 하고.”
“…네. 그런데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되짚는 이유가 뭐지? 제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왕을 쳐다보자, 그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성력 외에 상대를 가리지 않고 치유하는 힘이 하나 더 있거든.”
“그게 뭔데요?”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에 알려 주지 그랬어. 제냐가 처음의 심드렁한 태도를 버리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마왕을 쳐다보는데 그가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응?
손가락을 따라 위를 쳐다본 제냐는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저게 뭔데?’
제냐가 답을 구하듯 마왕을 쳐다보자 그가 설명을 더 했다.
“저기 광신도들이 쓰는 거 말이야.”
광신도… 광신도?
순간 조금 전 마왕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제냐가 하던 생각을 멈추고 마왕에게 미쳤냐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마왕은 기어이 그 말을 뱉었다.
“천족이 쓰는 힘. 신력.”
정말 정신이 나갔나? 아직도 보석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어?
제냐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는데도 마왕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흠, 완벽히 천족이 쓰는 것과 같진 않아도 그 엇비슷할 거야. 과거의 나나 저치가 쓰는 힘에 마력과 마나가 섞인 것처럼, 네 힘에도 성력이 어느 정도 섞여 있을 테니까.”
정말 미친 건가 싶은데, 저 진지한 얼굴을 보면 또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진실이라고?
“…….”
제냐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그럼 저, 인간이 아닌가요?”
멍한 정신에 어떻게든 질문을 던지자 돌아온 건 한심하다는 눈빛이었다.
“귀가 먹었나? 그렇게 따지면 나는 그렇다 치고 네 옆에 저놈도 인간이 아닌 건데?”
“아.”
제냐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상황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 정신이 없는데 마왕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조금 유하게 태도를 바꿨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하지만 천계의 보석을 제대로 다루려면 신력이 있어야 하고, 저건 네 말을 들었잖아?”
천계의 보석을 가리킨 마왕이 그냥 쉽게 생각하라고. 조금 특이한 힘일 뿐이라 제냐를 달랬다.
‘별거 아니라니.’
인간이 아니라 천족이 쓰는 힘이라는데,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게 평범한 게 아니니까, 이제껏 마왕도 제냐의 힘이 신력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제냐가 더 자세히 질문을 던지기 전, 바닥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아직 성녀가 있다는 걸 기억해 낸 제냐가 입을 다물었다. 정말 궁금한 게 너무 많았지만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었다.
제냐가 질문을 삼키며 바닥에 쓰러진 성녀를 눈짓했다.
“…일단 그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
마왕이 험악한 얼굴로 성녀를 내려다봤다. 혹시 마왕이 마음을 바꿀까 걱정된 제냐가 얼른 입을 열었다.
“루미에르랑 하신 약속 기억하시죠?”
마왕이 말없이 고개를 들어 제냐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괜히 민망해진 제냐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무튼 성녀에게 벌을 주려면 이 여자가 저지른 만행을 다 밝혀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요?”
제냐가 어색하게 웃는데, 그녀와 달리 루미에르는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 당당하게 마왕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밀을 알려 준 건 알려 준 거고 문제 해결은 네가 하라는 거겠지.’
역시 뻔뻔한 건 마왕이나 루미에르나 비슷했다. 루미에르에게는 절대 하지 못할 생각은 목 안으로 삼키며 제냐가 마왕을 쳐다봤다.
그러자 마왕이 귀찮다는 얼굴로 답변했다.
“지하에 언데드를 만든 흔적도 있고, 털어 보면 이것저것 나오겠지. 많이도 해 처먹었으니까.”
“그게 단가요?”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너무 대강대강 일을 처리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마왕이 고개를 기울였다.
“또, 여기만 털고 있는 건 아니고.”
제발 한 번에 이해할 수 있게 설명 좀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마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나타나는 흐릿한 풍경.
“…여기, 황성이에요?”
너무 엉망이 되어 있어서 긴가민가했는데, 여긴 황성이 맞았다. 제냐가 화들짝 놀라 마왕을 쳐다봤다.
“설마 황궁도 습격하신 거예요?”
어째서? 성녀가 그리로 도망갔을까 봐? 제냐가 엉망이 된 황성의 모습을 훑으며 답을 요구하는데, 그가 눈을 찌푸렸다.
“날 욕할 게 아니라 그대의 고향 사람들을 욕해야 할 것 같은데. 저 세력의 중추는 아비에 왕국 사람들이니까.”
“네?”
마왕이 어깨를 으쓱이며 막 등장한 이를 가리켰다. 그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누가 봐도 인간으로 보이는 이들이 황실 기사들을 결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정보에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마왕이 태평하게 말했다.
“저들이 황제의 치부를 다 가져올 거야. 그러니 운이 좋으면 황제가 미리 구해 놓은 성녀에 대한 약점도 찾을 수 있겠지.”
이것들은 손을 잡아 놓고도 서로 견제하느라 바빴으니까. 이어지는 마왕의 말에 제냐의 입에서 황당한 숨이 새어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딱 짜 맞춘 것처럼 신전이 공격받을 때, 황성도 함께 공격을 받았단 말인가?
‘꼭 미리 계획한 것처럼…….’
계획?
갑자기 황성에 들어가기 위해 도움을 받았던 그래논 백작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설마, 그래논 백작이 연관된 건가요?”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마왕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냐가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신 거예요?”
마왕이 눈을 찌푸리며 툭, 성녀를 발로 찼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게 아니라, 이것들이 여기저기 적을 만들고 다닌 거겠지.”
제냐는 끙끙거리는 성녀를 신경도 쓰지 못한 채 으, 앓는 소리를 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닌데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마왕의 말대로 이렇게 펑펑 일이 터지는 게 전부 저들의 업보라고 해도 제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타이밍이 좀…….
“딱히 이쪽에서 부추긴 것도 아니고.”
정말?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제냐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마왕을 바라봤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데요.”
제냐가 한숨과 함께 질문을 던졌다.
“인간계에 오기 전에, 저런 세력이 있다는 건 알고 계셨어요?”
마왕의 실질적인 적은 신전이긴 했지만, 신전과 황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게 그냥 제냐의 착각이라면 좋겠지만……. 그러나 이번에도 마왕은 제냐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런데?”
제냐가 눈을 크게 뜨고 마왕을 바라봤다.
“아셨다고요?”
“그래.”
그걸 아는데, 왜……. 제냐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마왕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가 공주였다는 건 모르셨다고요?”
그게 가능한가? 그러자 이제껏 당당하던 마왕이 제냐의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황성이 신전에 일에 개입하지 않을 정도만 되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딱히 그의 계획에 방해가 될 것 같진 않아서 그 이상 신경을 쓰진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럼 저들과 손을 잡기로 한 건 언젠데요?”
“손을 잡은 건 아니야. 그래논 백작이 저들의 주축인 걸 알고 있었으니 그냥 정보를 넘긴 거지.”
귀찮게 인간계의 정치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는 마왕의 말에 제냐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미 깊숙하게 끼어들 대로 끼어든 것 같은데?’
황제를 바꾸는 것보다 더 정치적인 게 있을까?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건지. 언제나 그렇듯 마왕은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