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성녀 클레어
마법이 없는 상황에서 들이차는 물을 피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마르바스는 도망가는 것보다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쏟아지는 물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엘리고스나 제냐가 보았다면 욕을 한 사발 퍼부었을 만큼 미친 짓이었지만, 마르바스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선택은 오만이었다. 바로 코앞에 있는 천계의 보석을 두고서 마르바스는 목을 움켜쥐었다.
꼬르륵-
아무리 인간과 비교도 안 되는 신체 능력을 지닌 마족이라고 해도, 몇 분 이상 숨을 참고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본능적으로 마법을 써 보려고 했지만, 손안에 들어차는 것은 없었다. 결국 발버둥을 치던 마르바스는 천천히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가물가물해지는 시야 너머, 그리워하던 얼굴이 나타났다.
[마르바스.]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과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목소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지막의 순간 그를 데리러 와 준 클레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눈을 감으려는데, 순간 볼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응?
파르르, 눈이 떨리는데 이번에는 반대쪽 볼에 또 한 번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연이어 양 뺨을 착착 내리치는 것 같은…….
“다시 잠들지 말고 일어나라고!”
헉!
귀 옆에서 들려오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에 번쩍 눈을 뜬 마르바스는 다시 한번 그의 뺨을 내리치는 클레어를 발견했다.
“클…….”
“일어났어요?!”
아니, 저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진 얼굴의 주인은 클레어가 아니라 제냐였다.
뭐, 이런 상황에서는 클레어였더라도 똑같이 굴었겠지만.
순간 어이없는 웃음이 입가에 샜다.
* * *
마왕은 눈을 뜨고도 계속해서 환상을 헤매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이상한 웅얼거림만 내뱉었다.
‘깨어난 거야, 만 거야?’
멍하니 눈만 끔뻑거리는 마왕에 속이 뒤집힌 제냐가 루미에르의 말을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약간이나마 정신이 깨어나고 나서는 실컷 패 주면 될 것 같군요.’
다급하게 마왕을 쳐다보면서도 곁눈질로 손을 쳐다보는데, 그 시선을 귀신같이 눈치챈 루미에르가 말했다.
“때려요.”
정말, 때리라고?
“하지만…….”
“아니면 제가 때릴까요?”
불쑥 다가오는 단단하고 커다란 손에 제냐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게요!”
지금 마왕은 루미에르의 손에 맞았다가는 깨어나는 게 아니라 도로 기절할지도 몰랐다.
“흐음, 그래요? 제가 해도 되는데.”
아쉽다는 듯 느릿하게 손을 물리는 루미에르에 제냐는 후, 숨을 가다듬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짜악-!
복도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어찌나 경쾌하던지.
소리만큼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마왕이 움찔거리며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니 제냐가 더 강하게, 여러 차례 마왕의 뺨을 때린 건 자의가 아니었다. 때릴수록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지만,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갔지만!
‘암, 그렇고말고.’
역시 한 번 더 때려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제냐가 다시 손을 들었다.
“일어나시라니까요?!”
그러나 뺨에 손이 부딪치기 전, 마왕이 그녀의 손을 낚아채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만 때려라. 생각 중이니까.”
성격 나쁜 말투가 딱 마왕이었다. 맑은 붉은 눈을 마주한 제냐는 크게 안도했다.
“깨어났으면 깨어났다고 티를 내셔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자 마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눈을 떴으면 그게 일어난 거지.”
허, 제냐가 콧방귀를 뀌었다.
“눈만 떴지 계속 정신 못 차리셨거든요? 그놈의 클레어, 클레어만 부르셨으면서.”
그렇게 옛 연인이 보고 싶었던 걸까? 하긴 복수를 하겠다고 이 짓을 한 거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제냐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마왕이 이내 다시 그녀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왜 여기에 있어?”
갑자기? 괜히 민망하니까 하는 질문이 고작 이거라고?
“소란이 일어나면 바로 빠져나가라고 했을 텐데.”
제냐가 보란 듯 그의 꼬락서니를 눈으로 훑었다.
“저희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단 말예요!”
“죽지는 않았을 거야.”
제냐가 말없이 마왕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마왕도 찔리긴 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제냐의 눈빛을 피했다.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아시니 다행이네요.”
여기서 더 했으면, 뺨을 한 대 더 날렸을 것이다. 제냐가 한숨을 푹 쉬는데,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루미에르가 끼어들었다.
“거기까지 하죠.”
마왕의 시선이 루미에르에게 닿았다.
“만났군.”
제냐는 마왕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 설명했다.
“루미에르가 없었으면 그대로 죽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웬만하면 입을 좀 다물었으면 했는데, 죽을 뻔했어도 마왕은 마왕이었다.
“무사히 만났으면 그대로 나갈 것이지, 뭣 하러 여기까지 와?”
하,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루미에르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입에서 뾰족한 말이 튀어나오려는데 그보다 먼저 루미에르가 답했다.
“당신이 여기로 제냐를 보낸 것과 같은 이유죠.”
루미에르가 제냐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에 약하니까요.”
그러자 마왕이 맞장구를 치듯 제냐를 쳐다보며 혀를 쯧쯧 찼다.
“다 저게 문제군.”
서로 시선이 마주친 두 남자가 함께 긴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왜 자기들끼리 손을 잡아?’
제냐가 할 말을 잃고 둘을 쳐다보다가 손뼉을 쳐 주의를 끌었다. 그들은 아직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됐고요. 저거 어떻게 할지나 정하죠?”
마왕의 시선이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저거…….”
제냐는 다시 한번 손뼉을 쳤다.
“쳐다보지 마세요. 또 홀리면 이번에는 열 대씩은 때려 줄 테니까.”
보란 듯 손바닥을 들어 보여 주자 마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미 때린 것 아닌가?”
제냐는 꽤 세게 때렸음에도 매끈하기 짝이 없는 마왕의 뺨을 쳐다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뭐, 새어 보기나 하셨어요?”
흔적이 남은 것도 없고 남았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구하려고 한 건데 뭘 어쩌겠는가?
천연덕스러운 제냐의 표정에 황당함을 드러낸 마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일단 그냥 넘어가지.”
착착 감기던 손맛을 떠올리며 기분이 좋아진 제냐가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있는 마왕을 일으켜 줬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물기가 가득한 바닥에 퍼질러 누워 있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기나 하세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마왕을 부축하는데, 루미에르가 자연스레 그녀의 앞을 가로막더니 마왕을 일으켜 세웠다.
마왕이 루미에르를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었다. 다행히 그의 입에서 또 빈정거림이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제냐는 상체를 일으켜 세운 마왕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어요?”
“부서트릴 거다.”
저 사특한 물건을 없애는 건 제냐도 동의하는 일이었지만, 타이밍이 좀 그랬다.
“지금 가능하시겠어요?”
이제 더 이상 그를 치료할 만한 성력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또 홀리면 귀찮아지니까 그대로 들고 나가는 편이 낫겠죠. 하지만 그냥 가져가면 또 그거대로 문제가 생길 텐데요?”
루미에르도 제냐를 따라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러자 마왕이 품에 대충 쑤셔 넣었던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물건을 보관할 상자를 가져왔다.”
제냐는 마왕의 주머니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꽤 커다란 상자를 보며 감탄했다.
“아까도 느꼈는데 많이도 챙겨 오셨네요.”
기름 램프가 나온 것도 신기했는데, 여러모로 꽤 열심히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제냐가 또 뭐가 들어 있을까 주머니를 쳐다보는데, 마왕이 주머니 안쪽을 빤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내 주머니를 뒤졌나?”
제냐는 딱히 놀라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덕분에 살았으니까 그냥 넘어가 주세요.”
“옷이 이 모양인 건?”
제냐가 훤히 드러난 마왕의 복부를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상처를 확인하려고요. 원래 반쯤 찢어져 있었으니까 어차피 버릴 물건이었어요.”
평소에도 갈아입으면서 숱하게 망가트리는 옷이니 제냐가 몇 개쯤 찢어 먹었다고 해도 별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비용을 청구하면 정말 양심이 메마른 것이 분명했다.
마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주머니에서 로브를 꺼내 걸쳤다.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마왕의 행동에 만족한 제냐가 그가 꺼낸 상자를 가리켰다.
“이건 뭔데요?”
“지하에 걸린 것과 비슷한 마법이 걸린 상자다.”
아하, 마법 차단? 단박에 상자의 용도를 깨달은 제냐가 고개를 기울였다. 겉보기에는 그냥 시커멓고 딱딱해 보이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상자인데.
“그런데 누가 넣어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릴 틈도 없이 옆에 있던 루미에르가 상자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할게요.”
아니,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제냐가 화들짝 놀라는데 어느새 유리관 앞으로 다가간 루미에르가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쨍그랑.
“평범한 유리네요.”
평범한 유리라 한들, 주먹으로 쳤다고 다 저렇게 박살이 나진 않을 텐데.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눈으로 훑던 제냐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손 괜찮아요?”
“네, 멀쩡해요.”
루미에르는 아무렇지 않게 보석을 꺼내 상자 안에 집어넣고는 다시 제냐에게로 다가왔다.
“여기.”
마왕에게 던지듯 상자를 건네준 루미에르가 제냐를 쳐다봤다. 이제 얼른 가자는 의미가 듬뿍 담긴 눈빛이었다.
딱히 무언가에 홀린 기색 없는, 맑고 깨끗한 눈.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루미에르는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요?”
다행이긴 하다만. 제냐나 마왕은 너무나도 빠르게 보석에 홀렸었는데 어째서 루미에르만은 이렇게 멀쩡한 걸까?
‘설마 무슨 훈련을 한 건가?’
다시 한번 신전에 대한 악감정이 무럭무럭 자라나려는데, 루미에르가 봄바람이 일듯 배시시 미소를 흘렸다.
그러고는 찌푸려진 제냐의 미간을 엄지로 문질러 주며 말하는 것이다.
“저는 가장 보고 싶은 게 지금 눈앞에 있거든요.”
“와아.”
애정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제냐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