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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97) (97/145)

몸 상태가 쓰레기 같다고 해도 인간들쯤이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인간들이 성력을 쓰는 성기사만 아니었다면.

레라지에는 점점 더 몰리는 상황 속에서도 손을 튕겨 한 무리의 성기사를 처리했다.

하지만 여기는 신관들의 본거지.

아무리 처리하고 처리해도 성력 사용자들은 무더기로 나타났고 점점 더 전략적으로 레라지에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바로 들어와!”

“여기, 여기에서……!”

성기사들의 뒤에서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성력 덕에 안 그래도 더딘 치유가 더 늦어지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상처가 더 악화되고 있었다.

레라지에는 그가 버티고 선 바닥 뒤에 있는 구멍을 바라봤다.

성기사들을 상대하면서도 계속 주의를 기울였지만, 그 이후 구멍 안에서는 특별한 이상 현상이 나타나진 않고 있었다.

‘무사하신가?’

그렇다면 참 좋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좀 빨리 신호를 주시면 좋을 텐데.

지금 당장은 이렇게 버티고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레라지에였다.

이쪽도 군대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혼자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에 보석과 보물들이 있다는 건데.’

신전이 이 긴 충돌 속에서도 여전히 총력전을 벌이지 못하는 건, 모두 지금 레라지에가 버티고 선 이 방이 성녀의 비밀 창고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레라지에와 싸우는 와중에도 신관들이 뒤뚱거리며 어떻게든 물건들을 꺼내려고 애를 쓰고 있지 않은가?

“악! 물건이 상하게 하지 말라니까?!”

지금 누군가의 외침처럼.

비릿한 미소를 흘린 레라지에는 또다시 방 안으로 진입하는 성기사들을 보물들이 있는 곳을 향해 내던졌다.

“야! 망가졌기만 해 봐!”

도대체 누가 저렇게 입을 놀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반부터 나타나 지금까지 입을 계속 놀릴 수 있는 걸 보면 신전에서 제법 힘 좀 쓰는 놈인 것은 분명했다.

어중이떠중이였다면, 저놈이 말할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는 성기사들이 진작에 저 입을 닥치게 했을 테니까.

찌릿하게 올라오는 통증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다시 한번 힘을 끌어 올리는데, 순간 강력한 하얀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몸이 타는 것 같은 압박감과 콱 막히는 숨구멍에 비틀거리면서도 레라지에는 쓰려던 마법을 넓게 퍼트렸다.

아아악-!

귀에도 문제가 생겼는지, 먹먹하게 비명이 들려왔다.

‘내 입에서 나는 소리인가?’

온몸의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좋지 않은데.’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순간 그의 몸이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어 다가오던 것을 피해 낸 레라지에의 눈에 잘려 휘날리는 그의 은발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내 머리카락?’

땅으로 떨어지는 은발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라지에가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아.”

로브, 어느새 로브가 벗겨져 있었다. 다행히 얼굴에는 상처가 없는 것 같았지만…….

손으로 더듬더듬 얼굴을 만져 보던 레라지에가 그의 로브와 머리카락을 잘라 냈음이 분명한 눈앞의 성기사를 바라봤다.

“괴, 괴물.”

양손으로 검을 움켜쥔 성기사는 덜덜 떨면서도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덕분에 미치도록 좋은 레라지에의 시력은 성기사의 눈에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화상 같은 징그러운 흉이 덕지덕지 붙은 그의 얼굴과 어깨까지 잘린 왼쪽 머리카락. 눈과 코, 귀, 입 등 모든 구멍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피까지.

“이 마족 놈, 오늘 여기가 네 무덤,”

그 흉악하기 짝이 없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 레라지에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름답지 않아.”

아름답던 은발은 빛을 잃었고 잡티 없던 피부에는 붉은 물집과 흉이 가득했다.

까드득.

폐하를 대신해 성력을 받아 낸 순간 짐작하고 있던 일이긴 했다. 회복할 틈도 없이 계속해서 성력을 쐬고 있었으니까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은 스스로의 모습을 목격한 순간, 레라지에는 이성을 잃었고.

콰아아아아아앙!

엄청난 양의 마력이 폭발했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관성적으로 달려드는 적들을 물리치던 레라지에는 갑자기 줄어든 공세에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는…….”

시간을 끌기 위해서 주변의 보물들을 신경 써 가며 신관과 성기사들을 처리하던 건 잊은 지 오래였다.

방이 무너지든 건물이 무너지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덕에 방 안에 있던 물건들 대부분이 부서지고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레라지에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사이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존재.

“폐하께서는 무사하신가.”

몰아치던 적들이 조용해지자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든 레라지에가 초조하게 구멍을 쳐다보다가, 또다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몸에 힘을 줬다.

아무리 공격을 해 봐도 성력을 쓰는 이들이 많으니 대부분의 성기사들은 금방 상처를 회복하곤 했다.

‘개미 떼도 아니고 끝도 없이 밀려오는군.’

그러나 맹렬하게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마력을 날리려던 레라지에는 보랏빛의 아름다운 자수정을 발견하고는 손안의 마법을 흐트러트렸다.

“…제냐?”

헛것을 보는 건가?

눈을 의심하던 것도 잠시, 레라지에는 그의 앞에 멈춰 선 인물들을 보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안녕, 아스. 그리고 제냐.”

금발의 아름다운 사내의 품 안에서 급하게 내려온 제냐가 레라지에에게 손을 뻗었다.

“이게 무슨 꼴이에요?”

헛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보랏빛 눈은 헛것이 맞았지만.

걱정스레 그의 얼굴을 더듬는 제냐의 눈은 여전히 갈색이었다. 레라지에가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마법을 해지하자 그제야 황홀한 보랏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라지에 님?”

“…아름답지 않은 걸 그리 오래 보고 있을 필요는 없어.”

그 말에 제냐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 말을 하고 싶으세요?”

글쎄.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인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치료는 되겠네요. 목숨에 위협이 될 만한 상처는 없어서 다행이에요.”

레라지에가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아까부터 얼굴에 감각이 없었기에 입꼬리가 제대로 올라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웃어 봤자 아름답지도 않을 것 같았고.

레라지에는 의식적으로 제냐의 눈동자에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제냐는 징그럽지도 않은지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의 피를 대강 닦아 냈다.

“뭐, 머리카락은 나중에 돌아가면 예쁘게 다듬어요. 레라지에 님 정도 얼굴이면 머리가 길든 짧든 다 잘 어울릴 테니까.”

그러고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끌어 내려 그의 얼굴에 묶어 주는 것이다.

“어때요. 이렇게 하면 다른 이들은 못 볼 거예요.”

레라지에는 그의 얼굴을 반쯤 가려 주는 하얀 천을 손으로 매만지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의 말처럼 보랏빛 눈에 비치는 레라지에의 얼굴은 한결 나아 보였다.

“마력은 어느 정도 남으셨어요?”

눈을 깜빡이며 맑은 눈 속 스스로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레라지에가 마력을 가늠해 봤다.

“4분의 1쯤.”

그러자 제냐가 질색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며 답했다.

“아직도요? 마족들은 정말 대단하다니까.”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보자 이제껏 그의 몸을 바짝 굳게 하던 긴장이 차차 가라앉았다.

일부러 가벼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 분명한 제냐에 맞춰 레라지에도 장난스레 웃었다.

“내가 대단한 거 아닐까?”

그 말에 피식, 옅은 웃음을 흘린 제냐가 조용한 방 밖을 눈짓했다.

“일단 성기사와 신관들은 다 물렸어요.”

“그래, 그런 것 같네.”

확실히 제냐의 말대로 방 주변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물러나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확실히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그러니 지금 타이밍에 제냐와 용사가 등장한 건 정말 다행이었고.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이에요. 루미에르가 해결하겠다고 밀어냈을 뿐이니까요.”

그리 말한 제냐가 용사를 쳐다보자 그가 말을 이어받았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폭발음 같은 소리를 내긴 해야 합니다.”

남은 마력을 물어본 이유가 이것이었던 모양이었다. 레라지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레라지에가 보란 듯 손을 들어 펑, 소리를 냈다.

소리만 크지 아무런 타격도 없는 폭죽이었다. 제냐가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가루를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다가 주변을 돌아봤다.

“그런데 왜 후작님만 계셔요? 마족이 한 명이라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레라지에가 그의 뒤에 있는 동그란 구멍을 가리켰다.

“폐하께서는 여기에 들어가셨네.”

“혼자요?”

고개를 끄덕이자 제냐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그러더니 대놓고 불만을 표하는 것이다.

“정말, 폐하는 인간계에 내려와서 내내 레라지에 님을 너무 부려 먹어요. 양심이 없어.”

평소라면 그 말을 부정했겠지만, 정말 오늘은 너무 힘들어서. 망가진 얼굴이 슬퍼서 레라지에는 웃음만 흘렸다.

뭐, 그렇게 말하는 제냐가 실제로 마왕을 비난하는 기색은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고.

입으로는 마왕을 비난하면서도 제냐는 지금도 걱정 가득한 눈으로 구멍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질투가 무색하지.’

아름답지만 무심하기 짝이 없는 용사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레라지에가 제냐에게 물었다.

“그래도 내려갈 테지?”

제냐가 찜찜한 얼굴로 레라지에를 쳐다봤다. 그를 이대로 두고 가도 되는 건가 걱정하는 게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건 레라지에가 아니라 그의 주인이었다.

‘정 안 되겠으면, 그냥 이동해 버리면 되니까.’

제냐가 폐하를 구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이상, 용사는 최선을 다해 그녀가 원하는 바를 이뤄 줄 것이다.

폐하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레라지에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나는 그대가 저 안으로 들어가 폐하를 구해 주길 바라네.”

제냐를 저 구멍 안으로 밀어 넣는 것.

레라지에는 그를 보는 흉흉한 용사의 시선을 모른 척 흘리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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