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냐는 루미에르의 뒤에 서서 제레미야의 일행을 살폈다. 신관 둘과 성기사 하나, 그리고 일반 기사 넷.
사람 한 명을 지키기 위한 수로는 적다고 하긴 힘들지만, 지켜야 할 대상이 황녀라면 말이 달라졌다.
‘소란이 일어난 지가 언젠데 이제야 대피해?’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이 있는 건가? 애당초 제레미야가 루미에르를 만났던 건 오전인데 왜 이제까지 신전에 남아 있단 말인가?
눈을 찌푸리는데, 루미에르가 딱 제냐가 궁금하던 점을 질문했다.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잠시 성녀님을 뵙고 있었습니다.”
성녀? 황제와 성녀가 뭔가 또 다른 계획을 하고 있는 걸까?
“어머니께서는?”
여기서 성녀까지 마주치면 그거야말로 큰 문제였다. 제냐가 제레미야의 답에 귀를 쫑긋 세웠다.
“함께 대피하자고 말씀드렸지만, 남겠다고 하시더군요.”
“남아 계신다고요?”
루미에르가 고개를 돌려 소란이 이는 방향을 쳐다봤다. 그러자 제레미야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현장에 계신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의 방은 저곳과 멀지 않을 텐데요.”
그렇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제냐가 머리 한구석에 그 사실을 잘 저장해 뒀다.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까.
그러는 사이 신관이 앞으로 나서 자긍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성녀님께서는 소중한 가족들이 신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홀로 안전한 곳으로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웃기고 있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제냐가 입을 꾹 다무는데 루미에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정보를 캐내기 시작했다.
“어머니 곁에 있는 인력은 얼마나 됩니까?”
“성기사 열 명과 신관 다섯 명입니다.”
신관은 루미에르의 물음을 전혀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루미에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걸로 되겠습니까?”
“생각보다 대치가 길어져서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신관이 불안한 얼굴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봤다. 루미에르가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고 있나요?”
“갑자기 침입자가 나타났습니다. …마족인 것으로 추정되고요.”
루미에르의 눈매가 날카롭게 치솟았다.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마족?”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 속에 담겨 있는 분노가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제냐는 저도 모르게 루미에르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어떻게 마족이 신전 안에 들어와 있는 거죠?”
제냐가 그렇듯 루미에르의 기세에 눌린 신관이 깊게 고개를 숙이며 송구한 낯을 했다.
“저희도 거기까진…….”
“군대가 온 겁니까?”
“아니요, …한 명 같습니다.”
“한 명? 웃기지도 않는군.”
차갑기 짝이 없는 말에 신관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신관이 나섰다.
“현재 마법사님을 제외한 다른 동료분들 전부가 저곳에 계십니다.”
그러더니 루미에르의 뒤를 쳐다보는 것이다.
“함께 계신다고 들었는데.”
신관과 눈이 마주친 제냐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데, 루미에르가 대단치 않은 사실을 말한다는 듯 건조하게 답했다.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어 달라 부탁했습니다.”
“아.”
“어차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닙니까.”
뼈를 찌르는 말에 신관이 어색하게 답했다.
“그, 그렇죠.”
그러고는 제레미야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황녀의 앞에서 이런 이야기가 오간 것이 달갑지 않은 모양새였다.
신관은 얼른 대화의 흐름을 바꾸려 했다.
“저 신관은?”
그리고 그 대상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제냐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루미에르는 아주 가볍게 신관의 물음을 쳐 냈다.
“당신들이 붙여 놓은 것 아닙니까.”
“크흠.”
더욱 할 말이 없어진 신관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루미에르가 냉정하게 대화를 잘라 냈다.
“여기까지 하죠. 어머니께 가 보는 것보다는 현장에 가 보는 게 우선이겠군요. 역부족인 듯하니.”
그 날카로운 태도가 거슬렸던 걸까? 성기사가 발끈한 듯 끼어들었다.
“입구가 한정적이고, 건물 안이라서 현장에 진입할 수 있는 인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마족 하나를 처리하지 못한 건 다 이유가 있다는 변명이었다. 그 말에 루미에르가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제까지 고작 마족 한 명을 처리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신전이?”
마족과 신전의 싸움에서 성력이 절대적 우위에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성력 보유자가 제일 많다고 여겨지는 본신전이 아직도 마족 하나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부끄러워할 일이 맞기는 했다.
성기사도 그걸 모르지 않는지 반항적으로 치솟았던 눈매가 잦아들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신관이 얼른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잘잘못은 상황이 정리된 후에 따지도록 하지요.”
허허, 어색하게 웃는 신관에 루미에르가 이쯤 하겠다는 듯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래요. 황녀 전하를 모시고 얼른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을 마무리하며 루미에르가 제레미야를 쳐다봤다. 그러자 제레미야가 그와 눈을 맞췄다.
‘뭐야, 이 시선 교환?’
제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쳐다보는데, 돌연 제레미야가 가까이 다가와 루미에르의 손을 붙잡았다.
‘허?’
제냐가 맞잡은 두 손을 빤히 쳐다보는데 제레미야가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미에르 님, 무사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데? 손을 잡아 준 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거슬렸다.
한 번 인사했으면 그냥 적당히 떨쳐 내지, 어색하게 붙잡혀 있는 루미에르의 태도가 매우 거슬렸다.
‘저 손은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야?’
레라지에가 잡을 때는 잘만 툭툭 떼더니, 약혼자한테는 그렇게 못 하겠나?
뾰족하게 튀어나올 것 같은 비아냥을 삼킨 제냐가 루미에르를 노려보려고 고개를 드는데, 순간 제레미야와 눈이 마주쳤다.
“아.”
착각인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제레미야가 그녀를 알아본 것만 같았다.
그러자 이제까지 유치하게 머릿속을 가득 차지했던 생각이 흐려졌다.
초상화로 본 적이 있었고 그녀인 척을 한 적도 있었지만, 사실 제레미야와 이렇게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딱히 사이가 좋지도 않았고 마지막도 별로였지만.
‘그래도 잘 살고 있던 것 같네.’
제냐가 그렇게 생각을 한 건 곱게 차려입은 옷차림이나 우아한 몸짓 때문이 아니라, 예전과 달리 흔들리지 않고 뚜렷해 보이는 저 눈빛 때문이었다.
제냐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자, 눈을 깜빡인 제레미야가 루미에르의 손을 놓으며 그녀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이름 모를 신관님께서도 무사하시길.”
제레미야를 따라 고개를 숙인 제냐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 인사 뒤, 제레미야는 함께 있던 일행들을 이끌고 서둘러 그들을 지나쳐 갔다.
멀어지던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제냐가 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우리도 가요.”
“…네.”
몇 발자국 그녀를 따라 발을 옮기던 루미에르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제냐, 괜찮습니까?”
제냐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뭐가요?”
“그…….”
루미에르가 슬쩍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냐가 그 손을 같이 내려다보며 답했다.
“괜찮아요. 보는 눈도 많았는데 뭘.”
물론 처음에는 매우 짜증 났지만 지금은 정말로 괜찮았다.
“음.”
루미에르가 미묘한 얼굴을 했다. 안도한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한 것 같기도 했다.
‘왜 서운해해?’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는데 루미에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해하지 않았다면 됐어요.”
“네?”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오늘 황녀가 찾아온 건 당신을 찾기 위해서였어요.”
“아.”
그러고 보니 루미에르가 울고 있는 걸 달래기 급급해서 그냥 넘겨 버렸지만, 그런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제 옆에 있던 사람이 아스트리아였다는 걸 알더라고요.”
제냐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엠마가 알려 줬나 보네요.”
그렇다면 조금 전 그 느낌은 틀린 게 아니었다. 제레미야는 분명 제냐를 알아봤다.
“눈치챘는데 티 내지 않은 건 고맙네요.”
정말 옛날이랑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왠지 모를 씁쓸함에 제냐가 장난스레 말했다.
“뭐, 우리가 마족들과 한편이라는 건 몰랐겠지만.”
그렇지 않냐고 루미에르를 쳐다보는데, 그가 조심스레 손을 붙잡아 왔다.
“제냐, 괜찮아요?”
“그냥 좀, 기분이 이상하네요.”
눈을 굴리다 생긋 웃은 제냐가 루미에르의 큰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그 손을 떼어 냈다.
“한동안 손은 잡지 않는 게 좋겠어요.”
갑자기 손이 내쳐진 루미에르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네?”
하지만 제냐는 방긋 웃으며 다시 한번 말할 뿐이었다.
“잡지 말라고요.”
약혼자 손을 잡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녀의 손을 잡는단 말인가? 순간 가라앉았던 짜증이 치솟았다.
‘적당히 한 번 잡혀 주고 끝내지. 결국 손을 놓은 것도 제레미야였잖아?’
미간이 팍 찌푸려지면서도 스스로의 변덕이 어이가 없었다. 루미에르의 표정도 일그러지지 않았을까 싶어 그를 쳐다보는데, 바라본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성질을 부렸는데, 왜 저렇게 좋아해?’
제냐가 흠칫하는데 루미에르가 여전히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조금 더 속력을 낼까요?”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파동이 느껴졌다.
콰아아-!
벽과 바닥이 크게 진동했다. 제냐가 놀라 루미에르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아직은 괜찮아요. 하지만 서둘러야 하니까 이제 안겨요.”
루미에르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제냐가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겼다.
허리를 감싼 손과 허벅지를 받치는 팔뚝.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루미에르의 얼굴까지.
눈이 마주치자 녹아내릴 듯 달콤하게 웃은 루미에르가 작게 속삭였다.
“눈 감고 있어도 좋아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단하게 제냐를 안아 올린 루미에르가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