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가 마르바스의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 일렁거리던 마력은 여자가 빈정거리며 클레어를 입에 담은 순간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 힘에 반응하듯 성녀가 성력을 가득 뿜어내고, 그에 따라 성기사들도 본인들의 성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력과 성력이 서로 부딪치며 힘겨루기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이 마르바스를 이길 수는 없었다.
레라지에가 하나둘 성기사들을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힘의 균형은 더욱더 한쪽으로 쏠렸다. 그러니까 당연히 마르바스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해야 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여자의 성력은 처음과 같이 강력했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해진 느낌이…….’
성기사들이 내뿜는 힘이 사라졌음에도 성녀가 마르바스의 힘을 버텨 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처음의 흥분이 잦아든 마르바스가 성녀를 유심히 살피다가 그 이유를 발견했다.
성녀의 목에 걸린 저 보석.
‘그래, 천계의 물건이라 그거지.’
성력을 증폭시켜 주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무슨 능력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성녀는 양손으로 그 목걸이를 꽉 그러쥐고 있었다.
마르바스는 처리한 성기사들을 마법을 이용해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는 레라지에에게 곧장 보석의 위험성을 알렸다.
“저 보석에는 현실 같은 환각을 보게 하는 힘이 있어.”
“…네?”
“우리 같은 마족들은 제냐가 아니면 깨어나기 힘들어.”
“…주의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녀가 눈을 번쩍 뜨고 마르바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들을 덮쳐 오는 기운.
화악-! 퍼지는 무형의 기운을 잡아챈 마르바스가 펄럭! 크게 날개를 휘두르며 마력을 뿜어냈다.
그러자 무섭게 다가오던 힘이 방향을 잃고 흐지부지 흩어져 나갔다.
공격이 실패한 것을 느낀 성녀가 미간을 좁히며 성력을 더 강하게 퍼트렸다.
‘저 보석을 깨기 전까지는 이 상황이 지속되겠군.’
보석에 홀리지 않으면서도 보석에 집중해야 했고, 또 옆에서 아른거리는 성력까지 신경 써야 했다.
‘성가셔.’
죽여 버릴 수 있으면 차라리 쉬울 텐데.
‘빌어먹을 용사.’
제냐만 아니었다면…….
마르바스가 턱에 힘을 주며 다시 한번 크게 힘을 뿜어냈다.
* * *
루미에르와 너무 시간을 지체한 탓일까? 제냐는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뭔가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달까? 제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기분이 좀 이상해요.”
“네?”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하고.”
제냐가 팔을 양손으로 감싸자 루미에르가 걱정스레 말했다.
“완전히 가려 주지는 못하는 모양이에요.”
“역시 마왕이 지금 날뛰고 있는 거죠?”
“네.”
“하아.”
제냐가 이제까지 마왕의 힘을 아예 느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막 전투가 끝나고 나서 뿔과 날개를 드러낸 마왕은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넘쳐흘렀으니까.
그런데 그런 마왕이 화가 난 상황이라면…….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지금 루미에르와 그녀는 사지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제냐가 미간을 좁히는데, 루미에르가 물었다.
“많이 불편해요, 지금도?”
루미에르가 뭔가 조치를 한 건지 아까보다는 좀 나았다. 그래도 여전히 본능은 저 앞으로 가면 안 된다고 속삭이고 있었지만.
“성녀를 찾지 못한 걸까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제냐는 설마,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제냐는 마왕이 성녀를 쫓아간 순간, 당연히 성녀가 마왕에게 붙잡힐 거라 여겼다.
마왕은 능력만큼은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아직까지도 성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루미에르에게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제냐가 한숨을 삼키는데, 루미에르가 담백하게 말했다.
“마력만큼이나 성력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으니까 마주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했다.
‘그 성력의 주인공이 성녀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냐가 불편한 가정을 무시하려 애쓰며 루미에르에게 물었다.
“성력도 느낄 수가 있어요?”
“음, 많이 봐 왔고, 느껴 봤으니까요.”
“누가 이기는 것 같은데요?”
“막상막하 같아요.”
성녀가 그렇게 강하다고?
‘말도 안 돼.’
불신이 고개를 들었다. 물론 성녀는 인간계에서 매우 유명한 존재였다. 신전 하면 자연스레 성녀가 떠오를 정도로.
하지만 성녀는 신전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을 뿐. 그녀가 대단한 성력을 가졌다거나, 엄청난 무위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정말이냐고 되묻기 전, 루미에르가 제냐의 팔목을 붙잡았다.
“거의 다 왔어요.”
진중한 루미에르의 얼굴에 제냐가 물었다.
“위험할 것 같아요?”
“마력과 성력을 이용해 무식하게 싸우고 있는 상태고, 싸운 지 꽤 됐으니까 둘 다 힘이 빠졌겠죠.”
설마, 이런 거를 다 계산해 놓고 일부러 그녀를 끌어안고 시간을 지체한 걸까?
‘그런 것치고 너무 진심으로 끌어안고 있긴 했는데.’
제냐가 눈을 가늘게 뜨는데, 루미에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실 성력은 저나 제냐에게 문제가 되지 않잖아요.”
“그건 그렇죠.”
성력이 위험한 건 오로지 마족뿐이었다.
“그리고 마왕이 저는 몰라도 제냐는 공격하지 않을 테고?”
“…그럼 내가 앞으로 나설까요?”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혔을 루미에르가 앞으로 나섰다가는 마왕이 일부러 날린 공격에 맞을지도 몰랐다.
어떻냐고 눈을 반짝이자 그가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 뭐.”
“그래도 괜찮아요.”
사락, 간지럽게 제냐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준 루미에르가 그녀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이제 가 볼까요?”
“네.”
“혹시 모르니까 홀리지 않게 조심하고요.”
“네, 루미에르도요.”
“하하. 안 맞으려면 조심해야겠네요.”
“…네?”
루미에르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엄청 아프게 때리더라고요. 아마 많이 아팠을 거예요.”
쫙 손을 펴 보이는 루미에르에 제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지금 마왕 때린 거 말하는 건가?
“뭐, 지켜보는 건 재밌었지만. 제냐도 재밌었죠?”
그렇지 않냐고 짓궂게 묻는 루미에르에 제냐가 얼떨결에 답했다.
“…조금은.”
말해 놓고도 지금 분위기에 이게 맞나 싶었는데, 루미에르가 톡톡 그녀의 입가를 두드렸다.
“음, 안 통했어요?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요. 내가 있잖아요?”
어색하다.
‘왜 이래?’
제냐가 바짝 얼어 그를 쳐다봤다. 갑자기 루미에르가 굉장히 어른스러워 보였다.
말투나 행동은 평소와 비슷한데, 뭔가 표정이나 눈빛이 좀 더 차분하고 부드럽달까.
원래도 무력적으로 많이 의지하는 편이었지만 동시에 조금 어린애같이 느껴지는 게 있었는데, 지금의 루미에르는 마치…….
‘갑자기 왜지?’
뭐가 변한 걸까? 그냥 내 착각인 건가?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굴리자 루미에르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이상해요?”
그는 제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녀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루미에르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했거든요.”
“네?”
크흠, 목을 가다듬은 루미에르가 조금 더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좀 어리게 보여야, 제냐가 나를 봐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뭐라고?
“처음 만남이 그렇기도 했고, 나를 언제든 보내 버릴 생각인 것 같으니까. 손이 가는 것 같으면, 계속 신경 써 줄 테고……. 그럼 계속 옆에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게 무슨 소리야? 제냐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연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자 루미에르가 그녀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
“처음부터 의식하고 한 건 아닌데, 인간계로 올 때쯤에는……?”
황당해하는 제냐의 얼굴에 루미에르가 변명하듯 말을 더했다.
“그게 제 모습이 아닌 건 아니에요. 지금 이 모습도 원래 제 모습이 맞는 것처럼.”
손을 가만히 못 두고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또 그녀가 아는 모습이 아예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 모습은 저도 처음 보는 모습이긴 했는데. 정말 그때 너무 평화롭고 좋았거든요.”
제냐가 빤히 그를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횡설수설했다.
“그, 정말인데요. 그냥,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나를 챙겨 주는 사람이 있는 게 좋았어요. 원래 나는 뭐든 혼자서 해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잠시 허공을 쳐다보던 루미에르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맘 편히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게 좋았고, 게으름 피우는 것도 좋았어요. 그래서 어리광을 부린 거예요.”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눈치를 보던 것과는 달리 똑바로 제냐를 쳐다보며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어리광을 부리지 않아도 제냐가 제 곁을 떠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 눈에 담긴 믿음을 마주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물론 앞으로도 종종 그런 모습을 보이긴 할 텐데. 그래도 지금은 그럴 때는 아니니까.”
루미에르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서로 도와줄 수 있는 사이면 좋겠다는 거예요.”
제냐는 마지막 말과 함께 그녀의 앞에 내밀어진 루미에르의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건 고백인가?’
드디어? 하지만 달달하긴 해도, 이걸 또 고백이라고 여기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다시 물어볼까?’
아니, 그러면 분위기 깨는 거 아니야? 그래도 뭐든 확실히 하는 게‧…….
그러나 제냐의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퍼어엉-!
커다란 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끊어 냈기 때문이었다.
‘제발, 타이밍 좀!’
제냐가 신경질을 내며 복도 너머를 바라봤다. 분명 깨끗하던 복도에 나무 조각처럼 보이는 뭔가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저게 뭔가, 눈을 좁히는데, 루미에르가 제냐의 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