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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98) (98/145)

루미에르와 함께 현장에 도착한 뒤, 신관과 성기사들을 물리는 건 생각보다 매우 쉬운 일이었다.

신관과 성기사들은 루미에르를 발견하자마자 그에게 일을 넘기기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루미에르 님! 정말 잘 오셨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이제 물러날 수 있겠어.”

“도대체 왜 이제야 온 거야?”

“살았다!”

안 그래도 거슬리기 짝이 없는 반응 사이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이 섞여 있었다.

제냐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매섭게 눈을 치떴다. 그사이 현장에서 제일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루미에르에게 급하게 다가왔다.

“저희가 보낸 전령을 받으셨군요?”

아니, 이쪽이 알아서 왔다.

‘전령은 도망갔거나, 나한테 그런 것처럼 밑에 신관들한테 일을 떠넘겼겠지.’

단순히 길이 엇갈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신전에 대한 인상이 너무 최악이라서 그런지 딱히 좋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제냐가 그 삐딱한 눈빛을 숨기지 않고 그들을 쳐다보는데, 루미에르는 그들이 원하던 선량하고 믿음직한 용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줬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나머지는 이쪽에서 맡도록 하죠.”

“네, 알겠습니다.”

사양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신관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댔다.

붕붕 흔들리는 저 얼굴을 한 대 쳐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제냐가 속으로 욕을 구시렁거리고 있는 사이, 루미에르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괜히 피해를 더 만들지 말고 다들 물러나 있는 게 좋겠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 떨어져 계세요.”

“알겠습니다.”

진짜 이유가 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신관은 믿음 가득한 얼굴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딱 봐도 얼른 이 현장을 벗어나고픈 마음이 가득해 보였다.

제냐가 신관과 성기사들이 물결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제일 먼저 줄행랑을 칠 것 같았던 높은 신관이 조심스럽게 루미에르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 루미에르 님.”

루미에르가 말없이 그를 쳐다보자, 신관이 제냐를 힐끗 쳐다봤다. 제냐가 있는 곳에서 말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 그 뜻대로 행동해 줄 사람은 없었다.

때맞춰 또다시 건물 안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나자, 신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족이 있는 방 안쪽에 중요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물건이요?”

“그, 성녀님의 개인적인 물품들인데…….”

그런데 그게 뭐.

루미에르가 옅은 미소를 띤 채 신관을 바라보자 신관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되도록 물건들이 무사했으면 좋겠습니다.”

“대치가 길어지지 않았습니까? 안타깝지만 이미 다 훼손됐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물건이 남아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장담은 해 드릴 수 없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미에르 님.”

이 약속 같지 않은 약속이 이제껏 이 자리에 남아 있었던 목적이었다는 듯 신관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제냐는 이제 3분의 2쯤 사라진 신전 측 사람들을 살피며 루미에르에게 작게 속삭였다.

“누가 함께 남겠다고 하지는 않겠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은 질문에 루미에르는 예쁜 미소를 보여 줬다. 그럴 리가 있겠냐는 의미가 듬뿍 담긴 그 미소를 보자 실소가 튀어나왔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굳이 참을 필요가 없어 보여서 제냐가 루미에르를 따라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저 안에 있는 물건들, 멀쩡하게 남아 있다면 다 망가트려 버려요.”

“네, 그럴게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루미에르의 얼굴이 전에 없이 빛나 보였다.

하지만 그런 루미에르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제냐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세 명의 사람들을 보며 눈을 좁혔다.

“누가 오는데요?”

“동료들이네요.”

저 사람들이 설마 남으려고 하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던 제냐의 눈에 삐딱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설마, 다 그 마법사 같은 놈들 아니야?’

지금에서야 계약에 묶여 싫은 소리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됐지만, 첫 만남 때의 강렬한 인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정말 화가 나게도 그런 제냐의 편견은 틀리지 않았다.

“루미에르!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맞아요. 루미에르가 늦게 와서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압니까?”

“곧 저 안으로 강제로 밀어 넣어질 뻔했다고요.”

더 듣고 있다가는 열불이 터질 것 같아서 그 뒤로 줄줄 이어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 무시하는데, 뒤로 물러나 있던 여자가 앞으로 나온 두 사람을 거칠게 밀어냈다.

“다 시끄러우니까 얼른 꺼지기나 해.”

“무슨 짓…….”

“괜히 더 버티고 있다가 같이 남는 게 어떻겠냐는 소리 듣고 싶어?”

그 말에 밀려난 두 명의 눈이 빠르게 부딪쳤다. 눈을 굴리며 상황을 이리저리 계산하던 두 명이 허허, 웃음을 흘리며 훌쩍 뒤로 빠졌다.

“우리가 너무 흥분했네.”

“그러게. 하하.”

“우리는 이만 가 볼게.”

“수고해, 루미에르!”

뛰듯 사라지는 두 명의 모습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데 남아 있던 여자가 그런 제냐의 시선을 끊어 냈다.

“야.”

야? 이건 또 뭐야?

또 어떤 종류의 쓰레기인가 싶어 제냐가 서늘한 눈으로 상대를 쳐다보는데, 여인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마지막 인사나 하자.”

응?

“나도 떠날 생각이긴 했는데,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제냐가 얼른 루미에르를 돌아보는데, 놀란 건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살짝 커진 눈을 한 루미에르가 이내 표정을 정돈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뭐, 말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잘 살아라.”

딱히 뭔가를 캐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는 듯 담백한 인상의 여자는 더 말을 늘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뒤로 물러났다.

왔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지는 여자의 모습에 제냐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뭐예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신전 측 사람들의 철수는 빠르게 끝이 났다. 신전 쪽 사람들이 사라지자 이제껏 끊이지 않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던 건물도 고요해졌다.

그 적막감에 묘하게 긴장이 차올랐다.

“살아 있는 건 맞죠?”

“네, 일단은요.”

일단은요? 제냐가 눈을 찌푸리는데, 루미에르가 보란 듯 다시 손을 벌렸다.

“바닥이 엉망이네요. 다시 안기는 게 좋겠습니다.”

“또요?”

신전 측 사람들을 발견해서 그의 품에서 내려오기 전, 빠른 속도 탓에 몇 번이나 혀를 깨물 뻔했던 제냐는 이제 그에게 안겨 가는 게 다른 의미로 불편했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단호했다.

“최대한 빨리 확인하고 싶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냐는 결국 다시 루미에르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제냐는 단단하게 그녀의 허리를 받쳐 주는 루미에르에게 편하게 몸을 기대며 물었다.

“힘들진 않고요?”

“네, 전혀요.”

무너져 울룩불룩한 바닥을 훌쩍 뛰어넘으면서 돌아온 답에 제냐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냐고 물어봤자 돌아오는 답은 똑같을 테고, 괜히 쓸데없이 입을 열었다가 혀라도 씹으면 이쪽만 불편했다.

그렇게 제냐는 루미에르의 품에 안겨 망가질 대로 망가진 건물 안쪽으로 진입했다.

‘엉망이네.’

바깥에서 봤을 때, 흙먼지와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알 수 없는 돌무더기들과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한가득 있어서 대충 짐작은 했었다.

안쪽은 확실히 상황이 더 심각했다. 어떻게든 부상자나 시체는 정리한 모양인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복도 곳곳에 피 웅덩이가 있어 비린내가 가득했다.

‘죽은 사람도 많겠지.’

아무리 신전이 나쁜 짓을 많이 했다지만, 윗선의 타락에 아랫사람들이 이렇게 죽어 나가는 건 탐탁지 않았다.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보면서, 제냐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마왕과 레라지에가 멀쩡하기 짝이 없다면 아주 많이 화가 날 것 같다고. 하지만 직접 레라지에의 모습을 눈에 담은 순간.

제냐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레라지에 맞아?’

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언제나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 주던 레라지에가 저렇게 엉망이라니.

‘이건 엉망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헤어질 때 봤던 말끔하던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모습에 제냐는 마른침을 삼켰다.

얼굴의 온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들과 화상을 입은 듯 짓무른 피부. 덜덜 떨리는 손과 산발이 되어 헝클어진 것을 넘어 반쯤 잘려 나간 머리카락, 본래 색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피에 물든 옷까지.

레라지에의 상태는 빈말로도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제냐?”

거칠다 못해 뚝뚝 끊어지는 그 부름에 정신을 차린 제냐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레라지에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고, 얼굴을 보여 주는 걸 꺼리는 것 같은 그에게 쓰고 있던 천을 둘러 준 제냐는 마왕의 행방을 듣고는 고민에 빠졌다.

‘이런 레라지에를 두고 가도 되나?’

이렇게 상태가 엉망인데, 이대로 두고 갔다가 임시방편이 끝나면 어떡하나?

‘하지만 그렇다고 안 내려가기에는…….’

레라지에가 이렇게 크게 다쳤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가 다친 것에 걱정이 되면서도 그와 더불어 마왕도 이렇게 크게 다친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런 제냐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레라지에가 부드럽게 부탁했다.

“나는 그대가 저 안으로 들어가 폐하를 구해 주길 바라네.”

제냐가 머뭇거리며 그를 쳐다보자 레라지에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그대와 아스가 밑으로 내려가 준다면 나도 든든하지. 버티지 못할 것 같으면 나도 저택으로 돌아가겠네.”

위험한 순간, 알아서 잘 도망칠 테니까 밑으로 내려가 마왕을 도와 달라고 고개를 깊게 숙이는 레라지에에 결국 제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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