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게 웃고 있는 루미에르를 쳐다보며 입을 뻥긋거리는데, 옆에서 심술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끼어들어서 미안하지만, 그러고 있을 시간 없어.”
전혀 미안하지 않은 것 같은 마왕의 말투에 제냐가 코웃음을 쳤다. 그와 동시에 바닥이 크게 들썩였다.
쿠쿵. 쾅!
제냐는 양쪽에서 그녀를 붙잡아 오는 마왕과 루미에르를 본능적으로 콱 붙잡았다. 그리고 흔들린 게 분명한 벽과 바닥을 응시했다.
“뭐죠?”
“이걸 꺼내면 무너지게 만들어 둔 것 같은데?”
심각한 제냐와 달리 마왕이 심드렁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며 답했다. 아니, 그런 걸 왜 이렇게 태연하게 말하는데?
“무너진다고요?”
“그래.”
마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큰 굉음과 함께 머리 위로 돌가루가 부스스,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좀 해 보세요!”
제냐가 찰싹 마왕의 팔뚝을 때리자 그가 눈을 찌푸렸다.
“지금은 마법 못 써.”
못 써서 뭐? 그래도 뭔가 방안이 있을 것 아닌가? 마왕이잖아!
“그래서 이렇게 무너지는 돌 아래에 깔려서 죽자고요?”
“나는 이 정도로 안 죽는데.”
그러면서 루미에르를 쳐다보며 삐죽 웃는 꼴이 그건 저자도 마찬가지라는 소리 같았다.
평소보다 더 삐딱한 그의 태도에 제냐가 빽 소리를 질렀다.
“저는 죽거든요?!”
씩씩거리며 다시 한번 마왕의 팔뚝을 주먹으로 내려치자 마왕이 구시렁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둘만의 세상에 빠져 있길래 살 수 있는 줄 알았지.”
끝까지 성질을 박박 긁는 마왕에 욕을 중얼거리는데, 루미에르가 제냐를 부축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 마요, 제냐.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고는 처음 여기에 왔을 때처럼 아이를 안듯 제냐를 한 손으로 받쳐 안는 것이다.
아주 잠깐 마왕의 앞에서 이런 꼴을 보여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제냐는 모든 걸 포기했다.
‘뭘 해도 지금 다 삐딱하게 볼 텐데, 어때?’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무사히 여기를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제냐는 루미에르에게 안긴 덕에 높아진 시야로 정면에서 마왕과 눈을 맞췄다.
“움직이실 수 있으세요?”
마왕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하듯 아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매우 피곤하고 지친 얼굴이었다.
이건 또 무슨 반응이람.
“뒤따라가겠다.”
정말 괜찮은 건가 싶어 유심히 그를 살피는데, 루미에르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엄청난 속도에 제냐는 남을 걱정할 여유가 사라졌다.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는 마왕을 확인한 제냐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진은 지금 스스로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게 맞는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이제라도 돌아갈까?’
루미에르를 돕는 건 설령 들키게 된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 마왕이 있다는 걸 들켰다간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진이 지금 다시 신전으로 돌아온 것은 그의 심장에 걸린 계약 때문이었다.
‘마법을 잃을 순 없어.’
다시 돌아온 루미에르는 변했지만, 그래도 진은 그를 믿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가 시킨 일만 잘해 낸다면 심장에 걸린 계약을 풀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이들을 재우고 조용한 저택에 홀로 있으면서 든 생각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마왕이 아닐 가능성은 충분하잖아?’
그냥 겁주기 위해서 한 소리일지도 몰랐다. 진이 마왕이라는 단어에 분개하니까 그를 겁주려고 한 것이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루미에르가 마왕의 아래에 들어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함께 있던 여자가 인간이라는 점도 진의 가정에 확신을 더했다.
진은 그렇게 상황을 합리화하며 신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루미에르가 말한 것처럼 간헐적으로 펑펑 소리가 나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의 소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진 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소리가 나는 곳과 한참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던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다가오는 진을 발견하고는 어리둥절한 낯을 했다.
“아까 부를 때는 안 오더니?”
“그러니까 말이야!”
누군가 비방의 말을 쏟아 내자 진이 뭐라 대꾸하기 전, 다른 이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들어 보니까 루미에르 님이 시킨 일을 하고 있었다던데?”
“…그래?”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던 신전 사람 중, 제법 높은 축에 속하는 신관이 진에게로 다가왔다.
“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그럼 저희랑 같이 대기하시죠.”
네가 못마땅하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루미에르가 직접 일을 맡긴 사람이니까 옆에 있는 건 허락해 주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대기라니. 진이 바로 의문을 표했다.
“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밖에서 대기한다고?”
“루미에르 님께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다들 물러나 달라 부탁하셨습니다.”
그 답을 듣는 순간, 진은 애써 무시하고 ‘마왕’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진이 딱딱하게 굳자,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신관이 그를 위아래로 훑더니 말했다.
“괜히 방해하지 마시고 저희랑 함께 계시죠. 지금도 그 마족 놈과 꽤 격렬한 것 같은데.”
마족. 피할 수 없는 단어의 등장에 진이 다급하게 신관의 팔을 붙잡았다.
“저 안에 마족이 있다고?”
“왜 저래?”
“무서워서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쯧쯧.”
매달리는 진의 모습에 신전 인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를 비웃었다.
진이 입술을 달싹이며 신관과 성기사들을 바라봤다.
‘정말로 마족이랑, 마왕이랑 손을 잡았다고?’
그렇다면 이건 절대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반드시 말해야 하는…….
스스로의 심장 소리에 귀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심장 소리를 뚫고 신관들의 비아냥 어린 대화가 들려왔다.
“쓸모가 없다니까?”
“보아하니, 이제 곧 새로운 동료들을 모집할 것 같던데.”
“뭐, 그렇죠. 다른 놈들도 쓸모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적어도 루미에르 님이 없는 사이 방패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대화를 듣는 순간, 몽롱하던 정신이 깨어났다.
‘나 지금 평가당하는 중이었지.’
이대로 살려 둘지, 아니면 폐기 처분할지.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서 대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태도를 보면…….
십중팔구 이번 일이 끝나면 진은 폐기 처분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에게 루미에르의 배신을 말하면 그의 말을 믿어 줄까?
‘아니.’
설령 진의 말을 믿는다고 해도, 앞으로 그의 앞날은 뻔했다.
‘배신자 용사와 함께 처리되겠지.’
그냥 처리되는 게 아니라 아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확률이 높았다.
‘내가 왜 그런 꼴을 당해야 하는데?’
자기들도 마족들이 무서운 건 똑같으면서. 그래서 루미에르에게 다 맡기고 맨날 이 신전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으면서.
‘적어도 난, 실제로 마족과 싸워 본 적은 있다고.’
저들이 진을 이렇게 비웃고 깔보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했다.
‘…절대 그렇게 죽어 줄 순 없어.’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마음을 정한 진은 흐물흐물하던 눈매를 날카롭게 치떴다.
“닥쳐.”
“…네?”
지금 뭐라고 한 거냐고, 귀를 파는 신관에게 진이 사납게 말했다.
“시끄러워. 난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해.”
“못 들었습니까? 저 안에 마족이…….”
진은 미친 거냐는 신관의 얼굴을 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그래, 너희들의 용사가 일을 마치면 바로 현장으로 따라오라고 했어.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신관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를 밀쳐 내며 앞으로 나선 진은 그를 막으려는 신전 사람들을 매섭게 노려봤다.
“말 안 들었다가 문제가 생기면 누구 탓인지는 알지?”
그러자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진은 그들에게 비릿한 미소를 지어 주며 건물로 다가갔다.
간헐적으로 펑펑, 들려오는 소리가 무서웠지만 그래도 저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건물에 입성하기 전, 진은 그의 몸 주위에 할 수 있는 한 가장 단단하게 보호막을 쳤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그렇게 드디어, 가장 지저분하고 엉망이 된 방 안에 도착했을 때.
진은 그의 머리 위로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가루를 맞이했다.
“…응?”
색색의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꽃잎이 그의 주위로 아름답게 휘날렸다. 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 잔상을 눈으로 좇는데 앞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다시 싸워야 하나…….”
진은 그제야 방 한쪽에 자리한 밝은색의 로브를 입은 사내를 발견했다.
“레라지에?”
“응?”
이름이 불릴 줄 몰랐다는 듯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사내는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얼굴을 어딘지 모를 익숙한 하얀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의 주위에 맴도는 힘은 그의 심장에 있는 그것이 맞았다.
마지막 확신을 가지려고 진은 잘 열리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
“당신 정말 마족입니까?”
그러자 진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너, 그 마법사군?”
동시에 사내의 손에 고이는 마나, 아니. 이제는 알겠다. 저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힘은 마력이었다.
진은 그에게 마법이 날아오기 전 재빨리 말했다.
“루미에르가 부른 겁니다! 그 여자랑 같이요!”
필사적으로 뱉은 말에, 사내의 손에 감돌던 위협적인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그래?”
그뿐만 아니라 묘하게 위압감을 주던 목소리에도 힘이 빠졌다. 사내의 눈치를 보던 진이 주춤거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째서 혼자 있는 겁니까? 루미에르는요? 그 제냐라는 여자는 또 어디 있고요?”
이 안에 루미에르와 제냐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 사내뿐인가?
솔직히 그 두 명도 별로 믿음직한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족과 있는 것보다는 같은 인간과 있는 게 좋았다.
‘어디, 마법으로 숨겨 놨나?’
명령한 대로 돌아온 걸 봤으면 얼른 나타나서 저 마족에게서 자신을 지켜 줬으면 좋겠다. 진은 간절하게 두 사람을 찾아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사내는 진의 바람을 배신했다.
“여기 안에.”
“여기가 어디……?”
사내가 태연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그의 발 옆에 있는 시커먼 구멍을 가리켰다.
“여기요?”
아니, 도대체 그 둘은 왜 이딴, 보기만 해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 들어갔단 말인가?
‘나보고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