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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101) (101/145)

눈을 감고 있는 마왕은 제냐에게는 너무나 낯설었다. 10년 동안 마왕의 옆에서 일했지만, 제냐는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낯설어서, 처음 보는 모습이라서 이렇게 시선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 그게 맞아.’

살아 있는지조차 의심될 정도로 아무런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게 너무 신기해서.

그런데… 살아는 있는 건가?

“제냐, 숨 쉬어요.”

그 말에 제냐는 그녀가 숨조차 쉬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쿨럭거리며 크게 숨을 들이쉰 제냐는 숨을 다듬을 시간도 없이 마왕의 옆에 주저앉았다.

머뭇거리며 마왕의 코 옆에 손을 가져갔다.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이 무섭게 떨리면서도 기어이 마왕의 코 밑에 닿고 잠시 뒤.

“아.”

“살아 있습니다.”

루미에르가 제냐의 옆에 쭈그려 앉아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덜덜거리던 떨림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아주 약하긴 하지만 마왕은 숨을 쉬고 있었다.

훅 끼쳐 오는 안도감에 제냐가 앓는 소리를 내는데 루미에르가 미간을 좁혔다.

“옷이 다 젖었어요.”

믿을 수 없는 말에 제냐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고 루미에르를 돌아봤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하지만 제냐의 사나운 표정에도 루미에르의 표정은 담담했다.

“어느 정도는요.”

“루미에르!”

커다란 목소리가 지하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가 마왕의 목숨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루미에르가 지금 움직인 건, 전부 그녀의 부탁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당신이 마족들을 싫어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마왕은 루미에르를 살려 준 적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걱정하는 척은 아니더라도 잠시간 침묵하고 있어 줄 수는 있는 것 아닌가?

“네?”

하지만 전혀 모르겠다는 그 얼굴을 본 순간 제냐는 깨달았다.

“…내가 말 안 했나요?”

제냐의 물음에도 여전히 루미에르의 얼굴에는 물음표만이 가득했다.

‘들은 게 한두 개였어야지.’

그래서 당연히 루미에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왕이 용사였다는 말은 해 줬지만, 루미에르가 더 이상 이 일에 끼어드는 게 싫어서 그 외의 것들에는 입을 다물었으면서도.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제냐가 조금 흥분이 잦아든 목소리로 말했다.

“…마계에서 정신을 잃은 당신을 내 방 테라스에 데려다 두라고 한 게 마왕이래요.”

“그게 무슨…….”

루미에르는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확실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는 맞았다.

마왕이 용사를 살리겠다고 자기 시녀의 방에 데려다 놓다니.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마왕은 내 힘이 당신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았어요. 원래 당신이랑 같은 체질이었대요.”

루미에르가 그녀와 마왕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이해를 위해선 모든 전후 사정을 이야기해야 했는데, 시간이 없었다.

“상황 설명은 나중에 하고요. 지금은 마왕 좀 어떻게 해 봐요!”

혹시 정신을 잃게 할 만한 상처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옷에 피는 많이 묻어 있는 것 같은데…….”

찢어져서 너덜거리는, 새빨갛게 물든 마왕의 옷을 손짓하던 제냐는 기다리다 못해 그의 옷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물기를 가득 머금은 탓인지 옷은 잘 벗겨지지도 않았다.

“왜 이렇게 안 돼?!”

제냐가 짜증스레 옷을 꽈악, 잡아당기는데, 옆에서 단단한 손이 튀어나와 옷을 손쉽게 뜯어냈다.

지이익.

이제까지의 사투가 우습게 종이인 양 찢어지는 옷과 함께 루미에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 정말로 다 설명해 줘야 해요.”

“그래요.”

크게 고개를 끄덕인 제냐가 드러난 마왕의 몸을 더듬는데, 루미에르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러고는 마왕의 몸을 이래저래 살피며 빠르게 진단을 내렸다.

“다쳤던 건 맞지만, 상처는 완벽히 회복됐습니다.”

“그럼 깨어나지 못하는 건…….”

제냐는 아까 전부터 루미에르의 뒤로 아른거리는 유리관 안에 장식된 투명한 수정구를 쳐다봤다.

아니, 쳐다보려 했다.

제냐는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그녀의 뺨을 붙잡고 시선을 막는 루미에르를 돌아봤다.

“혹시 모르니까 쳐다보지 말아요.”

아름다운 푸른 눈이 경계의 빛을 띠었다.

“제냐의 짐작대로 보석에 홀려 있는 모양입니다.”

제냐는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들었던 내용을 되새겼다.

“그러니까, 강하게 홀리면 잠에 빠진다고 했죠. 도움이 없으면 깨어나지 못한다고.”

“네.”

“어떻게 해야 일어날 수 있죠?”

불안하게 마왕을 쳐다보며 묻자 루미에르가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뭘 보고 있냐에 따라 다른데…….”

루미에르의 말이 끝나기 전, 마왕이 쿨럭거리며 무언가를 뱉어 냈다.

화들짝 놀란 제냐가 마왕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그의 입가에서 흐르는 액체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물?”

주변에 물이 있던데, 혹시 물이라도 먹은 걸까? 이제라도 가슴에 압박을 줘야 하나?

그러나 그게 시작이었다는 듯 마왕의 입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입, 코, 눈, 귀 할 것 없이 모든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제냐의 몸이 다시 얼어붙었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물과 관련된 꿈인 모양입니다.”

“네?”

제냐가 흐르는 물을 눈으로 좇는데 루미에르가 설명했다.

“대상자에게 꿈이 현실이 된다는 건, 꿈에서 다치거나 죽으면 실제로도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뭐라고요?”

제냐가 경악해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그럼, 지금 이러다가 숨이 멎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루미에르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에 제냐는 더 초조해졌다.

“어떻게, 어떻게 좀 해 봐요.”

애가 탄 제냐가 마왕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처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고, 흘러나오는 물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다급하게 마왕의 입을 틀어막아 봤지만 그런다고 물이 안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죽어? 이렇게 허무하게? 설마, 마왕이잖아. 이렇게 죽을 리가…….

‘그런데 죽으면?’

진짜로 이렇게 죽어 버리면…….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제냐는 하얗다 못해 퍼렇게 변하는 마왕의 입술을 쳐다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때 이제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손이 제냐의 양손을 붙잡았다.

“제냐.”

제냐는 여전히 마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머리카락을 뽑을 듯 꽉 쥐고 있는 손을 강제로 잡아 내린 루미에르가 강하게 그녀를 불렀다.

“제냐!”

퍼뜩, 정신이 든 제냐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 푸른 눈을 마주 봤다.

“진정해요.”

“어떠, 어떻게 진정…….”

더듬거리는 제냐에 루미에르가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흔들리면 안 돼요. 그럼 당신도 보석에 홀리게 돼요.”

루미에르가 다시 보석으로 향하려던 제냐의 시선을 붙잡으며 집중하라는 듯 손에 힘을 줬다.

“숨 쉬어요. 아주 천천히. 들이쉬고 내뱉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몇 번이나 호흡을 가다듬었을까. 루미에르가 마왕을 눈짓했다.

“제냐, 다시 마왕을 봐요.”

다시 보라고? 돌아봤는데 여전히 상태가 엉망이면? 상태가 더 심해졌으면?

머뭇거리며 돌아본 마왕의 입에서는 여전히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입술도 새파랗지 않았고, 흘러나오는 물도 처음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무슨…….”

제냐가 입술을 깨물자, 루미에르가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환각을 보여 준다고 했잖아요.”

“그럼 그게…….”

“제냐가 뭘 두려워하는지 본 거예요.”

하. 제냐는 이번에는 보석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루미에르의 말에만 집중했다.

“보석에 홀리지 말아요.”

루미에르가 흔들림 없이 말했다.

“해결 방법이 있어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필요해요.”

내가 필요하다고.

“그러니까 약해지면 안 돼요.”

어느새 가쁘던 숨은 차분해져 있었다.

“진정됐어요?”

제냐가 말없이 시선으로 답하자 루미에르가 옅게 웃었다.

“잘했어요. 그럼 해 볼까요?”

“네.”

루미에르가 쓰러진 마왕을 돌아보며 설명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성력을 이용해 깨우는 거예요.”

“성력이요?”

“네. 문제는 완전히 깨어나려면 많은 양의 성력이 필요하다는 건데.”

곤란했다. 제냐가 가진 성력의 양은 턱없이 부족하니까.

하지만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다면 루미에르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냈을 것 같지 않았다. 제냐가 루미에르를 가만히 쳐다보자 그가 씨익,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약간이나마 정신이 깨어나고 나서는 실컷 패 주면 될 것 같군요.”

“네?”

황당함에 제냐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루미에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요.”

정말 농담이 맞나? 누가 봐도 진심이 가득했던 것 같은데. 제냐가 할 말 많은 얼굴로 루미에르를 쳐다보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설명을 이어 갔다.

“마왕은 마왕이잖아요? 정신력이 강하겠죠. 여기가 현실이라는 걸 알려 줄 틈만 있으면 알아서 빠져나올 거예요.”

그건 너무 무책임한 소리가 아닌가?

“안 되면요?”

루미에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지나가는 신관 하나 붙잡고 강제로 시키면 되죠.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실제로 만약 제냐가 실패한다면, 마왕은 다른 신관을 붙잡아 오는 사이 질식해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루미에르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믿어 주고, 이게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굴어 주니까 긴장이 잦아드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너무 긴장해서 이제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걸지도.

뭐가 됐든 이렇게 차분해지는 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알았어요. 해 볼게요.”

제냐의 답에 루미에르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제냐는 그 미소를 덧그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왕의 이마 위에 두 손을 올렸다. 곧이어 새하얀 빛이 마왕의 머리에 스며들었다.

어두운 공간 탓인지, 오늘따라 유독 환한 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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