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저건 왜 데리고 온 거야?’
마왕은 어째서 베리스가 인간계로 내려오는 걸 허락한 건가?
‘아니, 저 성격에는 제멋대로 내려왔을지도 모르지.’
비네야 상식 있는 마족이니, 마왕은 당연히 그를 이번 계획에 포함했을 테고 비네가 자기 빼고 뭘 하는 꼴을 못 보는 베리스가 자연스레 일정에 따라붙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걸 짐작하지 못할 마족이 있나?’
그러니까 따지자면 이건 마계에서 상황을 총괄하던 엘리고스의 탓이 아닐까?
제냐가 그렇게 이번 일이 누구의 실책인지 따지고 있을 무렵, 비네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진심으로 베리스의 앞을 막아섰다.
“베리스.”
그러나 베리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오히려 크게 기뻐했다.
“오랜만에 한판 하게?”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손목을 꺾어 대는 모양새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너랑 내가 싸우면 여기가 남아나지 않을 텐데.”
“상관없는데?”
무조건, 무조건 이번 일이 끝나면 마왕에게 저놈이 저지른 일을 보고할 것이라 다짐한 제냐가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비네는 조금 안타깝지만.’
친구를 잘못 고른 건 그의 탓이니, 베리스는 비네에게 넘겨주고 다른 인간들을 도와주러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계속 여기에 있다가는 제레미야에게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제냐는 엉망진창이 된 제레미야의 꼴을 훔쳐보고 마음을 정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본 곳에 루미에르는 없었다.
‘응?’
동시에 콰앙-! 들려오는 커다란 파열음에 제냐는 반쯤 확신이 담긴 얼굴로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봤다.
그리고 제냐는 바닥에 처박혀 루미에르의 발에 머리를 짓밟힌 베리스를 발견했다.
‘바닥이 다 파였네.’
지직.
루미에르의 발이 베리스의 옆통수를 바닥에 세게 짓눌렀다. 굉장히 모욕적인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베리스는 바닥에 얼굴의 반이 처박힌 주제에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진짜 미친놈.’
제냐가 질색한 얼굴로 베리스를 쳐다보는데, 루미에르가 사막같이 건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더러운 마족 놈.”
베리스가 어지간히 신경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쉽게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랑 놀아 주려고?”
돌아오는 베리스의 대답이 이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미에르의 얼굴에서 혐오가 뚝뚝 떨어졌다. 제냐는 긴 한숨을 쉬며 일행들을 뒤로 물렸다.
“더 뒤로 빠져야 해.”
“응?”
의아함을 드러내는 마법사에 제냐가 지친 얼굴로 말했다.
“말릴 수 없을 테니까. 더 뒤로 빠지자고, 이걸로 안심 안 돼.”
제냐가 그들을 감싼 마법을 가리키자 마법사가 팩,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내 마법 실력을 무시해?”
글쎄. 정확히는 저게 어디까지 할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제냐가 보란 듯 루미에르에게 달려드는 베리스를 가리켰다.
“저거 진짜 미친놈이거든. 나도 실수인 척 머리 뚫릴 뻔한 적 있으니까 좋은 말 할 때 뒤로 가자.”
레라지에나 루미에르가 옆에 있다면 솔직히 이렇게까지 뒤로 갈 생각은 안 했을 테니, 결과적으로 마법사의 마법 실력을 의심한 게 맞았지만.
제냐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그런 속마음은 곱게 접어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제냐가 얼굴을 톡 치자, 마법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빨리 가자며 먼저 뒤로 물러났다.
제레미야도 별말 없이 그런 마법사를 따라 이동했다.
그렇게 적당히 싸움이 보이면서도 엄폐물 덕에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은 여전히 격렬한 싸움이 일고 있는 곳을 바라봤다.
‘너무 빨라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네.’
제냐가 눈을 좁히며 좀 더 유심히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는데, 마법사가 불쑥 질문을 던져 왔다.
“그래서, 황녀 전하와 정말 사촌이야?”
그래, 왜 안 묻나 했다. 제레미야에게는 묻지 못하면서 그녀의 옆에 붙어 서서 질문을 던지는 게 우습기도 했고.
제냐가 힐끗 제레미야를 쳐다보며 답했다.
“말해 줘야 해?”
그러자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우리는 기다리는 것 말고 할 일이 없잖아. 루미에르가 질 것도 아니고.”
그런 것치고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긴 오늘 마법사는 어떤 식으로든 제냐의 주변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한 번에 듣고 있는 셈이었다.
‘재밌겠지.’
제냐도 남 일이었다면 인생 한번 스펙터클하다고 감탄하며 재밌어했을 것이다.
제냐가 한숨을 푹 쉬는데 마법사가 다른 쪽을 가리켰다.
“저 마족이 싸우고 있는 마족 편을 들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눈치 빠른 새끼.
제냐는 마법사가 가리킨 비네를 쳐다봤다. 언제라도 상황이 위험해지면 중재하려고 하는 걸까? 비네는 싸우는 이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확실히 신경을 쓸 필요는 없지.’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루미에르가 질 리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쪽도 해결해야 하는 일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계속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니.
제냐가 몸을 틀어 제레미야를 쳐다봤다. 그러자 제레미야도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마주 봤다.
엉망이 되어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얼굴, 몸 할 것 없이 잔뜩 묻은 검댕이.
반쯤 해진 드레스와 어디에 버려두고 온 건지 알 수 없는 구두 한 짝까지.
정말이지, 제레미야는 누가 봐도 고생을 잔뜩 한 모양새였다.
서로를 모른 척하지 않고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니까 인사를 해야 하는데……. 제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은 이런 거였다.
“꼴이 그게 뭐야?”
시비를 걸듯 건네진 말이 기대와 달랐는지 마법사가 온 얼굴로 놀라며 제냐를 쳐다봤다. 제냐가 그런 마법사의 시선을 외면하는데, 제레미야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왜 저딴 것들이랑 어울려? 한심하게.”
저딴 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연히 베리스일 것이다. 지금, 누구랑 누구를 한 무리로 엮는단 말인가?
‘한심해? 누구는 원해서 아는 사이가 된 줄 알아?’
제대로 된 물적 증거는 없지만, 황제가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제냐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래, 너나 나나 원래 이런 사이였지.’
상황도 그렇고, 오랜만에 만났다고 그녀가 너무 감상에 젖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제냐가 부러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여전하네?”
“너도, 여전히 멍청해.”
그리고 돌아온 답에 제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너랑 나는 너무 안 맞았다.
* * *
그 뒤로 서로를 향한 자잘한 비난들이 오갔다. 당황하던 것도 잠시 재밌다는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던 마법사가 질린 얼굴을 할 때쯤.
결국 두 사람은 대화를 멈췄다.
제대로 된 인사도, 그간의 근황도 전혀 묻지 못한 채, 서로 마음만 상한 대화의 끝이었다.
제냐가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이제 슬슬 마무리 중인 베리스와 루미에르의 싸움을 쳐다봤다.
아주 그냥, 막을 새도 없이 두들겨 맞고 있는 베리스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좀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대리 만족을 느끼며 마음을 가다듬는데, 옆에서 제레미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살아 있어?”
또 시비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린 제냐는 두 손을 하나로 모은 채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제레미야를 발견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떠는 제레미야에 제냐는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 앞을 보며 답했다.
“마왕한테 납치당했어.”
“…왜? 아버지를 협박하려고? 아니면 네가 왕녀였어서?”
왕녀? 뒤에서 또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어서 기겁한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제냐는 그 부분은 이번에도 자연스레 무시했다.
“성력 쓰는 어린애가 신기했나 보지.”
“그럼 지금은…….”
대놓고 시녀로 일했다고 말하면, 제레미야는 기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갑자기 왜 저렇게 연약해 보이는 걸까?
하긴 생각해 보면 제레미야는 예전부터 못된 말만 내뱉는 입과 달리 여러 의미로 연약한 편이었다.
결국 제냐는 적당히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 밑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반쯤 프리랜서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니까.”
뭐, 이렇게 간접적으로 말한다고 해서 제레미야가 그녀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하지 못하지는 않을 테지만.
제레미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제냐가 제레미야의 얼굴에서 감도는 여러 감정들을 살피다 물었다.
“너는?”
무슨 소리냐고 그녀를 쳐다보는 제레미야에게 제냐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분들은 여전하시니?”
그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다는 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제레미야가 어색하게 답했다.
“뭐…, 그렇지.”
짐작한 대로였다. 그분들이 바뀌었을 리가.
어린 제냐의 눈으로도 그들 부부는 정상적인 이들로 보이지 않았었다.
튀어나올 것 같은 한숨을 삼키며 제냐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때 그 눈을 본 순간, 짐작하고 있던 바이지만 제레미야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 말.
“너는 어떤데?”
그들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너도 변하지 않았냐고.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제레미야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나는…….”
말을 할 듯 말 듯, 긴 침묵을 이어 가던 제레미야가 잠시 뒤, 먹먹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금 변한 것 같아. 아니, 변하고 싶어.”
그 단단한 눈을 보고 있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제냐가 말없이 다시 앞을 쳐다보는데, 분위기를 잔뜩 깨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와, 역시 가족은 대단하네요!”
황당함에 뒤를 돌아보자 손뼉을 짝짝 치며 제레미야를 훔쳐보던 마법사가 헛기침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황녀인 제레미야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다니, 쟤도 참 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