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18) (118/145)

놀란 듯 눈을 깜빡이던 진이 재촉하듯 던져진 제레미야의 눈빛에 느리게 입을 열었다.

“…무사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더듬더듬, 그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 제냐. 아니 아스트리아… 님도 그렇고 루미에르도 그들이 마음껏 날뛰게 할 생각은 없어 보였거든요.”

그 둘이 마족들과 함께하지만, 그래도 다들 정도를 아는 사람들이라고. 좀 제멋대로긴 해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 말하는 그 모습에 제레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마법사의 판단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안심이 됐다.

그리고 동시에 아스트리아가 그들을 통제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 애가 그 속에서 자리를 잡아서, 우리가 무사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역겨웠다.

마계에서 그 애가 무슨 취급을 받았을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네 덕에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게…….

제레미야가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걸 어떻게 생각했는지 진이 허둥지둥 그녀를 달래려고 했다.

“아니, 정말.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냥 원하는 것만 찾고 나면 떠날 거예요.”

제레미야는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려 쭈그린 몸에 얼굴을 묻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짜예요?”

그러고는 진의 말을 흘려들으며 감정을 죽였다.

그런 게 아니라고, 내 역겨운 모습이 싫은 거라고 말하지 않으려 입을 깨물며 갖은 애를 썼다.

이 더러운 속내는 그 누구에게도 들킬 수 없는 그녀만의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를 달래 주려던 진이 침묵한 지도 한참 지났을 무렵이었다.

고요함 속에서 아주 깊게 가라앉고 있던 제레미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멍하던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동시에 진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

제레미야가 놀라 팔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드는데, 진이 검지로 입을 가렸다.

“잠시.”

제레미야는 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이 한껏 긴장한 얼굴로 조용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숨을 내쉬는 것이다.

“…인간 같은데. 두 명입니다.”

인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이곳에 들이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피곤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까 하던 말을 생각해 보면, 아스트리아는 결국 다시 진을 만나러 올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이 있으면 불편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한 주제에 또 그 애를 만나려고 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제레미야가 입술을 깨무는데,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한 명은 부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돌려보내자고, 우리 상황도 있으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려던 제레미야가 창밖의 인물이 누군지 확인한 건 그때였다.

눈을 크게 뜬 제레미야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진의 팔뚝을 세게 붙잡았다.

“들여보내게.”

“네?”

제레미야가 다급하게 문 쪽으로 이동하며 말했다.

“저기 부상 입은 사람. 내 호위 기사야.”

그 말에 눈을 크게 뜬 진이 망설임 없이 문 쪽에 있던 마법을 해지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방을 지나치려던 두 명의 사람을 불러들였다.

“이리로 오세요!”

분명 벽으로 보이던 곳에 갑자기 생긴 문과, 거기서 튀어나온 진을 보며 경계하던 남자가 진의 뒤에서 나타난 제레미야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제레미야는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기보다는 남자의 부축을 받는 호위 기사에 집중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차린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들이 머무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진이 다시 마법을 두르는 걸 뒤로하고 제레미야는 곧장 호위 기사를 받아 들었다.

“내 호위 기사와는 어떻게 만난 거죠?”

호위 기사를 바닥에 눕혀 준 남자가 답했다.

“쓰러져 있던 걸 발견했습니다. 그대로 두면 혹시 문제가 생길까 봐.”

숨은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상처가 더 생긴 것 같지도 않았고.

제레미야가 급하게 기사의 몸을 살피는데 마법을 다시 걸고 온 진이 옆으로 다가왔다.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간단한 치료 마법 정도는 할 줄 알아요. 성력만큼은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정말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다.

“고맙네.”

진심이 가득 담긴 감사 인사에 진이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진이 기사를 살피는 걸 지켜보던 제레미야는 그제야 기사를 부축해 온 이를 돌아봤다.

아까부터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인물.

“…그래논 백작.”

빠져나가지 못한 귀족이 또 있을 줄 몰랐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래논 백작이 의외라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전하께서 여기 계실 줄 몰랐습니다.”

“마찬가지네요.”

그 말에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던 백작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역시 눈치채신 것 아닙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눈치 싸움을 하기에는 그녀가 너무 피곤했다.

제레미야는 부정하지 않고 그의 말을 인정했다.

“그래요. 나는 백작이 아스트리아를 도왔다는 걸 알아요.”

순순한 인정에 백작의 얼굴에 경계가 더 커졌지만 제레미야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마무리했다.

“뒤처리는 내가 했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래논 백작이 수상한 자를 궁에 들였다던 보고는 제레미야 선에서 깔끔하게 정리된 문제였다. 그 일이 절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고.

“어째서 그리하셨습니까?”

그래논 백작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제레미야를 쳐다봤으나 그녀는 태연했다.

“나라도 그 애를 도와줬을 테니까요.”

“이해할 수 없군요.”

정말 모르겠다는 그 얼굴이 오히려 이상했다. 비밀이 들킬까 봐 걱정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내가 내 사촌을 돕는 게 이상한 일인가요?”

제레미야가 그의 일을 덮어 준 건 아스트리아를 도와준 것에 대한 호의였지 이런 식으로 굴 일은 아니었다.

그의 태도를 지적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는데 백작이 고개를 들더니 희열에 찬 얼굴로 말했다.

“…알고 계셨군요.”

무슨 말이냐고, 질문을 하려는데 백작이 그녀에게 다가와 양팔을 세게 붙잡았다.

“폐하가, 아니 황제가 왕국을 멸망시킨 걸 알고 계셨죠?!”

뭐?

“그날 공주님이 계시던 신전이 공격을 받은 것도 전부 폐하의 짓……!”

제레미야가 세게 백작의 손을 쳐 냈다. 진이 기사를 치료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계하듯 백작을 쳐다봤다.

제레미야는 괜찮다고, 얼른 기사를 마저 보라고 손짓을 한 뒤, 백작을 돌아봤다. 그리고 날카롭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백작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아니라고 발뺌하실 생각이십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비겁한……!”

제레미야가 냉담하게 그의 비난을 잘라 냈다. 그러고는 눈에 힘을 주고 백작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래서 백작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야겠어요. 내게 제대로 설명해요.”

분명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 그것도 아스트리아와 관련된.

제레미야의 눈이 번쩍였다.

* * *

눈을 뜬 성녀는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몽롱한 눈빛과 비틀거리는 몸.

“루미에르.”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루미에르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저 시선.

제냐는 그녀와 마왕에게는 관심도 없는지 오로지 루미에르만을 쳐다보고 있는 성녀를 향해 욕을 짓씹었다.

집착에 가까운 시선이 매우 거슬렸다.

“저기요?”

여기도 관심을 달라고 손을 마구 흔들자 마왕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제냐를 쳐다봤다.

“그럼 뭐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제냐의 물음에 마왕이 그 손을 붙잡아 내리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뭘 해야 하나?”

“그럼 이렇게 두고 보자고요?”

마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잘나신 용사 나리에게 맡기는 건?”

빈정거림이 가득한 그 말투에 제냐가 발끈했다.

“폐하를 앞에 두고도 다른 데 시선을 돌리다니, 너무 존재감이 없으신 것 아닌가요?”

“내가?”

마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손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하지만 제냐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네. 그러고 보면 늘 그랬던 것 같네요. 둘이 같이 있으면 더 시선이 가는 건 루미에르잖아요.”

딱 봤을 때 아무래도 더 반짝거리는 건 루미에르가 아닌가.

제냐의 당당한 발언에 마왕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건 너무 사견이 아닌가? 네 취향이 저건가 보지.”

으득, 이를 가는 마왕의 서늘한 얼굴을 쳐다보던 제냐가 코웃음을 쳤다.

“아니요. 굳이 취향을 따지자면…….”

마왕을 힐끗 쳐다보자, 그가 뭐냐는 듯 눈썹을 세웠다. 역시 얼굴은 이쪽이 더 취향인데.

물론 마왕에게 이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 그럴 때도 아니었고.

제냐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하실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긴, 나는 양보해 주는 거지.”

양보? 무슨 양보?

“지금 성녀는 그 누구보다도 솔직할 거야.”

“그게 무슨…….”

“정신적으로 많이 헤집어져 있을 테니까.”

머리를 톡톡 건드리는 마왕에 제냐가 눈을 좁히자 그가 보란 듯 루미에르가 있던 곳을 가리켰다.

“봐 봐. 용사는 오히려 반기는 분위긴데.”

그 말대로, 루미에르는 꺼리는 기색 없이 성녀를 쳐다보다가 이제는 아예 먼저 그녀에게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뭘 하려고?’

제냐가 불안한 기색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ㄹ…….”

제냐는 튀어나올 것 같은 부름을 삼켜 냈다. 루미에르가 선택했다면, 그냥 지켜봐 줄 필요가 있었다.

애써 불편함을 참아 내는데 루미에르가 성녀의 앞에 멈춰 섰다.

“어머니.”

그 부름에 성녀가 똑바로 루미에르를 바라보고, 이내 그녀의 손이 앞으로 뻗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