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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05) (105/145)

쾅! 시끄러운 폭발음은 끊이지 않고, 곳곳에 핏자국과 부상자들이 넘쳐흐르는 이곳은 황녀인 제레미야가 있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신관의 안내를 따라 급하게 이동하면서도 그녀는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조금 전 만남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용사의 뒤로 몸을 숨긴 그 애를 발견했을 때, 제레미야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잘 지냈던 거냐고 묻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았다.

그러나 경계가 가득한 눈빛에 그 애를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말을 걸 용기는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멍청한 데다가 겁이 많은 자신은 아마 그 애가 반가운 얼굴을 했어도,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마주하진 못해도 도와줄 수는 있지 않을까?

제레미야가 오늘 처음 본, 성녀의 민낯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혹, 루미에르 님에게 섬기는 다른 대상이 생긴 것은 아닙니까?”

오늘 루미에르가 보였던, 사람 속을 뒤집어 놓던 미소를 따라 한 제레미야가 입가를 가리며 말을 더했다.

“믿음이 흔들리시는 것 같던데.”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달칵, 예법에 맞지 않게 제레미야의 찻잔이 거칠게 흔들렸다.

성녀가 아주 기괴한 낯으로 입꼬리를 귀밑까지 활짝 잡아당겨 웃고 있었다.

온 얼굴로 웃고 있지만, 동시에 전혀 웃고 있지 않은, 굉장히 분노한 것 같은 그 얼굴.

제레미야가 다시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성녀가 그 웃는 낯을 눈앞에서 치워 버린 뒤였다.

그러나 다시 평소의 은은하고 고아한 웃음을 되찾은 성녀가 뱉은 말은 섬뜩했다.

“글쎄요. 루미에르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면… 처리해야겠죠?”

도대체 누굴?

루미에르를? 아니면 아스트리아를?

누가 됐든, 제레미야가 성녀의 심기를 아주 강하게 건드린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제레미야가 뭔가 상황을 수습하기 전, 일이 터졌다.

콰아앙!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신관이 신전의 ‘창고’에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걸 알렸고, 곧이어 침입자가 마족이라는 사실까지 보고되면서 대화는 흐지부지 끝이 났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제레미야는 그렇게 끝나 버린 대화가 전혀 아쉽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성녀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상태였으니, 뭘 해도 원하는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진 않았을 것이다.

또 예상보다 빨리 끝난 만남에 아스트리아까지 만나지 않았던가.

그러니 오늘은 이것으로 만족하고 이대로 신전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아버지도 마족이 나타나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하면 별말을 하지 않으실 테니까.

하지만 정말 이대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

‘아스트리아가 만약 성녀에게 붙잡힌다면…….’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기괴하기 짝이 없던 그 얼굴이 아스트리아를 향한다면?

왜 침입자가 마족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루미에르와 아스트리아가 소란이 이는 곳으로 향하는 걸 보면 그들은 침입자와 같은 편일 게 분명했다.

‘아스트리아를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루미에르가 신전을 지키려고 할 리는 없으니까.’

오전과 달리 생기가 넘치던 루미에르의 얼굴이 그를 증명했다.

‘루미에르를 빼내는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거겠지.’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이동하는 걸 테고. 하지만 성녀는 제레미야가 신전을 떠나는 즉시 총공세를 펼쳐 침입자를 붙잡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이 잘못되면, 아스트리아가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아무리 루미에르가 강하다고 해도, 물량 공세는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레미야는 신전을 떠나서는 안 됐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 더 머물러야 했다. 혹시 아스트리아가 잡혔을 때, 즉각적으로 그녀를 구해 내기 위해서라도 그게 좋았다.

그러기 위해선 성녀가 붙여 준 성기사와 신관들이 그녀를 방해하지 않을 적절한 핑계가 필요했다. 다행히 지금 이곳에는 그런 핑계들이 차고 넘쳤고.

“치, 치료를 해 주세요.”

“누가, 좀 도와줘!”

“젠장, 성력이 모자라면 붕대라도 가져와.”

“도망치지만 말고 뭐라도 좀 해 보라고!”

제레미야는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작위적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저 성기사는 치료하지 않는 건가?”

길을 안내하던 신관이 조금 느리게 대꾸했다.

“…네?”

제레미야가 크게 다친 것으로 보이는 성기사를 가리켰다.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옆에 아무도 없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대로 두면 위험하겠어. 도와주겠나?”

제레미야가 신관의 답을 듣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그러자 신전 측 인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왔다.

“제가 다른 이들에게 치료를 부탁하겠습니다. 지금은 우선 빨리 신전을 벗어나셔야 합니다.”

“마족에게서 가장 안전한 곳이 바로 신전이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두고 가는 건 말도 안 되고.”

안절부절못하던 신관이 도와 달라는 듯 제레미야의 호위들을 돌아봤다.

“물론 신전은 마족들에게서 가장 안전한 곳이긴 하지만, 저 마족은 마법사로 추정됩니다. 눈먼 공격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레미야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런 일이 터졌는데, 혼자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버지도 달가워하진 않으실 텐데.”

적당한 핑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레미야의 변명이 제법 그럴듯했는지, 호위 기사가 뻣뻣한 태도로 신관을 바라봤다.

“전하의 말씀처럼 신전이 마족에게 질 일도 없을 텐데, 뭐가 문제지? 고작 한 명이 아닌가? 무엇보다 루미에르 님께서 직접 가셨고.”

신전 측 인사들이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치고 긴가민가한 얼굴을 했다.

성녀에게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전부 루미에르가 현장에 가기 전의 일이었다.

호위 기사와 신전 측 인사들 모두 루미에르가 등장했으니 이제 이 상황이 빠르게 마무리될 거라는 확신이 든 모양이었다.

‘하, 정말이지.’

사람 하나의 등장에 좌지우지되는 전투라니.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하지만 제레미야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호위 기사들은 그녀가 현장에 남아 사람들을 돕는 것이 여론전에 도움이 될 거라 여겼을 테고, 신전 측에서도 굳이 제레미야를 내보낼 필요는 없다고 계산하고 있었을 테니.

‘루미에르가 그들의 바람대로 움직이진 않겠지만.’

뭐가 됐든 시간을 끌 수 있는 건 다행이었다. 제레미야는 그 뒤로 열성적으로 부상자들을 돌봤다.

“이쪽으로.”

“위급한 사람들 먼저 치료하도록 해!”

부상 정도에 따라 환자를 나누고 가장 위급한 이들 순으로 신관들에게 치료를 명하니, 황녀에게 반발할 수 없었던 신관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남아 다친 이들을 돌봤다.

루미에르가 사람들을 뒤로 물리고 난 뒤에는 더 많은 부상병들이 몰려왔기에 제레미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감사합니다, 전하!”

“이, 이리 더러운 상처를…….”

그녀의 치료를 받아 감격하는 자들과 부담스러워하는 자들의 시선을 의식할 새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덕분에 아스트리아에 대한 걱정을 잊을 수 있어 그녀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한참 그녀를 말리던 신관들도 결국 제레미야를 신전에서 내보내길 포기하고 부상자를 살폈다.

현장에서 온 성기사들이 루미에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 현격히 전투가 안정되고 있다고 보고를 한 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간헐적으로 계속되는 폭발음에 사람들이 조금씩 걱정을 드러낼 때였다.

“생각보다 오래 싸우지 않아?”

“만만치 않아 보였잖아. 우리가 다 덤벼도 상대가 안 됐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용산데. 이러다가 무슨 일 나는 거 아니야?”

“바깥에 지원은 요청한 거야?”

“폭발음이 얼마나 났는데, 다들 우리한테 뭔 일 났는지는 알걸?”

“그런데 왜 아무도 안 와?”

“그러니까……. 평소에는 그렇게 도와 달라고 매달리더니.”

자기들끼리 수군덕거리던 성기사들이 제레미야를 발견하고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의식하며 말을 바꿨다.

“하하하, 그래도 우리는 황녀 저하께서 직접 이렇게 치료도 해 주시잖아.”

“그래,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야.”

한참 그녀를 찬양하던 그들은 제레미야가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몸을 돌리자 다시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그래도 황궁은 도움을 주겠지. 황녀가 여기 있는데.”

“맞아. 저 여자가 여기 있어서 다행이야.”

그 속물 같은 대화에 비웃음을 삼키는데 호위 기사가 다가왔다.

“처리할까요?”

“됐어. 자기들도 불안해서 저러는 거겠지.”

손을 휘젓고 다시 다른 환자를 찾아 몸을 돌리려는데, 순간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르릉-!

땅을 울리는 진동과 귀를 찢을 듯한 소음.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 외치는 소리까지.

“건물이, 건물이 무너진다!”

저 멀리, 아스트리아가 들어갔을 것이라 여겨지던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갑자기 해가 진 것처럼 주변이 어두워지고, 휘익-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은 바람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뒤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스산하게만 느껴졌다.

‘뭐…….’

먼저 하늘을 쳐다본 이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제레미야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순간, 누군가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위, 위에!”

“저게 뭐야?”

“아아악!”

“마족들이다!”

칼에 베인 듯 쩌억, 갈라진 하늘과 그 사이에 나타난 시커먼 구멍에서 날개 달린 말을 탄 마족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건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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