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07) (107/145)

“제냐, 건물.”

괜히 딴청을 피우던 제냐는 그녀를 톡톡 건드리며 위를 가리키는 레라지에에 눈을 찌푸렸다.

그녀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다면, 저 말싸움을 멈춰야 했다.

“네가 더…….”

결국 내가 나서는구나. 한탄과 함께 제냐는 유치한 말싸움에 끼어들었다.

“언제까지 할 거예요?”

제냐는 그녀를 쳐다보는 두 명을 차갑게 쳐다봤다.

“차라리 주먹질을 하든가 이게 뭐 하는 거예요?”

부끄러운 줄 알라고 말하려는데 루미에르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싸워도 됩니까?”

장난해?

“안 돼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 것치고 루미에르는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진작 한 소리를 했을 것이다.

제냐가 튀어나올 것 같은 잔소리를 삼키며 레라지에를 돌아봤다.

“건물이 곧 무너진다는 소리를 하고 싶었던 거죠, 레라지에 님?”

레라지에가 옅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래. 바깥도 소란스럽고.”

제냐는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태도로 다시 마왕과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이제 제대로 결정해야 할 때예요. 루미에르, 정말 물러날 거예요?”

원하는 게 있으면 빨리 이야기하라고. 제냐가 눈빛으로 그를 재촉하자, 루미에르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마족이 싫습니다. 그게 만들어진 감정이라고 해도요. 하지만…….”

루미에르가 눈썹을 찌푸리며 마왕을 쳐다봤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제냐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고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제냐와 마왕을 번갈아 보며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정보를 들어 보고 정하는 건 어떨까요?”

제냐에게 묻는 척하지만 누가 봐도 마왕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져 주는구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제냐는 그저 마왕이 양심 있게 굴기를 바랄 뿐이었다.

제냐가 마왕을 돌아보자 역시나 그는 아쉬울 게 없다는 태도로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여유로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천계의 보석은 본래 두 개가 한 쌍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들고 있는 건 반쪽짜리라는 소립니다.”

“…뭐?”

“그리고 나머지 한 쪽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죠.”

마왕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냐는 그런 마왕을 비웃을 수 없었다. 그야, 제냐도 지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이걸 왜 지금 말해?’

지금까지 그걸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는데, 이걸 이제 와서 말한다고?

제냐가 황당함을 넘어 충격을 받은 얼굴로 루미에르를 쳐다보자 그가 마왕을 볼 때와는 달리 소심한 얼굴로 변명했다.

“말했잖아요. 마족은 싫다고.”

하. 그래서 이야기를 안 했다고? 성녀를 죽이지 말라는 것도 마왕이 성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서 그런 거 아니야?

화가 나기도 했고 동시에 그가 이해되기도 했다. 제냐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래, 결국에는 이야기를 했잖아.’

애당초 루미에르는 마왕의 사정을 다 알지도 못했다. 알고 나서는 곧장 이야기한 것과 다름없는 셈이었고.

그렇다면 이제 할 건 하나였다.

제냐는 충격을 받은 게 훤히 보이는 마왕에게 물었다.

“폐하,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어요?”

마왕이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별수 없었다. 여기서 제냐가 루미에르의 편을 안 들면 누가 그의 편을 들겠는가?

마왕의 얼굴에서는 점점 표정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표정을 갈무리한 마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뜻대로 하지.”

마왕의 답에 루미에르가 매끈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오늘따라 얄미워 보였다. 그건 아마 마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걸 티 내지 않으려는 것 같았지만.

마왕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루미에르를 재촉했다.

“또 아는 거 있으면 다 불어.”

루미에르가 별로 어려울 게 없다는 듯 차분하게 답했다.

“목걸이로 만들어져 있고,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닙니다. 당연히 크기는 저것보다 작고……. 그 이상은 몰라요.”

이제 됐냐고, 마왕을 바라보는 루미에르는 의기양양해 보였다. 마왕은 그런 루미에르의 얼굴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정말 이대로 넘어가겠다고? 제냐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마왕을 살피는데, 루미에르가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제냐의 옆으로 다가왔다.

“제냐.”

아니, 지금은 내 손을 잡는 것보다는 다른 걸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마왕이라든지.

제냐가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루미에르를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마왕을 돌아봤다. 그리고 마왕의 얼굴을 눈에 담은 순간.

‘웃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제냐는 단 한 번도 마왕이 저런 식으로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마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하나 말해 주지.”

마왕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목에 걸려 있는지조차 몰랐던 목걸이를 탁, 끊어 냈다.

“나도 중요한 목걸이가 하나 있거든. 딱히 부를 생각은 없었지만…….”

우그득.

마왕의 손아귀 안에서 목걸이의 보석이 산산조각이 나고.

“별수 있겠나? 아직 찾아야 하는 게 하나 더 있는데.”

무슨……?

제냐가 마왕의 손아귀에서 부서져 내리는 보석의 흔적을 눈으로 좇는데, 그녀의 귀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제 마계의 군대가 나타날 거야.”

충격과 함께 우르릉 심상찮은 소리를 계속 내던 건물이 완전히 무너졌다.

* * *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제냐는 그녀를 감싸는 손길을 느끼고 그에 몸을 맡겼다. 마법 덕에 몸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크게 흔들리고 쿵쿵, 흔들리는 보호막 덕에 머리가 얼얼했다.

그리고 흔들리는 시야 너머 보이는 마족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제냐는 하늘을 가득 채운 마족들을 보며 헛숨을 삼켰다.

익숙한 마수들의 위에 올라타 하늘을 활공 중인 마족들이 캬하하-! 소리를 내며 지상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을 바라보는데, 마왕과 레라지에의 대화가 들려왔다.

“결국 이렇게 됐군요.”

“성녀를 찾아야 해.”

“늦기 전에 가시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제냐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봤다. 거기에는 더 이상 분노를 숨기지 않는 마왕이 있었다.

“그래, 나머지 하나를 빼앗길 수 없으니 건물이 완전히 무너진 순간 도망갔겠지.”

마왕이 입꼬리를 비틀며 하늘을 바라봤다.

“건물이 무너지게 설계한 건 침입자가 아니라 본인을 위한 거였군.”

웃고는 있지만 웃는 게 아닌 마왕을 모르지 않았다. 벼르고 벼르던 존재를 놓칠지도 모르는 마왕의 기분이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는 그가 마족들을 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성녀를 이대로 놓칠 수 없으니 그동안 신관과 성기사들의 발을 잡아 줄 이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족을…….’

흔들리는 눈으로 마왕을 쳐다보는데 마왕이 진작에 그 시선을 눈치챘다는 듯 자연스레 그녀를 돌아봤다.

“되도록 죽이지 말라고 했다. 신전 밖으로 나가진 못할 거고.”

마왕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하늘에 투명한 막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레라지에도 변명하듯 말을 더했다.

“우리가 나타난 이후, 웬만한 일반인들은 전부 신전을 나갔을 거야.”

레라지에가 얼굴에 걸린 천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사상자가 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하는 비명 덕에 정신은 점점 더 맑아졌다. 제냐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레라지에와 마왕을 똑바로 바라봤다.

“가기나 하세요.”

서로가 완전히 한편이 될 수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서로가 지향하는 바가 다름을 알았고.

‘지하에서 그런 꼴을 겪어 놓고도 이제까지 군대를 안 끌어온 게 용했지.’

마왕에게 이 이상 배려를 바라는 것도 우스웠다. 마음만 먹었다면 그는 진작에 군대를 데리고 와 신전을 쓸어 버렸을 테니까.

그러니 마왕을 원망하는 대신, 최대한 할 수 있는 걸 할 생각이었다.

마왕이 흔들리지 않는 제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를 건드릴 놈은 없겠지만. 최대한 저놈 옆에 붙어 있어.”

새삼스레 정말 마왕이 그녀와 다른 인간들을 완전히 별개로 취급을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인간들이 다치는 건 신경 쓰지 않지만, 내가 다치는 건 원치 않는다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

지금 막 차오르는 이 감정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제냐는 굳이 그 감정을 정의하지 않았다.

제냐가 짙은 한숨과 함께 감정을 날려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마왕과 레라지에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제냐가 고개를 돌려 여전히 그녀를 부축하고 있던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루미에르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제냐는 겁에 질린 그 푸른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화를 낼 생각은 없어요. 이렇게 될 줄 몰랐을 테니까.”

정말이었다. 제냐도 루미에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않은가.

“제냐.”

“그러니까 루미에르. 우리는 이제 우리의 행동에 책임을 져요.”

제냐는 손을 뻗어 루미에르의 손을 움켜쥐었다.

“사람들을 도와줘요. 물론 우린 마족들도 도와줄 거예요. 누군가 죽는 건 싫으니까.”

마족들도 돕자는 말에 눈가를 찌푸리던 루미에르가 죽음이 싫다는 제냐의 말에 결국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에르의 답을 받은 제냐는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던 마법사를 쳐다봤다.

“너도 도와줘.”

말이 도와 달라는 거지, 사실 마법사도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옆에 있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을 터였다.

죽상을 한 마법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쉰 제냐가 난장판이 된 신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