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아악-! 거친 바람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고 제냐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땐, 그녀의 앞에 또다시 새빨간 형상의 무언가를 손에 쥔 루미에르가 서 있었다.
“제냐, 괜찮습니까?”
조금 놀라긴 했지만 몸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는 궁금증이 더 컸다.
‘도대체 저번부터 저건 뭐야?’
하지만 질문을 할 틈도 없이 큰 굉음이 잇따라 들려오자 제냐는 질문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이동하겠습니다.”
제냐는 그녀에게 눈을 맞추는 루미에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그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발이…….’
이제까지 그저 느낌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저어됐다면 지금은 정말 실제로 발이 매우 무겁게 느껴졌다.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강하게 짓누르는 느낌.
제냐는 내디디기 힘든 발을 억지로 뻗었다. 루미에르가 앞에 서 있는데도 너무 힘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제냐는 입술을 깨물며 코너를 돌아 문제의 복도에 진입했다. 바깥으로 튀어나온 조각들로 인해 짐작했던 거지만 복도 안쪽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바닥 조심해요.”
“…네.”
바닥 여기저기 퍼진 나무 조각과 정체 모를 하얗고 검은 가루들을 지나가면서 제냐는 숨을 가다듬었다.
복도에 있는 여러 개의 문 중 딱 하나 박살이 나 있는 문이 보였다. 누가 봐도 여기가 바로 목적지라는 걸 알려 주는 모양새였다.
‘겁먹지 말자.’
시커멓다가 허옇게 번쩍거리는 공간이 꺼림칙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가야 했다.
“들어갈까요?”
제냐는 본능적으로 차오르는 공포를 숨기며 시커먼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돌아보는 새빨간 눈을 마주했다.
커다란 날개와 뿔을 드러낸 채, 그녀를 돌아보는 마왕.
위협적이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으나,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는 마왕의 눈빛에는 의아함과 걱정이 담겨 있어서.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 누굴 걱정해?’
성력 앞에 서 있는 건 자기면서.
“뭘 그렇게 보세요? 못 볼 사람 본 것처럼.”
부러 삐딱하게 내뱉은 말에 미간을 찌푸리던 마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가라니까, 말은 더럽게 안 들어.”
제냐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마왕을 쳐다봤다. 진실을 밝히고 난 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한 건 마왕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게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이었고.
제냐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그러자 마왕의 얼굴에 난생 처음 보는 온화한 온기가 듬뿍 담긴 미소가 머물렀다.
그리고 돌아온 답에.
“그래, 도와줘.”
제냐에 입가에 그녀도 눈치채지 못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르바스.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은 작은 소리와 함께 제냐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마왕에게로 다가갔다.
* * *
솔직히 도와준다고 말해 놓고도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었다. 스스로가 무능력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딱히 마왕을 도와줄 방법이 생각나진 않았다.
‘그 이후로 어디 더 다친 것 같지도 않은데.’
제냐는 생긴 것과 달리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검은 안개를 지나 마왕의 옆으로 다가갔다.
물론 정말 당연하게도 마왕은 루미에르가 그에게 다가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뭐 하는…, 제냐?”
뒤에서 루미에르가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마왕을 한 번, 간절하게 제냐를 한 번 불렀다.
제냐는 단호한 마왕의 얼굴에 루미에르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다시 일렁거리는 붉은빛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마왕 편을 들어 줘야지.’
그래 봤자 둘 모두에게 좋은 선택을 한 거였지만.
‘괜히 옆으로 왔다가 한 대 맞으면 어떡해?’
제냐의 뜻에 루미에르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조금 어린애 같은 반응이긴 했지만, 배신감을 드러낸다거나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억지로 다가오려고 하지도 않았고.
‘신기하네.’
조금 전에 나눴던 대화 덕분인 걸까? 의외라는 듯 루미에르를 쳐다보는데, 옆에서 조금은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쳐다볼 거면 옆에 있지 그랬어?”
뼈가 담긴 그 말에도 제냐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마왕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질문을 던졌다.
“지금 반대쪽에 있는 사람, 성녀 맞아요?”
그 물음에 삐딱하게 솟아 있던 마왕의 눈썹이 내려왔다.
“맞아.”
순식간에 온기가 사라진 얼굴에는 서늘함이 감돌았다. 제냐가 마왕의 시선을 따라 앞을 보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희가 왔는데도 조용하네요.”
그들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반응을 보인 마왕과 달리 성녀는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들이 뿌려 댄 힘들 때문에 앞이 좀 뿌옇고 시커메서 얼굴을 확인하긴 힘들지만 누가 왔다는 걸 모를 정도는 아니었는데.
제냐의 의문에 마왕이 비웃음을 흘렸다.
“보석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 같더군.”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은데, 마왕이 보란 듯 뿌연 형체를 가리켰다.
“보석의 힘을 빌려 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휘둘리고 있는 거였어. 뭐, 처음에는 빌려 오는 게 맞았을지도 모르고.”
멍하게 풀린 표정이 볼만하다고, 중얼거리던 마왕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한마디로 지금, 자기가 휘두르는 힘을 갈무리하기에도 급급하다는 거야.”
그 말에 제냐가 고개를 쭉 들어 마왕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엉망이 된 성녀와 달리 마왕이 너무 멀쩡한 게 마음에 걸렸다.
“폐하는 괜찮으시고요?”
혹시 또 보석에 당한 거라면 뺨을 날려 줄 생각으로 손을 번쩍 치켜드는데 마왕이 홱 고개를 틀어 그 손을 피했다.
“괜찮으니까, 손 치워.”
제냐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마왕을 쳐다봤다.
“앞으로도 괜찮으실 것 같으세요?”
그러자 마왕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당연한 걸 왜 묻지?”
왜 묻냐니? 제냐가 질문으로 답했다.
“도대체 왜 도와주겠다고 한 말에 알겠다고 하신 거예요?”
혼자서 알아서 할 수 있는데, 질 것 같지도 않으면서 그녀의 제안은 왜 받아들였단 말인가?
제냐가 눈을 찌푸리는데 마왕이 짓궂게 웃었다.
“도와주겠다는 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언제부터 예의를 지켰다고? 제냐가 고개를 돌려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어느새 그의 옆에는 레라지에가 붙어 있었다.
쯧, 혀를 찬 제냐가 다시 마왕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길 수 있으신데, 왜 이러고 계세요?”
이건 너무 시간 낭비가 아닌가? 제냐가 눈을 좁히는데, 마왕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발버둥 치는 게 재밌잖아.”
진심이 듬뿍 담긴, 증오가 뚝뚝 떨어지는 그 답에 제냐가 질색을 했다.
“…성격이 정말 왜 그러세요?”
“몰라, 그 녀석 말대로 배운 거 없이 자라 그런 모양이지.”
그렇게 말하며 루미에르를 쳐다보는 마왕에 제냐가 눈을 굴렸다. 루미에르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진 않은 것…….
‘엇비슷하긴 했지.’
뒤끝도 기네. 속으로 꿍얼거리던 제냐가 한숨을 쉬는데, 마왕이 물었다.
“그래서 너는 왜 돌아왔어?”
제냐가 힐끗 마왕을 쳐다보며 답했다.
“그냥 오고 싶어서요.”
마왕이 문밖을 눈짓했다.
“마족들은 안 말리고?”
하, 이게 내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마왕이 느꼈던 감정인 걸까? 이렇게 속이 훤히 보이게 떠보다니.
제냐가 보란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멍청하신 것도 아니면서 왜 또 확인하세요?”
허? 황당하다는 헛바람에 제냐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레모리 공작님 부르셨잖아요.”
그리고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얼른 베리스 백작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그런데 베리스 백작이 따라와서 좀 귀찮았어요.”
허탈해 보이던 마왕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상궂어졌다.
“걔가?”
제냐가 비난 가득한 눈초리로 마왕에게 물었다.
“설마 폐하께서 허락하신 건가요?”
그러자 마왕이 눈으로 욕을 뱉었다. 제냐가 의심 따위는 한 적도 없다는 양 순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돌아가면 혼 좀 내 주세요.”
그러고는 마왕이 말을 더 꺼내기 전 손뼉을 치며 줄줄 말을 쏟아 냈다.
“눈을 까뒤집고 징그럽게 웃으면서 저랑도 놀고 싶다고 하더라니까요? 제정신이 아니…….”
“뭐?”
마왕의 주위로 시커멓게 피어나는 기운을 보면서도 제냐는 겁을 먹지 않았다.
저게 자신을 해칠 일 따위가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으니까.
그래서 부러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루미에르가 많이 패 줬는데 성에 안 차요. 제가 이거 도와드릴 테니까, 폐하도 저 대신 복수해 주세요.”
보란 듯 주먹을 들어 올리자 마왕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베리스를 또 엿 먹일 방법을 찾아낸 제냐가 만족스레 웃다가, 혹시나 하는 얼굴로 마왕을 쳐다봤다.
“그런데 고작 베리스 백작 혼내시는 걸로 제가 도와주는 걸 전부 퉁 치시는 거 아니죠?”
베리스야 제멋대로 내려온 것이니 원래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는 않겠지?’
제냐의 시선에 마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또 뭘 원하는데.”
그 말에 제냐가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직 생각 안 해 봤어요.”
“하아.”
마왕이 손으로 눈을 덮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꼭 그 얼굴이 육아에 찌든 부모의 것 같아서 괜스레 찔린 제냐가 목소리에 힘을 줬다.
“왜요?”
평소 유치하게 구는 건 똑같으면서 저 반응은 뭐란 말인가? 일부러 눈에 힘을 주며 마왕을 쳐다보는데, 돌아온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분명 한심하다는 투의 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손바닥 아래로 보이는 마왕의 눈빛은 다정했고.
“정말 많이 바뀌었다 싶어서.”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