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chapter. 구원자
루미에르에게 가까워지는 손이 꺼림칙했다. 혹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게 매달리는 걸까? 아니면 과거의 정을 들먹이며 그를 설득하려는 걸까?
여러 가정이 머리에 가득 떠올랐지만 그중에 이런 것은 없었다.
“루미에르.”
느릿한 부름과 동시에 짜악, 내리쳐지는 손.
제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지금 누굴 때려?!’
눈을 부릅뜨는데, 루미에르는 놀라지도 않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러자 성녀가 당연하다는 듯 명령했다.
“옷차림을 가다듬어라.”
뭐? 조금 흐트러지고 더러워졌지만 이런 상황에서 옷이 깨끗한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제냐가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리는데, 루미에르가 군말 없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명령하는 성녀도, 아무렇지 않게 그걸 받아들이는 루미에르도 다 짜증이 났다.
‘털어 봤자 뭐 해? 그런다고 뭐가 바뀌어?’
제냐의 생각처럼 그의 옷차림은 처음과 별 차이는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성녀의 눈에도 그 모습이 마음에 차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꾸미고, 가꿔도 네 본질이 바뀌진 않는 법이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저런 말을 해도 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보석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살며시 입술을 깨무는데 루미에르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그동안의 노력이 무의미했네요.”
“…뭐?”
“그렇게 바꾸려고 하셨는데, 저는 여전히 그대로잖아요.”
제냐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처음에는 자학하는 건가 해서 더 화가 났는데 어조나 태도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열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루미에르는 담백한 어조로 말했다.
“지난 10년간 헛수고하셨어요.”
“너…….”
성녀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루미에르는 성녀가 말을 끝내길 기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죠? 평생 하신 일들도 곧 다 무너져 내릴 것 같던데.”
루미에르는 흥분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진실만을 말한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어릴 때, 누군가 저한테 마법을 가르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었죠?”
루미에르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자리 잡았다.
“재능이 있다고, 대성할 거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단칼에 그 제안을 잘라 내셨어요.”
그러나 그 웃음은 곧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아주 드물게 크게 화를 내셨죠. 그리고 제게 절대 마법은 안 된다 강조하셨고요.”
루미에르가 그의 뺨을 때렸던 성녀의 손을 붙잡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어머니도 저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거죠.”
마왕을 돌아보던 루미에르가 다시 성녀를 쳐다봤다.
“그래서 제가 도망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거고. 그런데, 어머니.”
한 템포 숨을 쉰, 루미에르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저는 마법을 배우지 않아도, 당신의 품에서 도망갈 수 있어요.”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여기 있는 모든 이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한 말투였다.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방, 루미에르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어리고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지금처럼.”
그리고 루미에르가 붙잡고 있던 손을 위로 잡아당겼다.
“이제 보니, 이 관계에서 우위는 제게 있었나 봐요. 아무리 꾸미고 가꿔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 것처럼.”
똑같은 말을 돌려준 루미에르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떠나기 전,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
그리고 성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갈게요.”
빈말로라도 잘 지내라고 말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
‘나도 못됐어.’
튀어나올 것 같은 미소를 삼키는데, 루미에르가 그녀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 순간, 루미에르의 인형 같은 얼굴에 생기가 가득 들어찼다. 보는 사람마저도 감탄할 정도로 빛이 나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빛나는 사람인데.’
성녀는 그걸 왜 알아보지 못한 걸까. 아니, 어쩌면 알아보고 나서 일부러 그 빛을 감추려 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루미에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데, 훅, 귀 옆으로 다가온 온기가 작게 속삭였다.
“다녀와라.”
뭐? 마왕의 목소리와 함께 세상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루미에르의 얼굴에 담긴 놀람과 경악.
그리고 그의 뒤에서 독기가 가득 찬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성녀.
그녀의 손 아래 붉게 달아오른 수정구를 전부 눈에 담는 순간.
제냐는 깊은 어둠 속에 침잠했다.
* * *
‘여기가 어디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린 제냐는 기억을 더듬다가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다가오던 루미에르와 적대감을 드러내던 성녀.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던 마왕의 목소리까지.
‘다녀와라.’
장난해? 다녀오라고?
흐릿하던 정신이 확 깨어나고, 속에서 울분이 차올랐다.
‘하!’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화를 낼 수도 없었는데, 그건 성녀가 깨어나기 전 마왕이 보였던 이상한 태도에 있었다.
‘정말로 보석의 마법에서 풀려난 게 아니었던 걸까?’
보석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성력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솔직히 제냐의 성력은 볼품없지 않은가?
‘필요한 성력보다 적었던 게 분명해.’
반쯤 오기로 마왕을 때려 가면서 깨웠던 게 문제가 됐던 걸까? 깨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그럼, 마왕이 성녀 편이었다고?’
그런 것치고는 또 마주했을 때 너무 평소와 다름없었다. 성녀에 대한 증오도 여전했고.
평소와 달리 조금 다정하고 친절하긴 했지만, 끝에 가서는 결국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던…….
아니, 그러니까 마왕이 여전히 보석의 마법에 걸려 있다는 거 아니야?
‘하아.’
도돌이표처럼 계속되는 생각의 흐름에 제냐는 속이 답답해졌다.
뭐가 됐든 간에 결국 지금 주변이 이토록 고요한 건,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가장 명확한 것 하나만 고르자면.’
그녀가 천계의 보석에 당했다는 거였고. 이제 와 깨달은 건, 그녀가 아직도 눈을 감고 있다는 거였다.
파르르.
눈을 뜨기 전, 정말 눈을 떠도 되는 건지, 지금은 이리 고요한데 눈을 뜨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눈을 감고만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기에.
제냐는 두려움을 이겨 내고 눈을 떴다.
* * *
루미에르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뭐지?’
어머니에게, 성녀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쏟아 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고 나자 그러고 싶어졌다. 그를 부르는 성녀의 목소리가 정말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서. 그의 뺨을 내리치는 손길도 다르지 않아서.
그렇게 뱉어 내고 나자 속이 시원했고, 제냐가 보고 싶었다.
충격에 빠진 성녀의 얼굴에 별다른 감상을 가지지 않고 곧장 제냐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용기를 준 게 제냐라는 걸 아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성녀가 뒤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무시하고 제냐에게로 몸을 돌렸다.
자신에게 오는 공격은 다 피할 수 있었고, 제냐에게 가는 공격도 충분히 막아 줄 수 있었다.
설령 루미에르가 막아 주지 못해도, 그녀의 옆에는 마왕이 있었다.
루미에르는 여전히 마왕이 싫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제냐를 지켜 줄 거라는 명제만큼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그래서 그를 떼어 두고 마왕과 대화를 하는 제냐를 그냥 지켜보았던 거고, 마왕이 멋대로 제냐의 얼굴에 손을 대도 참았던 거다.
그런데 그런 마왕이 제냐를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떠밀었을 때.
루미에르는 배신감보다는 패닉에 빠졌다.
‘왜?’
어째서 마왕을 믿었는지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고개를 들었다. 왜 어머니를 그대로 뒤에 두고 제냐가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대놓고 드러냈지?
그러면 어머니가 그 약점을 노릴 거라는 걸 알면서 왜?
콰강. 쾅.
그래서 지금 루미에르는 마왕과 성녀가 다시 싸움을 벌이는 지금, 이렇게 멍청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을 잃은 제냐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곧 돌아올 테니, 잠시만 데리고 있어.’
쓰러지던 제냐를 그의 품에 안겨 주고 떠난 마왕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기다리는 것 말고 내가 뭘 해야…….’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루미에르는 제냐를 내려다봤다. 편안하게 잠이 든 것 같은 얼굴.
그녀의 얼굴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초조하게 입술을 깨문 루미에르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이라도 얼른 신관들을 붙잡아 와 제냐를 깨워야 했다. 성녀가 뿜어내는 성력이 있긴 했지만, 이미 보석에 휘둘리고 있는 그녀의 힘이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신관이 필요…….”
“내가 데리고 오지.”
옆에 서 있던 레라지에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그 목소리에 루미에르는 그가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는 걸 깨달았다.
루미에르가 그를 쳐다보자, 레라지에가 쓴웃음을 흘렸다.
“폐하께서 무슨 생각이신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뭐든 스페어 키는 있으면 좋은 법이야. 신관만 있으면 되겠나?”
호의와 미안함이 감도는 레라지에의 얼굴.
‘이자는 믿어도 되나?’
어떤 의미에서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던 마왕도 그걸 저버렸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제냐를 이곳에 두고 갈 수도, 그녀를 데리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밖에 마족들이 저렇게 많은데, 쓰러진 제냐를 데리고 그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한결 밝아진 얼굴의 레라지에가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루미에르는 그가 떠난 자리에서 곧장 시선을 떼고 제냐를 내려다봤다.
“제냐.”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마왕과 성녀의 소리는 저 멀리 사라지고, 단둘이 남은 공간.
“제냐.”
루미에르는 간절히 그녀를 불렀다.
얼른 내게 돌아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