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제냐는 눈을 뜨자마자 볼에서 또르르 흘러내리는 물기에 어리둥절해졌다. 물론 그녀는 금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바로 눈앞에 서럽게 울고 있는 루미에르가 있었으니까.
제냐는 차마 그녀를 제대로 껴안지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루미에르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오늘만 몇 번 울리는 거지?’
얼굴을 흠뻑 적신 눈물을 닦아 내자 루미에르가 애처롭게 눈을 찌푸렸다. 제냐는 그가 더 크게 울음을 터트리기 전, 냅다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울지 말아요.”
“…흐읍.”
애써 감정을 다스려 보려고 하는 것 같던 루미에르가 기어이 다시 한번 또르르 눈물을 흘리자 제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옷소매를 당겨 그의 눈물을 닦아 줬다.
하나 있던 손수건은 레라지에에게 사용해서 별수가 없었다.
루미에르가 순순히 그녀에게 얼굴을 맡기며 젖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잘못되는 줄 알고.”
그래, 왜 우는지 모르지 않았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그녀 역시 안달이 났을 테니.
제냐가 다 안다는 듯 그의 손등을 두드려 주는데, 그 반대 손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꼭 그녀를 재촉하는 것 같은 울림에 제냐가 설마,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냐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는 천계의 보석을 발견했다.
“…이게 왜 여기 있어요?”
이건 분명 마왕이 상자에 넣어 두지 않았던가? 제냐의 물음에 루미에르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갑자기, 날아왔습니다.”
갑자기 날아왔다고? 이게? 고개를 돌리던 제냐는 옆에 굴러다니고 있는 보석이 담겨 있던 상자를 발견하고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마왕은 뭘…….’
흘끗 고개를 돌렸다가 아직도 성녀를 상대하고 있는 마왕을 발견했다. 딱 봐도 루미에르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나한테도 제대로 설명을 안 했는데, 뭘 기대해.’
보석이 날아온 걸 알았을 텐데도 계속 성녀와 싸우는 걸 보면 이것도 짐작했거나,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을 거다.
제냐가 피곤한 얼굴로 손에 든 보석을 내려다보자 닦달하는 것처럼 보석이 다시금 지잉, 진동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우느라 그걸 느끼지 못했던 건지, 루미에르가 잔뜩 경계하는 낯으로 제냐의 손목을 붙들었다.
“제냐, 그거 내려놔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보석을 바라보는 시선은 흉흉했다. 당장이라도 보석을 깨부술 것 같은 얼굴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보석이 잽싸게 진동을 멈췄다.
그러더니 돌연 허공으로 붕- 떠올라 제냐의 등 뒤로 숨는 것이다.
“…제냐?”
음, 그렇게 불러도 그녀로서는 해 줄 말이 없었다.
“그, 내가 한 게 아니에요.”
꿈에서도 그랬지만 꼭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구는 보석의 모습에 당황한 건 제냐도 마찬가지였다.
제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미에르를 바라보자 그가 더욱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럼 더 위험해요.”
그 말과 함께 루미에르가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으려는데, 그녀의 등 뒤에 있던 천계의 보석이 무해함을 드러내듯 붕붕 몸을 양옆으로 움직였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제냐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는데, 루미에르는 강적이었다.
“자기가 위험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들치고 정말 위험하지 않은 것들은 없습니다.”
그러자 그 말에 반응하듯 보석이 더 빠르게 몸을 흔들었다. 아니라고, 나는 착하다고. 이제는 몸까지 하얀빛으로 반짝거리며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이다.
그 정신 사나운 모습에 제냐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됐어요, 루미에르. 애당초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던 것도 저게 도와준 것 같고.”
그 말에 보석이 그렇다며 이번에는 허공에 뜬 몸을 위에서 아래로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루미에르가 망설이듯 제냐를 쳐다봤다. 제냐가 그의 손을 토닥거렸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더라고요.”
“원하는 거요?”
하지만 딱히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저게 제냐를 협박한 겁니까?”
말이 왜 또 그렇게 돼?
“그게 아니라, 서로 거래했다고 해야 하나……?”
“거래요?”
그건 또 뭐냐는 시선에 제냐는 빠르게 꿈속 내용을 설명했다.
어둠 속에 있다가 성력을 쓰자 저게 나타났고, 자기 몸 안에 있는 구멍에 있던 잃어버린 걸 찾아 달라고 했다고.
간략한 이야기를 전부 들은 루미에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공정한 거래였다는 생각이 들진 않네요.”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보석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니까.
물론 확인 절차는 필요하겠지만.
“저걸 되찾고 나면 본색을 드러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홀리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대놓고 의심을 드러내는 제냐에 보석이 억울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마구 반짝였다. 그러나 제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답을 재촉했다.
“그렇게 굴어도 소용없어. 그러니까 맞으면 한 번 깜빡이고 아니면 두 번 깜빡이는 거야. 알겠어?”
보석이 기다렸다는 듯 한 번 깜빡거렸다. 그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제냐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물을 게 있어요?”
그러자 황당한 것처럼 제냐를 쳐다보고 있던 루미에르가 푸스스, 웃다가 보석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걸 되찾는 게 제냐에게 해가 돼?”
보석이 재빨리 두 번 깜빡였다.
“내가 대신할 수 있는 건가?”
두 번의 깜빡임. 이번에도 답은 같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좁힌 루미에르가 한숨처럼 물었다.
“내가 도와주는 건?”
깜빡.
처음으로 나온 긍정에 루미에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냐는 할 말 없어요?”
왜 없겠는가. 생명도 뭣도 아닌, 사람을 홀리는 보석이니 확실히 해 둬야 할 게 있었다.
‘저게 성녀의 손에 넘어가면.’
하나로 합쳐진 천계의 보석이 성녀의 손에 들어가는 것만큼 최악은 없었다.
제냐가 냉정한 얼굴로 선언했다.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바로 부서트릴 거야.”
보석이 겁에 질린 듯 몸을 떨더니 빠르게 깜빡거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따져 대는 것 같았다. 애당초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니 전부 그녀의 짐작일 뿐이었지만.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대충 뜻을 이해했으면서도 매정하게 답한 제냐가 차갑게 말했다.
“네가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없을 일이야. 시간이 별로 없어. 빨리 답하는 게 좋을걸?”
제냐가 보란 듯 슬슬 끝나 가는 마왕과 성녀의 싸움을 눈짓하자, 머뭇거리듯 침묵하던 보석이 아주 느리게 끔뻑, 빛을 냈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제냐가 루미에르와 한 번 눈을 맞추고 마왕을 돌아봤다.
그러자 이제껏 성녀를 상대하면서도 이쪽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게 분명한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진작에 처리할 수 있었는데, 이 보석 때문에 봐주고 있던 거겠지.’
마왕이 무슨 속셈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어울려 준다.’
물론 이번 일이 다 끝나면 또 한 번 제냐의 손이 열심히 일할 것이다. 열 대가 뭐야? 백 대를 때려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째릿, 마왕을 노려보던 제냐가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성녀를 쳐다봤다.
창백한 얼굴과 마찬가지로 핏기 없는 입술. 흐트러진 머리카락.
마왕과의 힘 싸움 때문인지 그녀는 쓰러지기 전보다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처음과 달리 현저하게 약해진 성력이 그를 증명했다.
뭐, 그녀의 힘이 약해지지 않았더라도 성력은 제냐에게 해를 끼치지 못했으니 상관없었지만.
제냐는 바닥을 굴러다니던 상자를 손에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
보란 듯 상자를 앞으로 들어 보이자, 보석이 싫다는 듯 꾸물거리며 불을 깜빡여 댔다.
정신을 잃었을 때, 본능적으로 천계의 보석에 끌렸듯 그 움직임에 살짝 미안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래도 제냐는 공사 구분을 할 줄 알았다.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지금은 순한 척 굴고 있지만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일이 틀어지는 건 딱 질색이었다. 루미에르를 더 울리고 싶지도 않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제냐에 딱히 선택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보석이 힘없이 허공을 날아 상자 안에 자리를 잡았다.
흥흥, 거리는 환청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경계하듯 보석을 쳐다본 제냐는 언제라도 상자의 뚜껑을 닫을 수 있게 준비를 마친 뒤, 성녀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루미에르를 느끼면서도 제냐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걸었을까, 이제껏 이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던 성녀가 그제야 제냐를 발견했다.
제냐는 그녀와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루미에르를 차례로 쳐다보는 성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여전히 분노에 찬 얼굴이 우스웠다. 그리고 제냐의 품에 있는 천계의 보석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얼굴에 어리는 두려움에 비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고.
‘자기가 하는 건 괜찮고, 남이 하는 건 무섭다?’
비웃음을 숨기지 않은 제냐는 망설이지 않고 성녀에게로 다가갔다. 성녀가 그녀의 발걸음을 막듯, 성력을 더 강하게 뿜어냈지만 그건 제냐의 걸음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때문에 제냐는 아주 금방 성녀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려던 성녀가 결연한 얼굴로 자리에 멈춰 선 덕분이기도 했다. 잠깐 사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숨겨 버린 중년의 여인이 오만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인간이었나?”
이런 상황에서조차 본인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구는 성녀를 보며 제냐는 깨달았다.
‘거짓말이 아니구나.’
성녀에게 무엇보다 무서운 건, 바로 지금의 위치를 잃고 그녀가 아랫것이라 여기는 것들과 같은 위치가 되는 것이라던 루미에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냐의 얼굴에 생긋, 환한 미소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