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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12) (112/145)

조금은 민망했던 제레미야와 제냐의 대화가 끝난 것처럼 루미에르와 베리스의 싸움도 정리되는 모양새였다.

“너무 패는 거 아니야?”

지켜보던 마법사가 질색할 정도로 베리스가 처맞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직, 간접적으로 베리스를 겪어 본 제냐와 한껏 그에게 휘둘린 제레미야는 마법사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더 팼으면 좋겠는데.”

“미친 자에게는 매가 약이지.”

연달아 튀어나온 제냐와 제레미야의 말에 마법사가 눈을 끔뻑거리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황녀 전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런 거지요.”

얼씨구? 내 생각은? 조금 유치한 생각을 하던 제냐는 콰앙-! 주먹이 얼굴을 쳤다고는 믿기 힘든 커다란 굉음과 함께 싸움이 끝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닥에 늘어진 베리스가 기절했음을 깨달은 루미에르가 주먹을 거두며 상체를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제냐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제냐.”

제냐가 따라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않으며 루미에르에게로 다가갔다.

“말 좀 하고 움직이지?”

뒤에서 신경질적인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제냐는 대충 손을 휘저어 답을 할 뿐이었다.

빠르게 루미에르의 앞으로 다가간 제냐는 그의 뒤에 완전히 뻗어 있는 베리스를 쳐다보며 눈을 빛냈다.

‘끝내준다.’

도대체 얼마나 맞은 건지, 상처 회복이 빠른 마족인데도 베리스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인간계에서 베리스를 보자마자 꽉 막혀 오던 숨통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다만, 하나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미우나 고우나 베리스를 챙기는 비네였다. 제냐는 베리스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피는 비네를 조심스레 쳐다봤다.

아무리 베리스가 잘못한 거라고 해도, 꼴이 저 모양이니 화가 났을지도 몰랐다.

“후우.”

비네의 긴 한숨 소리에 긴장이 스멀스멀 몰려오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녀를 돌아보는 비네에게서 적대감은 보이지 않았다.

“미안하다.”

오히려 사과까지 하는 비네에 제냐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자작님.”

늘 고생하는 걸 뻔히 아는데, 네 친구 단속을 못 했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웃겼다. 애당초 둘 중 조금 더 강한 건 베리스였고.

“베리스 백작님 상태는 어떤가요?”

“적당히 봐줬으니, 괜찮아. 얼마 안 있어서 일어날 거다.”

제냐가 놀라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화풀이로 엄청 팬 줄 알았는데, 그게 봐준 거라고?

하지만 시선이 마주친 루미에르는 고운 미소만 흘릴 뿐이었다.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가 됐든 비네가 딱히 악감정을 갖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제냐가 비네를 돌아보며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깨어나서 저희를 쫓아오는 일은 없겠죠?”

의식을 되찾은 베리스가 완전히 미쳐서 그들을 잡겠다고 날뛰는 것만큼 최악은 없었다.

하지만 비네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확신 가득 찬 어조로 답했다.

“없을 거다.”

“으음.”

정말 붙잡아 둘 수 있나? 의심이 고개를 드는데, 비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곧 그분이 오실 테니, 문제없어.”

“네?”

그분?

“마수를 빌려주면서 다들 교육을 빙자한 폭행을 당했…, …여하튼 감히 멋대로 행동하진 못할 거다.”

비네가 질린 얼굴을 했지만 제냐는 거기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녀의 신경이 한 단어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수라고? 제냐의 시선이 하늘 곳곳에 여전히 떠 있는 말을 닮은 마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 마수를 눈에 담는 순간, 떠오른 인물은.

“설마…….”

제냐의 가정에 확신을 더해 주듯 비네가 왼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셨군.”

“아.”

제일 덩치가 크고, 그만큼 아주 크고 강인해 보이는 날개를 지닌 마수를 타고, 하늘 위에 떠 있는 이는.

“그레모리 공작님.”

황금 보관을 쓰고 검은 벨벳 드레스를 입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아래를 굽어살피고 있었다.

마족들이 그레모리가 소중히 여기는 마수들을 타고 내려오는 걸 보면서 눈치챘어야 했는데.

제냐가 놀라서 입을 벌리는데, 비네가 말했다.

“폐하께서 마족들을 단속할 이 하나 보내지 않았겠어?”

그 말대로였다.

아무리 친마왕파라고 해도, 마족은 마족이었다. 그런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흥분한 마족은 제 부모도 못 알아본다지.’

그러니 당연히 그들을 휘어잡을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이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귀족인 베리스와 비네도 일반적인 마족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했지만, 그레모리는 그와 결이 달랐다.

오랜 시간 마계를 지배한 고위 귀족.

그레모리 공작에게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기운에 그녀의 아름다운 적발이 크게 일렁였다.

본래도 참 귀족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마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위압감 넘치는 모습을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제냐가 멍하니 그레모리 공작을 쳐다보는데, 공작이 그들에게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우아한 날갯짓에 바람이 휘몰아치고 먼지가 휘날렸다. 눈을 찌푸리자, 비네가 타이밍 좋게 손가락을 튕겨 그 먼지들을 날려 줬다.

“괜찮나?”

“네, 감사해요.”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가까이 다가온 마수의 모습이 기괴해 보였는지, 마법사가 기겁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건 뭐야?”

다행히 마법사는 괴물이니 뭐니, 헛소리를 내뱉진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레모리 공작의 분노를 살 순 없지.’

힐끗 마법사를 쳐다본 제냐는 어느새 그녀의 바로 앞에 떠 있는 그레모리 공작을 올려다봤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안녕, 그대. 오랜만이지?”

왜 그렇게 저 마수를 아끼나 했더니, 지금 그녀와 늠름한 마수는 매우 잘 어울렸다.

‘그때 마왕성에 왔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을까?’

그레모리 공작의 군대들은 전부 그녀와 똑같은 마수를 탄 기마대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레모리가 고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리고스가 그대 걱정을 많이 하더군.”

안부 인사라는 게 본래 빈말이 좀 많다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엘리고스가 내 걱정을 한다고?’

다른 이들이 했다면 비웃음을 날릴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이가 그레모리 공작이었기에 제냐는 그저 옅은 미소만을 지었다.

그러자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은 그레모리 공작이 말을 정정했다.

“언제나 그대가 돌아와 맡은 일을 해 주길 바라고 있지.”

아, 그런 의미라면.

빨리 돌아와서 자기가 맡은 과중한 업무를 나눠 가졌으면 하는 의미라면 그레모리의 말도 이해는 갔다.

제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레모리가 고개를 돌려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역겹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치는 또 이 꼴이군.”

딱히 사이가 좋지 않은 걸 알고 있긴 하지만,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그…….”

제냐가 은근슬쩍 루미에르를 그녀의 뒤로 잡아당기는데, 그레모리가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뻔하지, 주제를 모르고 덤빈 것 아닌가?”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게 루미에르를 쳐다보는 걸 보니, 아마 그레모리 공작도 진작에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말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구나.’

한숨을 삼키는데, 그레모리가 쯧 혀를 찼다.

“돌아가면 한동안 더 교육해야겠어.”

그러니까 교육을 빙자한 폭행을 하겠다는 건가? 제냐의 짐작이 틀린 것은 아닌 듯 비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베리스를 외면했다. 절대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뻔히 보였다.

그런 비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레모리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튼, 이 뇌가 없는 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 그대는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게.”

그레모리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고.

“물론 저번에도 말했지만.”

익숙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왕이면 이쪽에 이득인 쪽이 좋긴 하네.”

역시 그때부터 정말 다 알고 있었구나.

제냐는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을 끝냈는지, 그레모리가 비네를 돌아보자 그가 휘익-! 휘파람을 불어 마수를 불러들였다.

마수의 등에 대충 베리스를 걸쳐 놓은 비네가 그대로 떠날 것처럼 굴다가 제냐를 돌아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그를 쳐다보는데, 비네가 어느새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있는 루미에르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중에 보지.”

나중에 볼지, 안 볼지는 모르겠지만 제냐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그레모리, 금붕어와 그 똥이 등장만큼이나 갑작스레 사라지고 나자 엉망이 된 주변만이 남았다.

소란의 흔적을 눈으로 훑은 제냐가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공작님이 왔으니까 사고라도 인간이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보내야 할 사람은 보내야 했다.

고개를 돌려 제레미야를 쳐다보자 제냐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챘는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헤어지자.”

딱 제냐가 원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헤어져야 하는 사람은 하나 더 있었다.

“너도 따라가.”

제냐가 마법사를 쳐다보자 그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 나도?”

“그래.”

“설마 나를 이제 와서 버리는 건…….”

“안 까먹고 다시 찾아갈 테니까 기다려. 원하는 대로 점수도 좀 따고.”

제냐가 보란 듯 제레미야를 가리키자 마법사가 목을 가다듬더니, 부정도 하지 않고 제레미야의 옆에 붙었다.

“그럼.”

그러고는 전혀 아쉽지 않다는 얼굴로 서둘러 제레미야를 데리고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마법사가 함께 있으니, 괜찮겠지.’

그러니 이제, 그레모리가 했던 말처럼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일 때였다. 제냐는 자리를 떠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루미에르를 올려다봤다.

“그럼 이제 우리도 가요.”

제냐가 입꼬리를 매끈하게 올렸다.

“당신은 성녀, 나는 마왕을 봐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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