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늘어져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나 확인하던 제냐가 한숨처럼 말했다.
“살아 있어요.”
정말 마왕에게 명령을 받은 게 맞기는 한 건지, 대부분의 마족들은 기절한 성기사나 신관을 더 건드리진 않았다.
물론 죽기 살기로 덤비는 신관이나 성기사들을 만나면 신난다고 낄낄거리며 좋아하긴 했지만.
“으하하! 그래, 더 해 봐, 더!”
광기 어린 마족의 목소리에 질색을 한 제냐가 얼른 방향을 틀었다.
제냐를 따라 전투가 일어난 곳을 이리저리 살피던 루미에르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생각보다 온건하네요.”
실제로 마족들과 싸워 본 적이 있는 루미에르가 하는 말이니 더 믿을 만했다.
“조금 거칠긴 하지만, 확실히 죽일 생각은 없어 보여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거칠어 보였다.
“더 움직여! 더 발악해!”
“이야, 기어서라도 일어날 거야? 좋아, 좋아!”
그래도 확실히 기절한 걸 확인하면 아쉬운 얼굴로 발걸음을 돌려 버리는 마족을 몇 번 확인했기에 제냐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럼 됐어요.”
“당하는 입장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겠지만요.”
하긴. 저렇게 광기 섞인 얼굴로 좋다고 낄낄거리는데, 누가 그런 생각이 안 들겠는가?
하지만 저런 마족들까지 하나하나 말릴 시간은 없었다.
“간간이 아는 얼굴들이 보여요. 다 마왕에게 과하게 충성하는 마족들이고요.”
“…일부러 말 잘 듣는 놈들만 데려왔다는 거군요.”
제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걱정하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네, 그러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미에르가 앞으로 달려 나가 인간을 향해 휘둘러지는 마족의 창을 거둬 냈다.
“이미 기절했다.”
방해를 받아 화가 난 것처럼 루미에르를 쳐다보던 마족이 기절한 성기사를 바라보더니 쯧 혀를 찼다.
“에잉. 그렇네?”
그러고는 돌연 눈을 빛내며 루미에르를 쳐다보는 것이다.
“그럼 너는 어때? 너도 인간… 맞지?”
긴가민가하긴 하지만 만약 인간이 맞는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달려들 모양새였다.
루미에르가 인간이 아니라고 부정할 일은 없었기에 이번에는 제냐가 나섰다.
“그분은 폐하께서 따로 시키신 일이 있으니 건드리지 마세요.”
마족이 제냐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제냐?”
“안녕하세요.”
제냐가 마왕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자 마족이 반가운 낯으로 건들거리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제냐도 여기 와 있다고 했지?”
루미에르가 뒤에서 그런 마족을 흉흉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제냐는 눈으로 루미에르를 말리며 친근하게 대꾸했다.
“네. 폐하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요.”
“아이고, 고생이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제냐가 쓰러진 인간을 눈짓했다.
“인간을 죽이지 말라는 폐하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시죠?”
그러자 마족이 으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럼 그럼. 조금 전 이건 정말 실수였다니까?”
“네. 알고 있어요.”
“폐하께 이르면 안 된다?”
혹여 마왕에게 말이 들어가 혼날까 봐 눈치를 보는 마족에 제냐가 뭐가 문제냐는 듯 그를 쳐다봤다.
“실제로 죽지 않았잖아요.”
흔쾌히 그의 부탁을 받아 주자 기분이 좋아진 건지 다시 호탕하게 웃어 버린 마족이 창을 갈무리했다.
“그래. 고마워, 제냐.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네.”
마족이 그들을 떠나자 루미에르가 냉큼 그녀의 곁에 다가와서 물었다.
“아는 사이예요?”
안다면 아는 사이가 맞았다.
“대신 서류 작업을 몇 번 해 준 적 있어요. 폐하의 부하 중에 저를 모르는 이는 없다고 봐야죠.”
그러자 있는 듯 없는 듯 그들의 뒤를 따라오던 마법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네 얼굴이 프리패스인 거네?”
갑자기 뭔 소린가 싶어서 그를 돌아보던 제냐에게 마법사가 주변의 마족들을 눈짓했다.
“봐 봐, 다 너 알아보는 것 같은데.”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막 그들을 발견하고 신나게 다가오던 이들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자리에 멈춰 선 게 보였다.
그리고 막 제냐와 대화한 마족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다 같이 높게 손을 흔들기 시작했고.
“제냐! 잘 지냈어?”
“안녕?”
“여기서 보니까 반갑다?”
제냐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 모습을 못마땅한 낯으로 바라보던 루미에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입도 싸네요.”
덕분에 귀찮게 설명을 더 할 필요는 없었으니 그걸로 족했다. 제냐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몸을 돌렸다.
“빨리 가요.”
괜히 붙잡혀 대화가 길어지는 건 딱 질색이었다. 마법사가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라오면서 조잘거렸다.
“나 전부터 궁금했는데, 너는 뭐야? 왜 마왕이랑 있는데? 응?”
함께 있으면서 돌아가는 사정을 다 알게 됐으면서도 부득불 확인하려는 마법사가 귀찮았다.
“그냥 시녀.”
“시녀라고?”
묘한 마법사의 말투에 제냐가 코웃음을 쳤다.
“왜, 이제 막 대하려고?”
마법사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 루미에르가 차갑게 마법사를 노려봤다. 그 매서운 눈빛에 마법사가 기겁했다.
“나 아직 답도 안 했거든?”
제냐가 비웃음을 머금고 그를 쳐다보자 마법사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너 성력 소유자라면서, 어떻게 마왕의 밑에 들어갈 생각을 했어?”
“납치당했어. 머물던 신전이 무너졌거든.”
그러자 마법사가 과하게 흥분한 얼굴을 했다.
“뭐? 설마, 너 거기 출신이야?”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심드렁하게 답하자 마법사가 눈을 찌푸렸다.
“그 어디였지? 아무튼 이제껏 마족에게 침략당한 신전은 한 군데뿐이라고?”
새삼스레 마왕의 집념이 느껴졌다. 떠나던 마왕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을 쉰 제냐가 대충 대꾸했다.
“뭐, 그럼 거기 출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 머문 건 고작해야 일주일이지만.”
“헤에, 그럼 정식 신관은 아니었겠네?”
다시 한번 제냐와 루미에르의 시선이 마법사에게 닿았다. 그러자 그가 서둘러 손을 휘저었다.
“얕보려는 거 아니라니까?”
“짐작하는 대로야.”
“그럼 그게 왜 루미에르에게만 특별하게 작용되는데?”
그건 제냐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알아?”
“흐음.”
묘한 소리를 내는 마법사에 제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 짜증 나 죽겠는데, 아까부터 저 태도는 뭐란 말인가?
제냐가 뾰족하게 마법사를 돌아봤다.
“그냥 속 시원히 말해. 네 위인지 밑인지 궁금하다고.”
그러자 마법사가 억울함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럼 뭐?!”
마법사가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그거랑 비슷한 거 예전에 본 것 같아서…….”
“그거 비슷한 게 뭔데?”
제냐의 물음에 마법사가 에헴, 어깨를 펴더니 말했다.
“내가 이래 봬도 마탑에서 알아주는 천재로 추앙받았단 말이야. 그래서 마탑주님 방에도 차기 마탑주랍시고 자주 불려 갔다고.”
쓸데없는 설명은 줄이고 하려던 이야기나 하라고 눈빛을 쏴 대자 마법사가 흥이 식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다 보니 금서들도 좀 보고, 응? 기밀문서도 봤지. 그런데 너랑 엇비슷한 뭐를 봤던 것도 같아서.”
응? 그건 좀.
제냐가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마법사를 바라봤다.
“정확히 무슨 내용인데?”
“…그때 봤던 게 너무 많아서 제대로 기억은 안 나는데. 분명 기밀문서 중 하나였어!”
기억이 안 난다니. 제냐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용이 기억 안 나면 쓸모없는 것 아니야?”
“나쁜 내용이었습니까?”
경계 가득한 루미에르의 표정을 확인한 마법사가 재빨리 부정했다.
“아니! 분명 그런 건 아닌데. 예언 어쩌고저쩌고랑 연관 있었어!”
예언이랑 연관이 있었다고?
뭔가 마왕이 이번에 황궁에서 찾은 그 선전용 책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호기심이 식은 제냐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뭐, 마왕이 찾던 책이랑 비슷한 내용이 또 있다고 해도 이상한 건 없지.”
그렇지 않냐고 루미에르를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미적지근한 둘의 반응에 다시 한번 매달렸다.
“뭔가 중요한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기억났겠지.”
단호한 제냐의 말에 마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이제 주변을 좀 둘러보라고. 혹시 또 누가 눈먼 공격에 당하는 게 아닌지 살피는 게 우리의 일이라고 말하려는데,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냐?”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제일 먼저 보인 건, 짙은 초록빛 머리카락이었다. 그 머리카락의 주인이 누군지 깨달은 제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비네 자작님?”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레라지에가 그렇듯 비네 자작도 친마왕파 소속의 귀족이었는데.
반가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제냐는 순간 든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비네 자작이 여기 와 있다는 건, 그러니까 그 금붕어 똥도 함께라는 거…….
제냐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급하게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금붕어 똥이 보이진 않았다.
그래, 마왕도 제정신이라면 그 미치광이를 불러오진 않았겠…….
“역시! 이거 제냐가 아닌 거지?”
전혀 바라지 않는 목소리에 제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욕이 튀어나올 뻔한 건 삼킨 제냐가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봤다.
역시나, 그 자리에는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베리스 백작이 서 있었다.
소년 같은 목소리와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순하고 해맑은 얼굴을 한 베리스 백작.
손속이 사납고, 잔인하며, 기분에 따라 움직이길 좋아하는 베리스 백작은 다루기 어려운 마족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도 제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제냐의 기대보다 더한 짓을 저지르는 중이었다.
그의 손아귀에는 엉망진창이 된 제레미야가 붙잡혀 있었으니까.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