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13) (113/145)

그레모리는 망설임 없이 방향을 정하는 제냐를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인간계로 떠나기 전, 대기를 핑계로 엘리고스의 집무실에서 그를 놀려 먹고 있던 그레모리는 목걸이가 부서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결국 부르셨군.”

최악의 순간이 아니고서야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엘리고스가 원하니 어쩔 수 없이 만든 대비책이라는 티를 팍팍 내던 마왕이 목걸이를 부쉈다는 건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했다.

“제냐가 폐하를 버렸을까?”

목걸이가 부서지는 즉시, 대기하고 있던 군대를 인간계로 보낸 그레모리는 좀 아쉬웠다. 아무리 그래도 영혼의 끌림이 있는 한, 선택받지는 못해도 버림받지도 않을 거라고 여겼는데.

영혼의 기억이라든지, 시대를 넘는 사랑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레모리가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엘리고스는 단호하게 그 가정을 잘라 냈다.

“제냐와 관련된 일로 부른 건 아닐 거다.”

“응?”

“그런 걸로 부르실 분은 아니다.”

과연 그럴까? 엘리고스야 심장이 꽝꽝 얼어붙은 냉혈한이니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최악을 가정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겪는 건 다른 일이지 않은가?

“내기할까? 무슨 이유로 부르셨는지.”

그레모리의 장난기 섞인 물음에 엘리고스가 서늘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폐하에 대한 예의를 갖춰라.”

이럴 때면 그레모리는 엘리고스가 참 신기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군림하는 위치에 살아왔던 엘리고스가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레 마왕의 수족이 된 걸까.

물론 그레모리는 마르바스를 마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런 고루한 것들과는 다른 부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왕이 없는 자리에서는 태도가 좀 가벼워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었다. 마왕이 무력적으로 강한 것이야, 인정하는 바이지만…….

‘꼬맹이잖아.’

그레모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권력자였고, 그런 그녀에게 마르바스는 강하기는 하나 아직은 어린 개체일 뿐이었으니까.

뭐, 이런 감상을 이야기하면 엘리고스가 또 냉기를 풀풀 풍겨 댈 테니 굳이 입 밖으로 말을 하진 않겠지만.

“그래서 안 할 거야?”

그레모리가 은근한 미소를 짓자 눈매를 팍 찌푸린 엘리고스가 혀를 찼다.

“…네가 지면, 군대가 인간계에 가서 친 사고는 네가 처리해라.”

그 말에 그레모리가 코웃음을 쳤다.

“예의를 갖추라면서 더 진심인 건 너 같은데.”

“그래서, 안 할 건가?”

도발하듯 그녀를 쳐다보는 엘리고스에 그녀가 할 말은 뻔했다. 엘리고스가 장단을 맞춰 주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안 하긴, 당연히 해야지.’

그렇게 기대를 품고 조금은 늦게 도착한 인간계에서 그레모리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했다.

제냐는 마왕을 선택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왕을 버리지도 않았다.

‘졌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네.’

그레모리는 마왕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하는 제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멍청이들이 많구나.”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과 별개로 일이 늘어나는 건 싫으니, 마족들을 단속해야 했다.

그레모리가 웃던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지상에서 인간들을 상대하고 있는 마족들을 내려다봤다.

“이번에는 또 어떤 교육을 해 줘야 하는 걸까.”

정말이지 멍청한 것들은 딱 질색이었다.

* * *

각자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길. 제냐는 안아 주겠다는 루미에르의 손을 밀어냈다.

이번만큼은 혼자서 움직이고 싶었고, 무엇보다 루미에르의 말에 따르면 마왕은 아직 신전 내부에 있었다.

‘그 말은 성녀도 아직 신전 안에 있다는 거겠지.’

제냐가 그녀를 안내하는 루미에르를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물을까 말까, 제냐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터벅터벅 울려 퍼지는 발소리만 길게 이어지는 공간은 너무 고요했다. 결국 제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거 진심이었어요?”

“뭐가요?”

“벌을 주자는 거요.”

루미에르가 선선히 긍정했다.

“네. 맞아요.”

제냐는 멀리서 들려오는 마족들의 광소를 흘려들으며 물었다.

“정말 죽는 것보다 그게 더 벌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네. 살아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만큼 비참한 건 없잖아요?”

제냐는 이런 말을 하면서도 담백해 보이는 루미에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루미에르는 성녀가 원망스러워요?”

“예전에는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요?”

꼭 루미에르는 성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게 가능한 걸까?

그러나 제냐는 그녀에게 닿는 루미에르의 시선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내 사람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눈에서 넘쳐흐르는 그 감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를 데리러 온 순간, 언젠가는 저 감정에 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제냐의 망설임을 읽은 건지, 루미에르는 달싹거리던 입을 꾹 다물고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제냐는 어때요, 마왕을 용서했나요?”

이 배려를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입을 열어야 하는 걸까.

머뭇거리는데 루미에르가 제냐를 불렀다.

“제냐?”

“아니요. 용서는 못 해요. 그래도 지금까지처럼 일부러 마왕에 대한 감정을 붙잡고 있지는 않을 거예요.”

마왕에 관한 것이야 이미 다 결론을 내린 문제였기에 답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건 너무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니까.”

그러니 제냐는 이제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싶었다. 그녀의 미래나, 루미에르와 같은 것들한테.

제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루미에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냐는 너무 착해요. 그리고 난…….”

음울한 루미에르의 미소를 본 순간 제냐는 결심했다.

‘역시 이대로 넘어가지 말자.’

적어도 제냐에게 루미에르가, 용사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설명해 주고 싶었다.

나도 당신이 소중했다고. 물론 그건 루미에르가 아닌 용사라는 존재에 대한 감정이긴 했지만. 이제는 그게 뭐가 그렇게 다른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정한 제냐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착하다기보다는 이제는 살 만해서 그런 거예요.”

“네?”

“옛날에는 그 감정이라도 부여잡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거든요.”

정말 죽어 버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점점 흐려지는 기억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마왕성에서 표류하고 있는 스스로가 무가치하게 느껴지던 때.

조종당해 움직이는 인형처럼 감정도 뭣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던 그때, 제냐는 그럼에도 발버둥을 쳤다.

“나를 붙잡고 있던 게 증오와 원망이었던 거죠. 그러다가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변했어요.”

“저요?”

놀란 것 같은 루미에르를 보며 제냐 편안하게 웃었다.

“희망이 있다는 건, 그리고 그 희망이 실현될 거라는 기대는 사람을 살게 하죠. 그건 원망과 증오와는 다른, 훨씬 더 대단한 원동력이었어요.”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의 환희. 그 두근거리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야가 바뀌고 나니까 주변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모든 마족이 그렇게 나쁜 놈들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제냐가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뭐, 마족들은 멍청한 짓도 많이 하고 실제로 나쁜 놈도 많아서 금방 사라지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후 제냐는 변했다.

“괜찮은 마족들도 있었고, 나는 점점 더 마음을 열었던 것 같아요.”

사람답게 살기 시작했다. 앞날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과 많이 다른 사람이었을 거예요.”

그러니, 이제 생각해 보면 루미에르는 진작에 제냐를 구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란 존재가 내게 끼친 영향력이 엄청났다는 거죠.”

이걸 당사자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도 꼭 해야 하는 말이니까.

“남들이 내가 착하다고 여길 수 있게 여유가 생긴 건 전부 당신 덕이니까.”

제냐는 작게 볼을 긁적였다.

“지금은 남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붙잡고 있지 않아도 내 힘으로 서 있을 수 있고. 이제 그 짐을 덜어 내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뭔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너무 섞여서 처음의 의도를 좀 벗어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말하고 나니 속은 시원했다.

루미에르가 너무 빤히 쳐다봐서 좀 민망했지만.

제냐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래서 흐려지는 원망과 증오를 이제는 붙잡지 않을 거예요. 세상에는 다른 좋은 감정도 많잖아요?”

희망과 기대, 그리고…….

작게 입술을 달싹이는데, 와락, 몸이 끌어안겨졌다.

“제냐, 너무 좋아요.”

순식간에 루미에르의 품에 안긴 제냐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점점 더 몽롱하게 풀리는 푸른 눈을 봤을 때부터, 루미에르가 몇 번이고 손을 들어 올렸다 주먹을 꽉 쥐는 걸 봤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루미에르의 쿵쿵 뛰는 심장이 그의 벅찬 감정을 전부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이야기 다 안 끝났는데.’

눈을 굴리는데, 루미에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정말 좋아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자니, 이걸로도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너무 분위기 탔지?’

더 이상 나쁜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아까처럼 외로운 얼굴을 하지도 않았고.

나머지는 제대로 일을 다 끝내고 나서 해도 될 것 같았다.

‘일단 마왕에게 가고 있었잖아.’

완벽하게 이번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 다시 한번 솔직하게 말을 해 보는 거다.

뭐, 그래도 밀어내는 건 좀 그러니까…….

조금 숨이 막히긴 하지만 따뜻하고, 귓가에서 들리는 좋아한다는 목소리가 싫지 않아서.

제냐는 루미에르가 진정할 때까지 그를 끌어안아 줬다.

누군가 봤다면 또 꼴값을 떤다고 했겠지만, 이곳에는 둘뿐이니 다른 이의 시선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