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제냐의 미소에 담긴 비웃음을 읽지 못했을 리가 없는 성녀는 그럼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성녀가 아무리 태연한 척, 여유로운 척해도 이번만큼은 그게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가득했으니까.
성녀가 의식적으로 보석을 보지 않으려 제냐의 눈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 떨림은 더욱 잘 드러났다.
‘그런데 나는…….’
정말 이상하게도 제냐는 성녀의 목에 걸린 천계의 보석을 보면서도 별다른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한 번 저 보석의 마법에서 무사히 벗어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손안에 다른 천계의 보석이 있어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저 보석은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벗어났지?”
이미 다 들킨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오만한 얼굴을 한 성녀가 제냐에게 물었다. 제냐는 그런 성녀의 물음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보아하니, 네가 루미에르를 구해 준 사람이겠지.”
제냐는 성녀의 시선이 루미에르에게 닿기 전, 앞으로 한 발 나서며 그녀의 시선을 끌어왔다. 바람대로 성녀는 다시 제냐에게 집중했다.
“따로 의지하는 사람이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했어. 그 인간이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건 몰랐지만.”
대놓고 눈을 찌푸린 성녀가 제냐를 위아래로 훑으며 비난했다.
“인간으로서 부끄럽지 않나?”
이번에는 이런 쪽으로 자극할 셈인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제냐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성녀를 쳐다봤다.
“저자가 누군지는 아나? 본인이 마왕이라고 했겠지만, 설마. 저자는 본래 인간이었다.”
성녀가 경멸 어린 눈으로 마왕을 쳐다봤다.
“어떻게 마족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족들도 멍청이는 아닐 테니, 인간이었던 저걸 마왕으로 섬기지는 않겠지.”
정말 마왕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우스웠고, 마왕이라고 여기면서도 제냐를 흔들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거라면 참 쓸데없는 짓이었다.
계속되는 우스운 소리에 결국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웃음에 성녀의 가면이 깨졌다.
제냐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성녀의 눈빛을 보면서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 너무 우습지 않은가?
“인간으로서 부끄럽지 않냐고 물었죠?”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릴 하는지.
“전혀 부끄럽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은 어떤가요? 부끄럽지 않으세요?”
제냐는 사정없이 일그러지는 성녀의 얼굴을 무감하게 쳐다봤다. 원래 저렇게 속이 훤히 보이는 사람인 걸까, 아니면 보석에 영향을 받아 저렇게 변한 것일까.
뭐가 됐든, 제냐의 생각보다 성녀는 더욱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말을 더 이어 가 봤자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 우습기만 한 대화를 멈추고 싶었다. 물론 그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하는 게 하나 있었다. 제냐는 답을 짐작하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아비에 왕국의 멸망에 연관이 있는 게 사실인가요?”
“…설마.”
무언가 알아차린 듯, 성녀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부정하지 않네요.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제냐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황제도 그 일과 연관이 있는 거죠?”
성녀는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무언가를 찾듯 다급하게 제냐의 얼굴을 훑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보랏빛 눈에 닿자.
“…너, 그 죽었던 공주구나.”
허탈한 웃음을 흘린 성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살아 있었던 거였어. 누굴 닮은 것 같다 싶더니.”
이딴 것들에게 그녀의 고향이, 왕국이 망했다고.
더 이상 성녀에게는 들을 말도, 할 말도 없었다. 제냐가 대꾸하지 않고 상자를 내려다보자, 성녀가 조급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 왕국의 멸망은 오롯이 마족들의 폭력성에서 비롯된 일이야.”
상자를 쥐고 있던 제냐의 손에 불쑥 힘이 들어갔다. 설마, 저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설령 우리가 정보를 흘렸기로서니 마족들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이런 상황에서까지 남의 탓을 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 이렇게 쉽게 털어놓을 줄 몰랐어.’
증거가 있냐고 나오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니라고 우길 줄 알았는데,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해 보였다.
“결국 너희 왕국을 멸망시킨 건 전부 마족들이야.”
고개를 숙이고 있어 제냐의 표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 만약 성녀가 그녀의 표정을 봤다면 저 멍청한 소리를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족들과 손을 잡는다고?”
저 한심한 입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들고 있던 상자가 울릴 정도로 보석이 진동했다.
‘역시 네 짓이 맞구나.’
아까부터 의심하고 있었지만, 성녀가 입을 나불거리는 건 전부 보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네가 감히, 사람들을 지키는 신전을 적으로 삼으면서?”
물론 이유가 뭐가 됐든 저건 전부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일 테고.
‘자부심이 넘쳐 나네.’
제냐는 긴 숨을 내쉬며 남은 감정 찌꺼기를 뱉어 냈다.
‘화를 내 봤자, 이해하지 못하겠지.’
끝까지 자기 잘못이 뭔지 모르고 변명만 일삼을 것이 뻔했다. 그런 여자에게 화를 내 봤자, 입만 아팠다. 왜 루미에르가 성녀를 그렇게 두고 돌아섰는지 알 것 같았다.
제냐는 상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올려 성녀를 응시했다. 보석의 영향인 건지 아니면 심리적인 문제인 건지, 성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성력은 어느새 완전히 멎어 있었다.
“우리가 없으면, 인간들은 마족들에게 수탈당하며 살게 될 거야.”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얼굴은 탐욕과 욕심, 두려움과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어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인간들에게는 우리가, 내가 필요해.”
이제는 눈앞에 제냐가 보이지도 않는지, 성녀는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단편적인 단어들을 뱉어 냈다.
“나는, 아버지가…, 승리, …영광이.”
제냐는 그 단어에 집중하지 않고 들고 있던 상자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상자 속 천계의 보석이 하얗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성녀에게 닿은 순간, 그녀가 거짓말처럼 입을 꾹 다물고 몽롱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제냐는 순식간에 행동을 멈춘 성녀의 앞에 아무렇지 않게 다가갔다.
“…제냐.”
뒤에서 걱정 섞인 루미에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제냐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또 다른 천계의 보석에 손을 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똑, 목걸이 줄이 손쉽게 끊어졌다.
털썩.
제냐는 천계의 보석이 그녀의 손에 들어옴과 동시에 바닥에 쓰러진 성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어떻게 돌려 달라는 거지?”
한 손에 들린 목걸이를 살짝 흔들자, 상자 속에 있던 천계의 보석이 다시 허공에 부웅 몸을 띄웠다.
그러고는 냅다, 그녀의 손에 있는 보석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무슨……!”
화들짝 놀란 제냐가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던지며 양손으로 조그만 보석을 감쌌다.
그러자 천계의 보석이 항의하듯 몸을 부르르 떨며 빛을 반짝였다. 하지만 제냐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할게.”
보석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제냐의 손 주위를 뱅글뱅글 돌다가 냅다 몸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내 주변에 피해를 주면 안 돼. 약속해.”
정말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부서트려 버릴 거라고 말을 더하자 우웅, 소리를 내던 천계의 보석이 한 번 짧게 빛을 반짝였다.
‘천계와 관련된 물건이니 거짓말은 안 하겠지.’
마음을 정한 제냐가 목걸이를 감싸고 있던 손을 서서히 벌렸다.
손바닥 위로 목걸이가 완전히 드러났다. 그러나 처음처럼 막무가내로 달려들 것 같았던 보석은 아까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꼭 공명하는 것처럼 함께 웅, 소리를 내며 빛을 뿜어냈다.
“제냐……!”
황급히 뒤로 다가온 루미에르가 제냐의 허리를 감싸 왔다. 마찬가지로 한껏 긴장했던 제냐는 두 개의 보석에서 나오는 익숙한 힘에 몸에서 힘을 풀었다.
‘성력이야.’
인간에게 언제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성력. 그러니까 무서워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괜찮아요. 위험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기에 제냐는 그녀의 손 위에 있던 천계의 보석이 빛을 내다가 위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걸 보면서도, 흩날리던 가루들이 큰 천계의 보석에 흡수되는 걸 보면서도 무섭지 않았다.
“…이건.”
루미에르가 그녀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지만 제냐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와 눈을 맞추는 루미에르의 시선에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 괜찮아요.’
뚜렷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자 불안하게 흔들리던 루미에르의 눈이 차분해졌다. 루미에르가 손을 뻗어 제냐의 손을 붙잡았다.
제냐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맞잡은 뒤, 바닥에 쓰러진 성녀를 내려다봤다.
쓰러진 이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다니, 비겁하고 비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꼴좋네.’
속이 시원했다. 루미에르가 정말로 성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이 참 기뻤다.
제냐는 힐끗 성녀를 보던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어느새 흡수가 끝난 건지, 은은한 빛을 내던 보석이 점점 빛을 잃고 있었다.
유심히 그 변화를 살펴보고 있는데, 보석이 마지막으로 화악-! 빛을 뿜어내더니, 자연스레 제냐의 앞으로 다가왔다. 제냐는 그녀의 앞을 막는 루미에르에게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보석이 거기가 제자리라는 듯 제냐의 손바닥 위에 몸을 올렸다.
우웅.
진동을 한 번 낸 보석이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팔랑, 바람이 불며, 마왕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괜찮나?”
그걸 이제 묻다니. 차분하게 가라앉던 감정이 다시 들끓었다. 제냐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마왕을 노려봤다.
“그것보다는 상황 설명을 먼저 하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녀를 보석 앞에 밀어 넣은 걸,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제냐가 눈에 힘을 주고 마왕을 재촉했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제 손이 제멋대로 움직일 것 같네요.”
물론 마왕은 제대로 설명해도 제냐의 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