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10) (110/145)

파란 머리 마족, 베리스는 성격이 매우 나빴다. 아니, 나쁘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는 제레미야를 괴롭히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었다. 끊임없이 제냐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를 묻는가 하면, 인간들을 마주칠 때마다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도와줄까? 같은 인간이잖아, 제냐.”

네 답이 기대된다는 베리스에게 제레미야는 늘 엇비슷한 말을 했다.

“불필요한 살생을 할 필요는 없죠.”

“음, 그래?”

물론 답이 계속될수록 베리스는 지루한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그녀에 대한 흥미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

따라서 제레미야는 한 번 더 호위 기사를 보내려고 시도했다.

“이 사람도 보내 줬으면 좋겠어요.”

제레미야가 그녀와 함께 계속해서 마족들에게 끌려다닌 호위 기사를 가리켰다. 하지만 베리스는 이번에도 그런 제레미야의 말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다른 인간들을 살려 주면서 처음부터 그녀와 함께 있던 호위 기사는 풀어 주지 않는 것이 제일 최악이었다.

처음부터 그 꼴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초록 머리, 비네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할 거지?”

비네의 물음에 베리스가 순진한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뭐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베리스의 태도에도 비네는 더 이상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그만하지.”

“왜 계속 끼어들어? 그냥 따로 다니면 되지, 왜 따라와서 난리야?”

그리고 베리스도 계속되는 비네의 말림이 짜증이 나는 것 같았고.

“내가 폐하 명령을 어긴 것도 아니고, 제냐가 원해서 몇 명이나 도와줬잖아?”

“베리스.”

“에엥. 몰라, 안 들려.”

장난스러운 척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베리스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계속 저렇게 부딪쳐서 둘이서 싸움이나 붙으면 좋겠는데.’

제레미야가 한숨을 삼키는데 본격적으로 붙을 것 같았던 비네가 돌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찾듯 눈을 가늘게 좁히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 휘익-!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비네가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베리스가 장난을 멈출 때까지 그들의 옆을 떠나지 않을 것처럼 굴던 비네였다. 그런데 그가 말도 없이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다.

‘정말 곧 죽겠네.’

베리스는 그녀에 대한 흥미도 떨어진 상태였으니 틀림없었다.

‘저 기사만 어떻게든 살려 보낼 수는 없나?’

제레미야가 미련이 남은 눈으로 호위 기사를 흘끗 쳐다보는데, 비네가 쳐다보던 방향을 돌아본 베리스가 손뼉을 짝 쳤다.

“와!”

그러고는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더니 제레미야를 돌아봤다.

“지금 누구를 봤게?!”

내가 알 바야?

신나 죽겠다는 듯 음률까지 넣어 가며 그녀를 놀리듯 쳐다보던 베리스가 생긋 웃더니 그녀의 팔뚝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제레미야는 그녀의 뒤에서 엉거주춤 서 있던 호위 기사를 향해 입을 달싹였다.

‘도망가.’

지금 베리스는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그러니까 호위 기사가 도망갈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망설이듯 몇 번이나 머뭇거리던 호위 기사는 거의 점이 될 만큼 그들의 사이가 멀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자리를 떠났다.

‘드디어.’

저 호위 기사가 이대로 무사히 신전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호위 기사를 도와줬다는 사실만큼은 진실이었으니까.

‘난 최선을 다했어.’

그렇게 제레미야가 다가올 끝을 기다리는데, 베리스가 흥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역시! 이거 제냐가 아닌 거지?”

뭐? 힘을 축 뺀 채, 베리스에게 끌려가면서 바닥을 쳐다보던 제레미야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아스트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상황을 파악하듯 그녀와 베리스를 번갈아 보던 아스트리아가 대놓고 욕을 짓씹었다.

“망할.”

그 말에 옆에 있던 베리스가 깔깔거리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혼자서 아주 좋아 죽었다.

‘미친놈.’

* * *

제냐는 베리스의 손아귀에 있는 인물을 바라보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그러자 베리스가 낄낄거리며 말을 걸었다.

“어때, 정말 신기하지. 제냐?”

“…그만 좀 해라.”

옆에서 비네가 그를 말렸지만 베리스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반응을 내보인 이상, 이제 와 모른 척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던 제냐는 부러 태연하게 답했다.

“네, 신기하네요. 어떻게 만나셨을까요?”

흐응, 콧소리를 낸 베리스가 샐샐 거리며 웃었다.

“숨어 있는 인간이 있길래 불러왔더니 얘가 있더라고. 응? 함께 있던 남자는 사라졌네?”

베리스가 목을 쭉 빼더니, 제레미야의 뒤를 살폈다. 보아하니, 제레미야 말고도 끌고 다니던 인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죽이지는 못하니, 저런 식으로 가지고 논 거구나.’

설명을 듣지 않아도 베리스가 무슨 짓을 했을지는 뻔했다.

“뭐야, 도망갔구나. 다시 잡아 올까?”

괘씸하다는 듯 날카롭게 눈을 치뜨는 베리스에 제레미야가 재빨리 답했다.

“아니요.”

그 답은 안 그래도 장난감이 사라져서 짜증이 난 베리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음이 틀림없었다.

베리스가 이제까지 헤실거리던 웃음기를 지우며 살벌하게 대꾸했다.

“너한테 안 물었는데?”

그러고는 제레미야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는 것이다.

“너, 제냐 아니잖아. 난 거짓말쟁이는 싫어해.”

제레미야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반쯤 돌아 버린 베리스의 시선을 받아 냈다.

제냐는 베리스와는 절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뒀다가는 제레미야의 목이 정말로 잘려 나갈지도 몰랐다.

정신이 나간 베리스는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편이니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에요.”

제냐가 입을 열자, 살기등등하게 제레미야를 내려다보던 베리스가 미처 그 흉악한 시선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제냐를 돌아봤다.

“뭐가?”

소름 끼치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본 제냐가 제레미야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쟤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니까.”

“응?”

제냐가 베리스와 비네를 보며 말했다.

“소개할게요. 제 사촌 제레미야예요.”

소개는 베리스와 비네에게 했는데, 반응은 뒤에 있는 마법사에게서 나왔다.

“뭐? 사촌?”

하긴 마법사가 제레미야가 누군지 모를 리가 없었다. 마법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또 한 번 ‘사촌?!’ 하고 물었다. 제냐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척 베리스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그만 놓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말을 하면서도 제냐는 딱히 기대하진 않았다.

‘순순히 물러나 줄 리가.’

그리고 짐작대로 베리스는 순순히 물러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으음. 싫은데.”

상황이 꽤 재미있는 모양인지 그의 얼굴에는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 걸려 있었다.

헤에, 입을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던 베리스가 삐진 척 입을 삐죽거렸다.

“뭐? 우리 사이에 어떻게 그런 걸 내게 숨길 수가 있어! 나 실망이야!”

우리 사이가 뭔데. 실망하든가 말든가.

속으로 툭툭 그 말에 반박하면서도 제냐는 겉으로는 무심한 얼굴을 유지했다. 베리스에게 반응을 보이는 것만큼 그를 자극하는 것도 없었으니까.

그런 제냐의 반응과 별개로 이미 베리스의 흥은 아주 머리끝까지 올라간 모양이었지만.

“그리고 나랑 네 사촌, 정말 재미있게 놀았단 말이야. 우리 이제 절친이나 다름없는걸?”

저쪽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러니까 놓아주지 않을 거야.”

그래도 되겠지? 눈으로 묻는 베리스에도 제냐는 물러나지 않았다.

“도움을 받은 게 있어서 저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요.”

베리스가 딴청을 피우듯 머리 뒤로 손깍지를 끼며 답했다.

“근데 그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런가요?”

“그래.”

생긋. 절대 그냥 놓아주지 않겠다는 미소에 제냐가 침묵하자 베리스가 이번에는 그녀의 옆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나저나, 옆에 있는 건 그때 그 남자 친구였던가? 그런데 또 인간계에서 보니까 묘하게 인간 같기도…….”

그 순간 제냐와 루미에르의 시선이 부딪쳤다. 제냐는 답을 구하듯 그녀를 쳐다보는 루미에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눈 깜짝할 사이에 베리스의 곁으로 다가간 루미에르가 그를 향해 손을 내리쳤다.

훅, 바람을 가르고 다가오는 주먹에 베리스가 급하게 손을 휘저어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루미에르의 손에서 튀어나온 붉은 무언가에 베리스의 마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건 뭐지?’

제냐가 의아해하는 사이, 루미에르가 훤히 드러난 베리스의 몸통에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베리스가 씨익, 웃으며 제레미야로 자기 몸을 가렸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그 행동까지 예측했다는 듯 가볍게 손을 비틀어 베리스의 손을 베어 내고 제레미야를 제냐에게로 밀어냈다.

베리스가 몇 차례 제레미야를 향해 마법을 날렸으나 그건 루미에르의 손에서 튀어나온 검과 비슷한 형상의 붉은 기운에 상쇄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검인가?’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냐는 더 이상 그 붉은 형상이 무엇인가 정의를 내리고 있을 수 없었다.

제냐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제레미야를 손을 뻗어 붙잡고 마법사를 쳐다봤다. 타이밍 좋게 마법사가 얼른 그들의 주위로 방어막을 둘렀다.

그리고 베리스와 한 번 더 합을 나눈 루미에르가 베리스의 가슴팍을 발로 쳐 내고 다시 제냐의 앞으로 훌쩍 돌아왔다.

“왜 벌써 그만둬?”

루미에르에게 차여 뒤로 몇 발자국 밀려났던 베리스가 붉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위협적으로 기세를 끌어 올렸다.

그때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비네가 끼어들었다.

“베리스, 거기까지 해라.”

그러자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베리스가 신경질을 냈다.

“너 아까부터 짜증 나게 왜 자꾸 말리는 거야?”

“지금 설치다가 제냐까지 다치면 어떻게 될지 알 텐데. 난 네가 한 짓을 숨길 생각은 없어.”

냉정한 경고에 베리스는 더욱 심기가 상한 모양이었다.

“하. 어이가 없네. 그러고 보니까, 너는 가족이라는 거 짐작하고 있었던 거지?”

잠시 침묵하던 비네가 제냐를 힐끗 쳐다보며 답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이제껏 제레미야가 어떤 식으로든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비네 덕인 모양이었다. 제냐가 작게 비네에게 눈인사를 건네는데 베리스가 발을 쿵쿵 구르며 화를 냈다.

“재미없게. 자기만 알고 있고!”

비네가 비웃듯 말했다.

“핏줄일지도 모른다고 했으면 더 좋아했을 게 뻔하니까.”

그러자 짜증을 내던 베리스가 부정하지 않고 그 가정을 받아들였다.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 이제 그만해라. 건드려도 딱히 재미없을 테니.”

“흐음.”

고민하는 것처럼 침묵하며 주변을 쭉 훑던 베리스가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베에, 혀를 내밀었다.

“그래도, 나 이렇게 끝나는 건 정말 싫은데. 나는 재미있을 것 같단 밀이야. 특히 저놈.”

베리스가 대놓고 루미에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그들에게 몇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 저놈도 그리고 인간 마법사도 제냐를 지키려고 할 테니까. 다치진 않을걸?”

그렇지 않냐고 비네를 쳐다보던 베리스가 고개를 쭉 기울이며 루미에르의 뒤에 반쯤 가려져 있던 제냐와 눈을 맞췄다.

“사실 예전부터 제냐랑 놀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고.”

그러니까 놀자고.

베리스가 순수한 듯 잔인한 얼굴로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