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제레미야는 애써 환희를 숨겼다.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는 건 황족답지 못했다. 이미 감정을 다 드러낸 것 같긴 했지만.
“내게 그런 말을 해 주는 이유는요?”
그래논 백작이 한숨처럼 말했다.
“…아스트리아 공주님께서 전하께 악감정이 없어 보이더군요. 그리고 전하께서도 공주님을 적잖이 신경 쓰시고요.”
아스트리아.
또다시 튀어나온 그녀의 이름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그래논 백작이 곧장 설명을 더 했다.
“제국이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은 제레미야가 바라던 말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긴 해도 제국이 망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으니까.
제레미야는 십여 년간 제국을 이끌 후계자로 살았다.
“하지만 이 일과 관련된 놈들은 다 쳐 낼 겁니다.”
안도도 잠시, 백작의 차가운 말에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물론 쳐 내야 하는 인물에는 두 분 폐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건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일까? 아니면 그녀의 울타리이기도 했던 아버지가 완전히 몰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뭐가 됐든, 그래논 백작의 단단한 얼굴을 보니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아버지의 앞날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백작이 감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저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그의 얼굴은 네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 그런 거라면, 이렇게 무심한 척 친절하게 모든 설명을 해 줄 이유는 없었다.
‘내가 없어도 상관없지만, 있으면 더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지.’
하지만 한 가지 이해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나를 어떻게 믿으려고?’
이제껏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않고 살던 제레미야였다. 그녀가 언제든 마음을 바꿔 아비에 왕국의 잔당에 대해 이야기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어쩌려고요?”
그러나 그래논 백작은 흔들림이 없었다.
“하실 겁니까?”
이건 그녀의 양심을 믿기 때문일까, 반대로 그녀에게 그 정도의 배짱이 없다고 믿기 때문일까?
‘뭐든 상관없어.’
자존심이 상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유가 어쨌든 백작의 저런 태도 덕에 그녀에게 기회가 생긴 것임은 틀림없었으니까.
상대가 그녀를 우습게 본다면, 그걸 이용해 한 방을 노리면 되는 거였고 그게 아니어도 이번 기회를 통해 그녀의 삶이 바뀔 수 있는 거니까.
‘바뀌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맞서 봐야 할 때였다.
제레미야가 그래논 백작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작의 눈에 묘한 빛이 돌았다. 자기가 물어 놓고 제레미야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놀란 것 같네요.”
제레미야의 지적에 그래논 백작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부모님을 처리해도 괜찮겠습니까?”
“죽이지 않을 거잖아요? 끽해 봐야 유배를 보내는 정도겠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끝까지 그녀를 시험하는 백작에 제레미야가 한숨을 쉬었다.
“굳이 죽여서 반발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제레미야가 지루한 얼굴로 말했다.
“나를 이용할 생각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죠?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가 황제가 되면 아무리 이유가 있다고 해도 뒷말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음.”
“그리고 아버지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기반은 본래 민심이었는데, 왕국의 이야기가 퍼지면 아버지는 당연히 민심을 잃겠죠?”
그녀는 그래논 백작의 입이 또 열리기 전 설명을 이었다.
“거기다가 신전까지 힘을 잃게 됐으니 아버지를 도와줄 가장 강력한 세력도 없는 거고.”
제레미야가 손으로 척 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버지는 황족이긴 해도, 그건 어머니의 남편이기 때문에 얻은 자리이니. 한번 자리를 잃은 이상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위치시고요.”
제레미야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계속할까요?”
그러자 그래논 백작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들어 보고 싶군요.”
그녀가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이야기를 듣겠다니. 앞으로 이자와 함께 있으면 이래저래 피곤한 일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아버지보다 더 확실한 혈통을 가지고 있고, 비도덕적인 아버지를 고발하면서 민심을 얻겠죠. 제국민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혈통 덕에 나를 금방 받아들일 거예요.”
제레미야는 너무나도 쉽게 그려지는 미래를 줄줄 이야기했다.
“그 아비에 그 딸이라고, 가식적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건 백작 쪽 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죠?”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황위를 얻어도 나는 반쪽짜리 황제가 되겠죠. 아마 백작 쪽 사람들과 반반으로 힘을 나누게 될 테고.”
“다 이해하셨군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름뿐인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냐는 물음에 제레미야는 태연하게 답했다.
“황실과 신전이 나누고 있던 힘을 이쪽에서 반반으로 나누게 되는 것뿐이잖아요?”
그 여유로움이 거슬렸던 걸까? 아니면 아직도 시험이 끝나지 않았던 걸까? 그래논 백작이 대놓고 질문을 던졌다.
“본인이 허수아비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시는 모양이군요.”
제레미야는 망설임 없이 단언했다.
“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또다시 누구 밑에서 허수아비처럼 사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 흔들림 없는 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그래논 백작이 눈썹을 치켜세우다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뭐, 나쁘지 않네요.”
평가하는 태도가 여전히 거슬렸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지적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제레미야의 물음에 그래논 백작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잠시 뒤, 돌아온 답은.
“사실 이곳이 소란스러워졌을 때, 황궁에서도 이미 일이 시작됐습니다.”
이따위 것이었다. 제레미야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래논 백작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다시 한번 말했다.
“아스트리아 공주님이 나타나신 순간, 계획을 앞당겼죠. 그래 봐야 몇 달 차이지만.”
그래논 백작이 저지른 짓에 맞지 않게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 덕분에 더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제야 제레미야는 오늘 그래논 백작이 왜 신전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제레미야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내 답에 따라서 목숨줄이 왔다 갔다 한 거네요?”
“네.”
제레미야가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
“오늘 마족이 움직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요?”
“이런 식은 아니었지만, 네.”
“어떻게요?”
그래논 백작이 답을 하지 않고 씨익, 웃기만 했다.
아직은 그녀에게 알려 줄 수 없다는 뜻이 담긴 미소였다.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지만 제레미야는 눈을 감으며 감정을 다스렸다.
이제 막 손을 잡은 단계이니 모든 걸 밝히라고 우길 수 없었다. 그러나 백작은 제레미야를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전하께서도 움직이시죠.”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뜨자 그래논 백작이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신전을 휘어잡는 게 좋겠습니다.”
“뭐라고요?”
황당하다는 시선에도 그래논 백작이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뭐, 굳이 신전까지 사로잡을 생각은 없었는데 오는 길에 괜찮은 이야기를 들어서요.”
신전에 그녀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는 말을 하면서 그래논 백작이 웃었다.
“도망가지 않고 부상자를 돌보는 모습이 좋게 다가온 게 분명하죠.”
물론 이미지 관리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또 이런 식으로 활용한다고?
하지만 아무리 신전이 힘을 잃는다고 해도, 성녀가 있는 한 제레미야가 신전을 휘어잡을 수는 없었다.
‘성녀는 아버지와는 조금 경우가 다른…….’
그때 그런 제레미야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래논 백작이 충격적인 말을 했다.
“성녀와 신전 고위층은 곧 실각할 겁니다.”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너무 충격적인 소리를 많이 들어서 머리가 아팠다. 제레미야가 미간을 찌푸리는데, 그런 그녀의 표정을 봤으면서도 그래논 백작은 따로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단지 신전을 손에 넣었을 때의 이득만을 말할 뿐이었다.
“신전이 힘을 많이 잃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마족들도 있고.”
보란 듯 창밖 마족을 가리키는 행태에 제레미야가 뾰족하게 답했다.
“마족들을 신경 쓰면서 그들과 내통한 거예요?”
그러나 그녀의 지적에도 그래논 백작은 태연하다 못해 태평했다.
“저도 안 지 얼마 안 됐는데.”
어깨를 으쓱인 백작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마족들은 저희 인간들에게 관심이 없더군요.”
“네?”
그래논 백작은 금방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 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오늘 일이 다 끝나면 알려 드리죠.”
정말 이야기를 해 줄까?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래논 백작이 건조하게 말했다.
“뭐, 전하께서도 지금 내려온 마족들이 인간들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건 아셨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태연하신 거고.”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그들의 목적에 충실하자는 말에 제레미야가 한숨을 쉬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복잡한 마음에 으, 앓는 소리를 낸 제레미야가 확인차 물었다.
“아버지와 관련된 일 말고 또 내가 모르는 성녀와 관련된 뭔가가 있는 거군요?”
그래논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나가자는 듯 진을 돌아봤다.
진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전혀 나가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모두가 눈치챘지만 다들 그걸 모른 체하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떨결에 역모라고 할 수 있는 일에 가담하게 된 진의 얼굴은 잔뜩 울상이었다.
“어디로 가나요?”
제레미야의 물음에 그래논 백작이 호위 기사를 돌아보며 답했다.
“우선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인 곳으로 가야겠죠?”
말하는 꼴을 보니 거기가 어딘지도 전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레미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진이 어두운 얼굴로 처음 이동할 때처럼 그들 주위로 마법을 둘렀다.
하늘 위로 종종 돌아다니는 마족들이 보이긴 했지만, 마법 덕인지 그들이 타겟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목적지를 얼마 앞두지 않고, 그들은 원치 않는 손님을 맞이했다.
“그대들, 어디를 가고 있지?”
누가 봐도 싸움의 흔적이 역력한, 딱 봐도 미친놈 같은 마족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