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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04) (104/145)

얼떨결에 레라지에와 둘이 있게 된 진이 바닥에 쭈그려 앉아 어색하게 물었다.

“무사하겠죠?”

그러나 나름 평범하다고 여긴 질문에 돌아온 반응은 무서웠다.

레라지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손에서 뚜둑거리는 소리를 내자, 진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레라지에가 표정을 풀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그런 걸 왜 물어보지? 애당초 내가 누군지 알면서 여길 왜 들어왔어?”

역시 지금 진이 저지른 짓은 마족이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선택을 했으니, 돌이킬 수는 없는 일.

진은 짐짓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줄을 선 것뿐입니다. 적어도 이쪽은 날 죽이지 않을 것 같아서.”

“호,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는 눈빛에 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적어도 그 여자랑 루미에르는 절 죽이지 않겠죠.”

“오호.”

이번에는 좀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역시, 루미에르나 제냐는 진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눈치를 좀 덜 봐도 괜찮지 않을까?

‘좀 잘 보이는 것도 좋을 것 같지.’

그래서 진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신경 쓰였던 레라지에의 몸을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다쳤습니까?”

“그래. 다쳤어.”

“좀 봐 주겠습니다.”

겁이 나지만, 배짱이 넘치는 척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레라지에가 같잖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지금 날 죽이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럼 계약도 해지될 텐데.”

웃기시네.

많이 다친 것처럼 보여도 레라지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여유로운 기세는 강자 특유의 것이었다.

‘죽이겠다고 덤볐다가 오히려 이쪽이 꽥, 이라고.’

그 정도 눈치도 없으면서 줄을 서겠다고 여기로 들어온 게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너무 빌빌 기는 건 자존심이 상했고, 무엇보다 루미에르와 제냐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진은 허세를 부렸다.

“그건 루미에르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해도 됩니다.”

그리고 그런 진의 태도는 나쁘게 작용하지 않았다.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보던 레라지에가 벽에 몸을 기대며 답했다.

“솔직하네? 뭐, 네가 해 줄 건 없어. 이건 성력에 의한 상처니까. 알아서 낫게 둬야 해.”

“뭐, 그렇다면야.”

진이 다시 바닥에 주저앉으려는데 레라지에가 심드렁한 얼굴로 손을 까딱였다.

“대신 아까 내가 그런 것처럼 폭죽이나 터뜨려. 바깥에서 싸우는 것처럼 보이게.”

그건, 좀… 마법사의 자존심이…….

진이 침묵하자 레라지에가 위협적으로 눈을 부라렸다.

“뭐 해? 어서. 나는 꽃 폭죽이 좋아.”

정말 별걸 다 시킨다. 하지만 여기서 싫다고 바닥을 굴러도 이 마족은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진은 마법사의 자존심을 내리누르고, 레라지에가 그랬던 것처럼 펑펑, 폭죽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긴 잔소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꽃이 너무 한곳으로만 떨어지잖아. 더 넓게 퍼트려야지?”

“네?”

“색도 너무 촌스러워. 누가 이런 쨍한 색을 좋아한다고…….”

폭죽을 한 번 터트릴 때마다 레라지에의 잔소리 서너 개가 쏟아졌다.

“아름답지 않아!”

도대체 이 폭죽이 아름다워야 할 이유가 뭔데?

참다못한 진이 신경질을 냈다.

“그게 왜 중요합니까?”

그리고 진은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지금, 아름다운 게 왜 중요하냐고 했나?”

성질을 못 이겨 뱉은 말 한마디로 인해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을 끝없이 들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레라지에의 취향에 맞는 꽃 폭죽을 몇 번이나 만들어 대며 귀에서 피를 흘려 댔을까? 살살 아픈 배를 부여잡은 진이 모든 걸 포기할까 생각할 때쯤, 주변이 고요해졌다.

“응?”

이상함에 고개를 들었던 진은 레라지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왜 그럽니까?”

그리고 질문을 던지기 무섭게 바닥이 쿠르릉, 울렸다.

설마 바깥쪽에서 뭔가 눈치챈 건가? 이제는 정말로 싸우는 척을 해야 하나? 이제라도 이쪽이 마족이라고 외쳐?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데, 레라지에가 구멍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안에서 볼록 튀어나오는 머리통 하나.

“야, 너!”

그 여자였다. 진이 반가운 마음을 가득 담아 자리에서 일어나 구멍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레라지에와 눈인사를 나누던 여자가 진을 돌아봤다. 그리고 반갑게 인사를…….

“응? 왜 여기 있어요?”

누구 때문에 여기서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데? 만나자마자 할 말이 그것뿐인가?

울컥한 진이 발을 쿵 구르며 소리쳤다.

“이씨, 너희가 오라며?!”

“어…….”

그때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여자의 아래, 구멍 안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사는 나중에 하지?”

그 말에 여자가 안고 있던 머리를 향해 말했다.

“아, 올라가요. 루미에르.”

허, 이제 보니 여자는 루미에르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있었다.

“너네는 여기서도 염병을 떨고 있구나…….”

허탈함에 작게 중얼거리는데, 구멍에서 튀어나오는 루미에르와 여자 뒤로 긴 검은 머리에 시커먼 로브를 걸친, 새빨간 눈의 남자가 나타났다.

루미에르와는 다른 결의 잘생긴 미남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뒷걸음치게 되는 위압감을 가진 남자가.

“허억.”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진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자, 막 루미에르의 품에서 내려온 여자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새삼스레 놀라요?”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도대체 그 누가 마왕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진은 마지막 희망을 담아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정말, 그?”

여자, 그러니까 간도 큰 제냐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마왕이라고?

“마왕…….”

이대로 기절하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쓸데없이 강한 정신력 때문에 소원은 실현되지 않았다.

창백하게 굳어 있던 진은 쭈뼛쭈뼛 루미에르와 제냐의 뒤로 숨어들었다.

제냐가 어이없다는 듯 그런 진을 쳐다봤다.

“뭐 해요?”

“모른 척해. 모른 척.”

저치들 시선까지 이쪽으로 쏠리면 어쩌려고! 왜 이런 데서 눈치가…….

“저건 뭐지?”

마왕이 누가 봐도 그를 가리키는 질문을 던졌다.

진이 재빨리 제냐의 등허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제냐가 헛웃음을 흘리고 루미에르가 냅다 그녀를 찌른 진의 손을 내리쳤다.

찰싹-!

루미에르, 이 미친… 정말 재수 없는 놈!

악, 튀어나올 것 같은 비명을 손으로 가려 막은 진은 어색하게 마왕에게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그, 마법사입니다.”

그런 진의 인사에 제냐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진짜 멍청해 보이는 거 알지?”

그의 속을 박박 긁는 제냐를 째려보고 싶었지만 마왕의 시선에 눈을 돌릴 수가 없어서, 진은 진땀을 찔찔 흘리며 바짝 굳어 있었다.

* * *

지하가 무너지기 전 무사히 구멍을 빠져나온 건 참 다행이었다.

그 깊은 구멍을 손을 퍽퍽 박아 넣어 가며 기어오른 루미에르와 마왕은 정말 감탄스러웠고, 레라지에가 멀쩡한 걸 보자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제냐는 구멍을 나오고 나서 이 남자를 마주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와 버렸잖아요.”

팔꿈치로 루미에르의 옆구리를 찌르자 당황하지도 않았는지 그는 예쁜 미소만을 보여 줬다.

제냐는 마왕의 앞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마법사를 구해 줄 이가 그녀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제냐는 마왕의 시선을 가리듯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음, 그러니까, 절 도와준 마법사예요. 용…사의 동료고요.”

“그게 왜 여기 있지?”

계산 실패로?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비웃을 게 뻔했다. 제냐가 답을 고르는데 때마침 발밑이 또 한 번 쿠르릉, 웅장한 소리를 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곧 무너지는 거 아니에요?”

제냐의 물음에 레라지에가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무, 무너져?”

뒤에 있는 마법사는 난리가 났지만.

“이거 밑에서부터 무너지고 있거든.”

제냐의 설명에 패닉에 빠진 마법사가 넋을 잃었다. 마법사를 힐끗 쳐다보던 제냐가 마왕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요? 이대로 떠나요?”

목표하던 물건을 챙기긴 했으니까 일차적 목표는 달성한 셈이 아닌가?

하지만 마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 건물이 무너지는 건 이 물건을 챙겼기 때문이잖아?”

“그런데요?”

“그럼 성녀가 직접 여기로 행차하시겠지. 그 여자는 이걸 제 목숨줄처럼 여기고 있을 테니까.”

마왕이 보란 듯 들고 있던 상자를 들어 보였다.

“그러니까 나는 얌전히 여기서 그 여자가 오는 걸 기다릴 거야.”

“이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요.”

제냐가 지하와 마찬가지로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하는 건물을 가리키자 마왕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뭐 어때? 이제 마법도 쓸 수 있는데.”

하긴 마법을 사용하는 마왕이 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무사히 그들을 따라온 걸 보면 몸 상태는 그리 나쁜 것 같지도 않았고.

제냐가 다시 한번 마왕의 몸을 살피는데, 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원한다면 먼저 저택으로 가 있어도 좋아.”

가 있으라고? 반길 이야기이긴 했다. 안 그래도 성력을 써서 피곤하기도 하고, 본래 계획은 저 둘이 소란을 피울 때 루미에르를 데리고 신전을 빠져나가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성녀와 해결해야 하는 게 있는 건 루미에르도 마찬가지잖아.’

그녀의 이기심으로 루미에르가 이 일에 연관되지 않았으면 했지만…….

‘루미에르가 원한다면.’

제냐가 루미에르를 돌아보며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그러자 루미에르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남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제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미에르가 마왕을 돌아봤다.

“물론 그 전에, 제가 제냐의 방 테라스에서 발견됐었던 날의 일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아까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던, 마왕이 루미에르를 구해 줬다던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는 소리였다. 문제는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마왕의 과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제냐가 루미에르를 따라 마왕을 쳐다보자 그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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