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의 뒤를 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몰래 움직이는 성녀가 성력을 쓰지도 않을 테니 그녀가 있는 곳을 특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신전에 저런 공간까지 만든 걸 보면, 필시 또 다른 비밀 공간이 존재할 터.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뒤집고 때려 부숴도, 성녀의 방에서는 별다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없다고?’
그럼 도대체 어디로 향했단 말인가? 이대로 이렇게 놓쳐 버리면…….
자연스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용사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실수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 이 일을 바로잡을 기회는 충분했는데…….
성녀가 도망갈 틈을 벌어 준 그놈에 대한 역겨움이 밀려왔다.
퍽-!
마르바스의 발에 차인 책상이 박살이 나며 우르르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마법을 치고 방으로 들어오던 레라지에가 자리에 멈춰 섰다.
“폐하.”
그 차분한 부름에 마르바스는 스스로의 숨소리가 너무 크다는 걸 깨달았다.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소리는 매우 거슬렸다. 마르바스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흔적을…….’
화풀이를 해 봐야 바뀌는 것은 없으니까. 그러니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 들려온 레라지에의 목소리.
“숨어 있던 신관을 발견했습니다.”
신관 하나가 뭐? 마르바스가 관심을 주지 않자 레라지에가 설명을 더 했다.
“제가 알기론 성녀의 최측근입니다.”
그렇다면 말은 달라졌다. 마르바스가 별다른 말 없이 몸을 돌려 레라지에를 쳐다봤다. 그러자 문밖에서 마법에 묶인 신관 하나가 질질 끌려왔다.
마르바스는 신관이 그의 앞에 도착하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신관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는 서늘하게 물었다.
“어디로 갔는지 말해.”
콱, 목이 잡힌 신관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했다. 확장된 동공과 가냘픈 숨소리, 잡힌 목줄에서 느껴지는 가쁜 고동.
극한의 공포에 몰린 신관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같이 꼴딱거리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요, 용사가 너를 멸할 것이다!”
하지만 신관이 한 말은 마르바스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다.
운도 없지.
왜 많고 많은 놈 중에 또 용사를 입에 담았을까?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의식적으로 감정을 가다듬던 마르바스가 결국 그 악감정을 드러냈다.
츠츠츳-
마력이 그의 감정에 동요해 사방으로 따갑게 튀어 댔다. 가까이에서 그 감각을 온몸으로 느낀 신관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흐, 흐억.”
마르바스의 손에 붙잡혀 반쯤 허공에 몸을 띄운 신관이 그의 목을 쥐고 있는 손을 거칠게 긁어 댔다.
마르바스는 그 무의미한 발버둥을 지켜보다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모르나 본데, 너를 지켜 줄 용사는 없어.”
예전에도 지금도. 용사는 오로지 한 사람만을 지키던 사람이었으니까.
* * *
“기도, 기도실로 들어가는 걸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흐느끼며 뱉어 낸 말을 끝으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신관을 내버려 둔 채, 마르바스와 레라지에는 기도실로 향했다.
교황과 성녀, 또는 높으신 분들이 찾아올 때만 오픈되는 기도실은 마르바스도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클레어와 함께 있을 때 교황은 그곳에서 그녀를 맞이하는 일이 잦았으니까.
그렇게 돌고 돌아 도착한 기도실은 평범한 이들에게 오픈되지 않는 공간이라 그런지, 청렴결백하다는 신전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사치스러웠고 화려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문을 활짝 열고 기도실 안으로 들어온 마르바스가 주변을 훑어보다 눈썹을 치켜세웠다.
자잘하게 바뀐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제일 눈에 띄게 바뀐 것이 하나 있었다.
기도실 한가운데에 생긴 저 석상.
조각가가 얼마나 공들여 만들었는지 옷의 질감까지 전부 구현된 듯한 석상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석상의 목에 걸려 있는 저것은…….
주먹보다 살짝 작은 크기의 동그란 구슬처럼 생긴 저것이 바로, 또 다른 천계의 보석이었다.
‘멍청하긴.’
더 제대로 알아봤어야 하는데. 이렇게 대놓고 힌트가 눈앞에 있을 줄은 몰랐다.
비릿한 웃음을 흘리던 마르바스는 더 지체하지 않고 석상에 달린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드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걸이가 길게 아래로 늘어지면서 숨겨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르바스는 옆으로 밀려나는 석상과 그 밑에 자리한 미지의 공간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제가 먼저 가겠습…….”
마르바스는 먼저 앞서 나가려는 레라지에를 손을 들어서 막았다.
“똑같은 거에 두 번이나 당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은데.”
“네?”
레라지에가 의아한 얼굴로 마르바스를 쳐다봤지만 그는 레라지에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보란 듯, 힘을 드러냈다.
몸 전체에 빠르게 퍼져 나간 마력이 화악-! 기도실 전체에 퍼지며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잠시 뒤, 바람이 잦아든 자리에는 커다란 날개와 뿔이 돋아난, 마르바스만이 존재했다.
그들의 앞에 있던 비밀 통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게 무슨…….”
레라지에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비밀 통로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그 석상이 움직인 적이 없다는 양, 똑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바스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천계의 보석으로 숨기고 있었던 걸까? 이제까지 전혀 느껴지지 않던 기척들이 한가득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그를 바라보는 시선.
마르바스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도망가지 않았었나.’
멍청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있었던 걸까. 그도 아니면 이대로 도망가 봤자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뭐가 됐든 마르바스에게는 천운이었다.
마르바스는 수많은 성기사들 뒤에 모습을 드러낸 여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귀한 분이 계시는군?”
빈정거리듯 입을 열자 마찬가지로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레라지에가 몸을 긴장시켰다.
나이가 좀 더 있는 걸로 아는데, 겉으로 보면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우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자주 웃어 자연스레 생긴 주름은 여자를 더 선해 보이게 했다. 하지만 마르바스는 제 아비를 닮은 눈이 얼마나 탐욕스럽게 반짝이는지 알았다.
마르바스는 당당한 척 그를 마주 보는 여자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정말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나.
바로 여자의 정체를 알아본 그들과 달리 여자는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인이 성기사들의 앞으로 걸어 나오며 오만하게 물었다.
“감히, 본신전에 마족이 들어오다니, 귀족인가?”
마족이라는 걸 알긴 하지만, 그가 마왕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하는 게 심기에 거슬렸다.
마르바스를 본 적이 없는 여자이니, 당연히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텐데. 그럼에도 감히 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게 역겨웠다.
‘네가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밟고 일어섰는데.’
그래서 마왕은 대놓고 스스로의 정체를 밝혔다.
“마왕이다.”
마르바스의 답에 성기사 무리의 술렁거림과 함께 성녀의 얼굴에 경악과 의심의 빛이 어렸다. 여인의 시선이 빠르게 마르바스의 얼굴을 훑다가 그의 날개에 닿았다.
“마왕?”
마르바스의 말을 믿는 건지 모르겠지만 금방 감정을 숨긴 여자가 태연한 척 물었다.
“그런 이가 여기까진 어쩐 일로?”
“네 아버지에게 진 빚이 있거든.”
마르바스는 여인이 빠르게 성기사들의 분위기를 훑는 걸 보고 곧장 입을 열었다.
“전대 교황 레온.”
그러자 여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다시 한번 성기사 무리가 동요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밀로 숨겨진 일이었으니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여인이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마르바스를 바라봤다.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재 보는 그 눈빛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간 질척하게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이 순식간에 온몸을 덮었다.
그래서 마르바스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남의 이름을 훔쳐 사는 기분은 어떤가?”
“뭐?”
타박.
마르바스가 성녀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제 아비가 죽인 이복 남매의 이름으로 사는 기분이 어떻냐고 물었어.”
걸음 하나하나마다, 음절 하나하나마다 감정이 배어났고 그에 감응한 마력이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부스슥.
그의 마력에 닿은 바닥이 녹아내리듯 부식되어 사라졌다.
“제 딸한테 자기가 죽인 이복동생의 이름을 주다니, 네 취급도 알 만하지.”
아랫것들의 앞에서 과거가 까발려지는 것이 모욕적인 건지, 아니면 마력 때문인 건지 모르겠지만 몸을 부들부들 떨던 여자가 돌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깔깔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기도실에 크게 울리는 여인의 웃음소리에 성기사들이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참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던 여자가 작게 기침을 하더니 다시 마르바스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묻는 것이다.
“너, 마르바스군?”
그녀가 조금 전보다 여유로워진 얼굴로 말했다.
“안타까워라, 주인 잃은 개가 이를 드러내는 거였구나.”
입을 가리고 웃은 여인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역시 그때 제대로 죽였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멍청했지.”
성녀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는 독기 가득한 얼굴로 속삭였다.
“시체를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 냈어야 했어. 아니면 그 여자 시체라도 붙잡아 박제라도 해 놓을 걸 그랬지?”
그렇지 않아? 노래를 부르듯 속삭인 여자가 돌연 얼굴에서 웃음기를 모두 지우고는 서늘하게 말했다.
“그래야 감히 덤빌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응?”
그 말을 끝으로 시커먼 기운이 기도실을 가득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