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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09) (109/145)

처음 하늘이 열렸을 때만 해도 제레미야는 이게 현실이 맞는 건가 의심했다.

그 때문일까? 그녀에게 달려와 위험하다고, 몸을 숨기셔야 한다고 외치는 호위 기사의 다급한 외침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에서 쏟아진 마족들이 그들을 공격하던 성기사들을 쓰러트렸을 때, 제레미야는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인지했다.

마족이 신전을 침범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신전은 마족에게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아닌가? 물론 딱 한 번 신전이 마족의 침략을 당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는 본신전인데?’

혼란에 빠진 제레미야를 일깨운 건 누군가의 비명 같던 부름이었다.

“황녀 전하!”

간절하게 그녀를 부르는 그 외침에 흐리게만 보이던 모든 것들이 뚜렷하게 눈에 잡혔다.

도망을 치려던 사람들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마족들을 피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어느새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호위 기사가 서 있었다.

다른 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홀로 남은 호위 기사가 제레미야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정신 차리세요! 여기서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겁니까?”

아니,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사느니 죽어 버리는 것이 낫겠냐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막상 죽을 것 같은 상황이 되자 제레미야는 살고 싶었다.

‘이제 간신히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려는데 죽는다고?’

마음의 짐을 벗고, 아버지에게 맞설 용기가 생겼는데, 이렇게? 절대 그럴 순 없었다.

제레미야는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을 주고 그녀를 이끄는 호위 기사와 함께 최선을 다해 뛰었다.

호위 기사는 마족들이 성기사들을 처리하는 사이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냈다. 날아드는 마법을 피해 바닥을 구르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검을 쳐 내며 오로지 생존을 위해 회피를 계속했다.

그리고 제레미야는 멍청하게 그런 호위 기사의 뒤를 따라다니기만 했다.

나만 아니면 저 기사가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면서도 호위 기사가 그녀만 두고 도망갈까 두려웠다.

제레미야는 입술이 하얘질 때까지 깨물고 어떻게든 호위 기사의 속도에 맞춰 달려 나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폐가 찢길 듯 아파 왔다. 목구멍에서 피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바닥을 구르고 마족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면서 행색도 엉망이 되어 갔다.

하지만 그걸 투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를 지키던 호위 기사는 점점 더 피투성이가 되어 갔으니까.

“저 마족들이 자리를 떠나야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잠시 기다리죠.”

제레미야는 그런 상태에서도 어떡해서든 길을 찾는 호위 기사를 감탄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그냥 아버지의 개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아버지의 명령이 있었다지만, 자기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까지 제레미야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 노력할지는 몰랐다.

혼자 살아남아 봤자 그를 기다리는 건 다른 방식의 죽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그의 노력이 없는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제레미야는 정말 아무런 단련도 하지 않은, 체력이 바닥인 평범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여기까지인가 보네.’

제레미야는 점점 더 그들의 주변에 마족들이 모여든다는 걸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아까처럼 겁이 나거나, 손이 떨리진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해서인가? 아니면, 너무 살고 싶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상관없지.’

마지막 순간 의연할 수 있다는 건 만족스러웠다.

그러는 사이 마족 중 서열이 꽤 높아 보이는 마족까지 등장하고, 초록 머리의 마족이 그들이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바라봤다.

“저기, 데려와.”

그 말이 끝나기가 마족들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인간 두 명이네? 꼴이 엉망이야. 키킥.”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은 마족이 그들의 팔뚝을 잡아끌고 초록 머리 마족의 앞에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들을 무릎 꿇린 채 묻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파란 머리 마족이 대충 손을 휘저었다.

“뭘, 어떻게 해? 그냥 처리해. 재미도 없고.”

“베리스.”

초록 머리 마족이 한숨을 쉬며 파란 머리 마족을 쳐다보자 그가 대놓고 불만을 표했다.

“재미없다고, 이런 건.”

이게 ‘재밌다’, ‘재미없다’로 표현할 수 있는 일인가? 제레미야는 일그러질 것 같은 얼굴을 간신히 폈다.

“아무도 네게 따라오라고 한 적 없다.”

“비네, 네가 가는데 나도 따라가야지! 너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그러면 옆에서 비웃겠지.”

“역시 넌 날 너무 잘 안다니까?”

자기들끼리 만담 같은 대화를 하던 마족 중 파란 머리가 그들을 끌고 온 마족을 쳐다봤다.

“뭐 해? 처리하라니…….”

말을 하다 만 파란 머리가 옆에 있던 초록 머리를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제레미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것이다.

“야, 비네. 이거 제냐 아니야?”

“뭐?”

제냐? 그게 누구지?

지루하게 가라앉아 있던 파란 머리의 눈이 반짝이고 무심하기 짝이 없던 초록 머리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봤다.

제레미야가 미처 상황을 이해하기 전, 파란 머리가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더니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봐 봐, 제냐……. 아닌가?”

어느새 처음에 놀랐던 기색을 갈무리한 초록 머리가 단호하게 답했다.

“닮긴 했지만 아니다.”

그러나 파란 머리는 거기에 동의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법을 썼을 수도 있잖아.”

“제냐라면 저렇게 얌전히 무릎을 꿇고 있지 않겠지.”

“에이, 우리 모습에 겁이 난 걸 수도 있지. 제냐는 평소에 폐하의 옆에만 있어서 이런 꼴을 볼 일은 별로 없었잖아?”

파란 머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얼굴 밑에 꽃받침을 했다. 그러고는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이다.

“제냐, 머리카락 색이 왜 변했어? 나는 네 검은 머리카락이 좋은데.”

파란 머리가 기대 가득한 얼굴로 제레미야를 쳐다봤다.

“눈도 변했고. 원래 보라색이었던가?”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 그리고 그녀와 닮은 외관.

자연스레 아스트리아가 생각이 났다.

‘설마 아스트리아도 저들과 엮인 건가?’

굳어 있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신전에 침입했던 마족 하나, 그건 잘못된 보고가 아니었던 걸까?

‘그럼…, 마족과 루미에르가 손을 잡았다고? 아스트리아도 마족과 함께 있고?’

스스로가 내린 결론에 충격을 받은 제레미야가 침묵하는 사이 파란 머리가 재촉하듯 그녀를 불렀다.

“제냐?”

재미있다는 게 얼굴 가득 쓰여 있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제레미야는 깨달았다.

이 마족은 놀이를 제안하고 있었다.

그는 제레미야가 제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제냐의 특징까지 알려 주면서 그녀에게 선택을 종용하는 것이다.

충격도 잠시, 마족의 행태는 제레미야에게 오기를 불러일으켰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직접 아스트리아를 만나서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다.

제냐와 아스트리아가 동일 인물이라는 가정하에, 언젠가 이 파란 머리 마족은 아스트리아와 만날 테니까.

그러니 지금은 이 마족이 원하는 대로 놀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지켜야 할 사람도 있고.’

치욕스러운 일이지만, 함께 있던 호위 기사의 목숨을 살려야 했다.

‘나도 노력해야지.’

운이 나쁘면, 아스트리아를 만나기 전 마족의 변덕에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 했다.

제레미야는 일자로 굳게 다물던 입술을 매끄럽게 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조금 전 대화를 통해 알게 된 파란 머리의 이름을 불렀다.

“네, 베리스 님.”

제레미야의 말에 파란 머리 마족이 환하게 웃었다.

“그래, 역시 제냐였구나?!”

행동과 어울리지 않게 웃는 얼굴만큼은 어린아이의 미소같이 밝았다.

제레미야가 그렇듯 파란 머리의 속셈을 파악한 건지, 초록 머리가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하지만 파란 머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나서 연극을 시작했다.

“폐하를 따라 출장까지 오고 우리 제냐가 고생이야. 이런 꼴까지 당하다니.”

파란 머리가 제레미야의 어깨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 주며 안타까운 낯을 했다. 그러고는 과장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외치는 것이다.

“이놈들, 다 혼을 내야겠어. 폐하께서 제냐를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는데.”

파란 머리가 제레미야를 번쩍 일으켜 세우더니 그녀의 어깨를 한 손으로 턱 감싸고는 다정하게 물었다.

“자자, 내 옆에 서서 이제껏 제냐를 괴롭힌 것들을 다 찍어 봐.”

그러고는 친절한 얼굴로 속삭이는 것이다.

“다 죽여 줄게.”

역시 이놈은 미친놈이 맞았다. 제레미야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하자 파란 머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생긋 웃었다.

“마족들은 죽여도 뭐라고 하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까 얼른 고르라고, 쟤? 아님, 쟤?

파란 머리가 함께 있던 마족들을 손가락질하며 웃어 대자, 초록 머리가 차갑게 그 손을 쳐 냈다.

“베리스.”

꽤 타격음이 세게 난 것 같은데 파란 머리는 아프지도 않은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초록 머리를 쳐다봤다.

“왜에? 맞잖아?”

그러고는 다시 그들의 주위에 있는 마족들을 향해 눈웃음을 치는 것이다. 불안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마족들이 슬금슬금 하나둘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허허, 저희랑은 상관없죠. 숨어 있기에 그냥 좀 놀려 줄 생각은 있었지만.”

숨어 있었던 걸 알고 있었다니, 역시 마족 놈들은 다 똑같았다. 제레미야는 다시 한번 구겨질 뻔한 얼굴을 폈다.

“그럼요, 그럼!”

“건드리진 않았거든요!”

“하하하, 얼른 가 볼게요? 폐하의 명령을 따라야죠!”

그들의 주위에 있던 열댓 명의 마족들은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제레미야와 호위 기사, 그리고 두 명의 마족만이 남은 공간에는 적막이 들어찼다.

‘그래도 저 초록 머리는 남아 있네.’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기서 제일 정상같이 보이는 건 저 마족이었으니,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정상이라고 해도 열성적으로 파란 머리를 막을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때 적막을 깨고 파란 머리가 에엥, 우는소리를 냈다.

한참 인위적으로 훌쩍거리던 파란 머리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는 제레미야를 돌아봤다.

“다 도망가 버렸네. 걱정하지 마, 제냐. 나는 거짓말하는 것들을 싫어하잖아.”

그녀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거짓말쟁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죽여 버릴 테니까.”

이건 그녀에게 하는 경고였다. 이 짓도 결국에는 끝이 날 거고. 그러면 너도 죽을 거라는 의미의 경고.

생명의 위협을 당했지만, 제레미야는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떨 필요 없어. 아직은 흥미가 더 큰 모양이니.’

그리고 그런 의연한 제레미야의 모습은 파란 머리의 흥미를 더욱 자극한 모양이었다. 눈에 이채를 띤 파란 머리가 신이 나서 흥얼거렸다.

“이거, 재밌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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