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제레미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지금 들은 이야기를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내가 백작의 말을 어떻게 믿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버지가 자기 동생을, 자기 조카를 사지로 밀어 넣어서 이득을 챙겼다는 말을 어떻게 그냥 곧이곧대로 믿는단 말인가?
무엇보다 아직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어진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제레미야의 의심은 합리적이었다는 거다. 하지만 그래논 백작은 공격적으로 물었다.
“이제껏 정말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겁니까?”
눈에 기이한 이채를 띤 백작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왕국의 멸망이, 아스트리아 공주님의 죽음이 시기상 너무나 적절했다고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까?”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 시선이 너무 흉흉해서 숨이 떨렸다. 아니,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인가?
“황실과 신전이 왜 유독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지 의아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고요?”
그래논 백작이 하, 코웃음을 쳤다.
“정말 그랬다면, 멍청한 거겠죠.”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신경을 긁어 댔다.
“황제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 황제가 왜 이제껏 신전의 행동에 크게 반발한 적이 없는지 이상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다고?”
황제는 그 누구도 자기 위에 있는 걸 허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런 황제가 성녀와 동등한 위치를 유지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백작의 말은 아프게 제레미야를 찔렀다.
“아니,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을 겁니다.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사촌의 죽음에, 왕국의 멸망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고.”
차가운 눈빛이, 혐오가 가득 찬 시선에 몸에 꽂혔다.
“하지만 그냥 모른 척한 거죠.”
제레미야는 그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뒤로 물러서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제 아비가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니길 바랐던 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알 텐데요?”
그 묘한 어조에 찌릿, 심장이 따끔하게 조여 왔다.
황제가 죽인 사람이 몇이고, 술수를 부린 게 몇 번이야? 백작이 평가하듯 제레미야를 훑었다.
“전하께서는 괜히 들쑤셨다가 피해를 보고 싶지 않으셨던 겁니다.”
제레미야는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지나간 일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협적인 얼굴로 그녈 내려다보던 그래논 백작이 바깥을 힐끗 쳐다봤다.
“지금 공주님이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알면서도 어떻게든 상황을 받아들여 보려 하는 것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죄책감 때문 아닙니까?”
이야기할 틈도 주지 않고 줄줄 말을 뱉어 내던 백작이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매우 모욕적이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나 간신히 튀어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고, 심지어 그 작은 목소리는 이어지는 날카로운 물음에 금방 사그라들었다.
“이번에도 부정하고 싶습니까?”
부정하고 싶냐고? 뭘? 제레미야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멍하니 백작을 쳐다보는데, 그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달리 감정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잔뜩 흥분했던 것은 꾸며 낸 모습이었던 것처럼 차갑고 건조하기만 한 백작의 얼굴.
하지만 그 냉랭함이 제레미야를 더욱 압박했다.
“더 이상 어리다는 핑계로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
제레미야도 알았다. 예전처럼 아직 어린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아버지가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닐 거라고 넘어가기에는 그녀도 때가 묻었다는 걸.
이제껏 그날의 흔적을 보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의심의 불씨가 불타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흔적들…….’
후계자가 되어 일을 처리하면서 봤던 발자국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냥 넘어갔나 싶은 그 많은 기록들이 바로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말 난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아스트리아를 떠올리고, 어릴 적 치기 어린 그녀의 행동만을 붙잡아 혼자 곪아 간 거라면…….
눈앞에 진실을 들이밀 때까지, 두 눈을 감고 모른 척했던 진실이 바로 그녀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얼마나 생각을 오래 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제레미야는 진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전하.”
머리가 아팠다. 지금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이 정말 스스로가 내린 답이 맞는지도 의심됐다. 언제나 그랬듯 남들의 이야기에 휘둘리는 것 아닐까?
제레미야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만나야겠어.”
그래서 이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아야 했다. 그래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야 이 아픈 머리가 정리될 것 같아…….
“진실을 알려 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들릴 리 없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에 제레미야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질문을 던진 호위 기사가 그녀를 마주 봤다.
그 눈을 보는 순간 제레미야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알고 있었네.’
같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혼란만이 가득한 진과 달리 지금 이 대화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눈빛.
진의 실력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리 큰 부상이 아니었던 걸까?
호위 기사가 별다른 감흥이 없는 얼굴로 무심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약점을 알려 주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그게 설령 자식인 전하라도요.”
“…그래서요?”
“질문을 한다고 순순히 답해 주시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철저히 공범으로 만들면 모를까.”
“하.”
비웃음을 흘렸지만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제레미야도 알았다.
하지만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가?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제레미야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데 호위 기사가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신전은 힘을 잃을 겁니다.”
뭐?
“그리고 그렇게 되면 평평하던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리겠죠. 벗어나시려면 기회는 지금밖에 없습니다.”
제레미야는 숨을 멈췄다. 벗어나고 싶다는 걸 그렇게 티를 냈던가? 그녀를 봤던 이들이 전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제레미야가 흔들리는 눈으로 호위 기사를 쳐다봤다.
“이 힘의 불균형을 폐하가 아니라, 전하께서 붙잡으시죠. 백작의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이용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래논 백작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파악하려고 하지 말고, 그걸 이용해 아버지를 끌어내리라는 소리인 건가?
‘아버지를 끌어내리라고?’
그 사람을?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과 함께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그녀가 알고 있던 정보들, 그리고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상황들.
만약 백작의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제를 의심하게 될 것이고 그런 여론전은 그의 기반을 무너트리게 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혈통은 아버지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였으니.
‘진실이 언제나 진실이 될 수 없다고 말한 건 아버지야. 그러니까…….’
제레미야가 벅차오르는 감정에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 아버지의 사람 아니었나요?”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제레미야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자 호위 기사가 그녀의 뒤를 바라봤다.
“짐작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왕국 출신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의 말처럼 사연 없는 이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도대체 어떻게 내 호위가 된 거지?’
아버지가 직접 붙여 준 호위 기사들은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서류상 저 남자는 제국의 지방 귀족 출신의 기사였고.
제레미야가 백작을 돌아보자 그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귀찮음과 곤란함이 담긴 한숨은 호위 기사의 말을 증명해 주는 셈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백작 개인의 분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건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하나의 힘이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황제를 속일 수 있을 만한 정보 통제력을 가진 세력.
그런 세력이 그녀에게 접촉해 왔다면…….
백작의 시선에 호위 기사가 변명하듯 말했다.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말했는데, 뭐 어쩌실 거냐는 그 뻔뻔한 얼굴에 백작이 험악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제레미야는 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분명 처음에는 단순한 견제였겠지만.’
저 호위 기사는 일이 잘못됐을 경우 그녀를 처리하기 위해 붙여 둔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과연 그럴까? 마족들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든 그녀를 살리려던 호위 기사의 행동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리고 호위 기사가 그녀를 살리려고 했던 건. 굳이 지금 이런 식으로 모든 정보를 알려 주는 건 한 가지를 뜻했다.
나무라듯 기사를 쳐다보던 그래논 백작의 시선이 다시 제레미야에게 닿았다.
평가하듯 그녀를 훑던 시선의 의미를 안 이상 이전처럼 저 시선이 불쾌하지 않았다.
“아비에 왕국 출신 사람들은 제국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그래, 저 호위 기사가 그들의 존재와 능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철통같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황금성에 구멍이 잔뜩 뚫려 있었다니.
완벽하게 맞춰진 줄 알았던 퍼즐에 빈칸이 가득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숨이 벅차올랐다.
“하아.”
미처 갈무리되지 못한 숨이 새어 나오고,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였다.
두려움 때문에?
아니, 이건 확 피어나는 희망 때문이었다. 정말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녀의 몸을 조여 오던 족쇄를 끊어 낼 때가 온 것이다.
너무 세게 쥐어 저릿한 주먹을 느끼며 제레미야는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