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고 따뜻한 눈을 한 마왕이라니, 잘못 본 게 아닌가? 애써 부정해 봤지만 아무리 외면해도 눈앞에 있는 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민망함에 괜히 툴툴거리는데, 마왕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선택이 틀리지 않았군.”
“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서 되묻는데, 마왕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슬퍼 보이기도 하는 것 같…….’
그러나 제냐가 미처 생각을 마칠 틈도 없이, 마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신을 차렸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떠올리며 고개를 돌리는데, 눈 위로 손바닥이 덮였다.
“…뭐 하세요?”
제냐는 그녀의 코 위를 전부 덮은 커다란 손 밑에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말했잖아. 보석이 폭주 중이다.”
간지러우니까, 그만 깜빡거리라는 마왕의 지적에 제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귀찮은 물건이네요.”
“그래, 인간이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딴 걸 저렇게 소중하게 목에 걸고 있는 여자가 이상했고, 동시에 그게 왜 인간계에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마 마왕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 물건이 왜 여기 있는데요?”
딱히 답이 돌아올 거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는데, 돌아온 답은 괴상했다.
“괴짜가 마계에만 있는 건 아니겠지.”
“네?”
마왕이 한숨을 쉬며 그녀의 귀 뒤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천족은 인간계에 관심이 없어. 다들 자기들 신을 찬양하고 정신을 수양하느라 바쁘지.”
천족. 미지의 영역에 속한 것들로, 종종 인간계에 나타나는 마족들과 달리 책이나 기록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더 신성시되는 건데.’
지금 마왕의 입에서 나오는 천족들은 좀 이상했다.
“완전 광신도가 따로 없어. 맑은 눈을 한 광인이라고.”
“네?”
“눈이 너무 맑으면 소름이 끼친다는 거 알고 있나?”
아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마왕도 자기가 말이 다른 곳으로 샌 걸 모르지는 않는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아무튼, 너무 그래서 미친 건지, 아니면 하나가 변덕을 부린 건지. 저걸 떨어트린 거야.”
“어…….”
그러니까 결국 본인도 잘 모른다는 소리 아닌가?
“물론 인간은 저걸 완벽하게 다룰 수 없어. 저건 성력이 아니라 다른 게 필요……?”
줄줄 이어지던 설명이 뜬금없이 끊기고 침묵이 이어졌다.
눈은 가려진 채, 말도 들려오지 않으니 이상했다. 제냐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왜 말을 하다 마세요?”
그러자 천천히 마왕의 손이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갔다.
“손은 갑자기 왜 떼시는데요?”
멀어지는 손에 제냐가 마왕을 쳐다보는데, 그가 매우 진지한 얼굴로 제냐를 쳐다봤다.
“네가 가진 힘이 늘 궁금했었지.”
“네?”
어리둥절한 제냐의 얼굴에도 마왕은 무언가에 집중한 듯 흐릿한 눈을 했다.
“그래. 인간이 마족이 돼서 마왕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제냐가 마왕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폐하, 혹시 홀리셨어요?”
하지만 마왕은 제냐가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만약 아니면?”
아주 정신없어 보이는 게, 지하에서 반쯤 꿈을 헤매던 모습과 비슷했다.
“어차피 인간이니까, 그냥 아무 신관이나 하나 데리고 오면…….”
하지만 또 이런 식으로 그녀와 눈을 맞추는 걸 보면 제정신이 맞는 것 같은데.
“폐하?”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마왕을 부르는데, 그가 돌연 맑은 눈을 하고 제냐에게 미친 제안을 했다.
“너 저 보석 좀 제대로 쳐다봐 봐.”
“…네?”
맑은 눈을 한 광인이 바로 여기 있었다.
‘농담인가?’
하지만 마왕의 얼굴에서는 농담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역시.’
제냐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짜악-!
소리가 울려 퍼지자 경악하는 목소리.
“폐, 폐하의 뺨을?!”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의심하는 목소리.
“잘했어요. 그런데 무슨 짓을 했길래 때린 겁니까?”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차례로 따라왔다.
“…왜 때리는 거지?”
마왕이 돌아간 얼굴을 천천히 돌리다가 뺨을 손으로 붙잡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을 한 마왕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제냐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마왕이 뺨을 문지르던 손을 내리며 혀로 볼 안쪽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때려 놓고 그런 걸 묻는 건가?”
조금 전과 달리 평소와 똑같은 마왕의 눈빛에 제냐는 안도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손을 내리며 답했다.
“홀리신 줄 알았어요.”
“…….”
네가 미친 것 같았다는 그 말에 마왕이 할 말 많은 얼굴로 제냐를 쳐다봤다. 하지만 제냐는 당당했다.
“혼자서 중얼중얼거리시는 게 딱 그때 같았어요.”
어떻게, 폐하를! 제냐, 우리 화해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
뒤에서 시끄러운 레라지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끗 그곳을 쳐다보자 레라지에가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레라지에를 루미에르가 귀찮다는 듯한 손으로 붙들고 있었고.
제냐는 걱정스레 그녀를 쳐다보는 루미에르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이고는 다시 마왕을 쳐다봤다.
그러자 계속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마왕이 곧장 시선을 맞춰 왔다. 제냐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금 하신 말 좀, 제대로 설명해 주실래요?”
그러고는 어느새 깨끗해진 시야 너머, 멀지 않은 곳에서 이제 완전히 눈을 뜬 성녀를 가리켰다.
“이제 정말로 정신을 차린 것 같거든요.”
“…루미에르.”
짜증 나게 정신을 차리자마자 루미에르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냐가 서늘한 눈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 * *
제레미야는 마법사 진의 도움을 받아 마족들의 눈을 피해 신전 한쪽에 자리한 건물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이쪽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일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여자가 등장하고 나자 마족들은 마구 검을 휘두르다가도 고개를 들어 여자를 올려다보며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고는 흥이 식은 얼굴로 투덜투덜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정말 죽일 생각이 없는 건가?’
어째서? 마족은 인간을 죽이고 학살하는 존재가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아스트리아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제일 말이 안 되잖아.’
복잡한 마음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사이 주변에 보호 마법을 전부 친 마법사가 제레미야의 옆으로 다가왔다.
“일단 지금은 안전한 것 같습니다. 뭐, 붙잡혀도 죽이지는 않겠지만…….”
제레미야는 아까부터 계속 떠들고 있던 마법사 진을 돌아봤다.
“정말 죽이지 않는다고?”
“네! 명령을 받았다고, 아까 들으셨잖아요?”
마족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그러나 진의 얼굴에는 믿음이 가득해 보였다.
“마족들에 대해 잘 아나?”
그러자 태연하게 답을 하던 진이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요?!”
그러고는 서둘러 변명을 시작했다.
“마족에게 협력하고 그런 게 아니라, 협박을 받아서.”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휘젓던 진이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제가 여기에 계…….”
그러더니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심장을 부여잡는 것이다. 하얗게 질리는 진의 얼굴에 제레미야는 곧장 그에게 무슨 제약이 걸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당연한 거지.’
조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제레미야는 최대한 답을 얻어 내 보기로 했다.
“아스트리아에 대해서는 잘 아나?”
“아스트리아…, 그러니까 제냐 말이죠?”
“그래, 제냐.”
반색하던 진이 눈을 굴리다가 답했다.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는데… 그,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러 호의에 찬 미소를 지은 제레미야가 제일 궁금했던 걸 물었다.
“어때 보였지? 핍박을 당한다던가, 협박을 당하는 것처럼 보였나?”
잠깐 봤을 때는 그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런 미친 마족 놈이 하나일 리는 없었다.
“아니요? 오히려 협박을 하면 했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 진은 믿지 못하겠다는 제레미야의 표정에 얼른 말을 더했다.
“진짠데요? 성격이 장난이 아니라서, 그리고 배경이 어마어마하니까. 루미에르만이 아니라 마… 읍.”
무언가에 막힌 듯 목을 부여잡던 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 아무튼 제일 발언권이 높아 보였습니다! 아무도 쉽게 무시하지 못해요.”
“…그래?”
“네!”
확신에 가득 찬 얼굴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그건 다행이네.”
진이 제레미야의 눈치를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큰 도움이 됐어.”
진심이었다. 보이던 그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면 그걸로 됐다고…….
‘정말 된 건가?’
마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그런 미친놈이 분명 더 있을 텐데. 마왕에게 납치를 당했다면, 좋은 취급을 받을 수가 있었을까?
‘아니, 아니야.’
그럼 이대로 됐다고 넘어가는 건,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일까?
‘하지만 루미에르가 함께 있잖아.’
그러니 앞으로는 정말 괜찮지 않을까?
‘루미에르.’
그가 어떻게 마족들과 손을 잡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일시적인 건지, 앞으로도 계속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 일이 앞으로 나라에 어떤…….
자연스레 정치적인 계산을 하던 제레미야가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또.’
아무리 아스트리아를 걱정한다고 해도, 제일 중요한 건 또 이런 거라서.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네.”
“네?”
이 마법사가 할 수 있는 답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최대한 순화해서, 돌려서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대가 생각했을 때, 이번 일이 끝나고 나서 이곳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아.”
제레미야에게는 마족들의 폭력성과 공격성이 신전만을 향할 거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제국은 앞으로도 무탈할 것 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