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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95) (95/145)

루미에르와 함께 이동하면서 제냐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천을 벗어 던지고 싶은 걸 몇 번이나 참아 냈다.

‘숨 막혀.’

조금 숨이 거칠어지자 얼굴을 가린 천이 얼마나 거슬리던지.

제냐는 그녀와 달리 평온하기 짝이 없는 루미에르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루미에르가 시선을 맞춰 왔다.

“안아 줄까요?”

루미에르가 자연스레 제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냐는 그에게 붙잡혀 당겨지기 전에 얼른 그 손을 풀어냈다.

“…아직은 괜찮아요.”

주변에 보는 시선이 많았다.

신전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싸움과 연이 없는 신관들은 빠르게 중심부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 생각보다 많은 체력이 필요했다.

거기다가 자기 목숨 챙기기 급급해서 주변을 돌아볼 경향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루미에르는 기가 막히게도 알아봤다.

‘저 잘난 얼굴이 문제야.’

멀리서 봐도 빛이 나니까,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를 알아보는 게 아닌가. 목숨에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구해 줄 용사를 찾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덕분에 제냐는 종종 이상하다는 시선을 받곤 했다.

딱 봐도 싸움과는 연이 멀어 보이는데 루미에르와 함께 움직이는 게 의아한 것이다.

하지만 다들 도망가기 바쁘니 굳이 자리에 멈춰 서서 제냐보고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지나가면서 계속 시선이 따라붙어서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 안겨 봐.’

다들 도망가는 것도 잊고 이쪽을 쳐다보며 입을 벌릴 것이다.

제냐가 다시 한번 거절의 의사를 표하자 루미에르가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 미소와 달리 냉큼 허리에 와 닿던 손에는 다른 의도가 넘쳐 보였었는데.

상황이 이 모양이니 그런 걸 지적할 때는 아니었다. 그렇게 루미에르의 안내를 받아 얼마나 걸었을까.

꽤 깊숙하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대피할 사람들이 다 대피한 건지 막 그들이 들어선 복도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활짝 열린 문과 그 안에 엉망이 된 방의 모습을 살피며 제냐가 숨을 골랐다.

“후, 다들 급하게 떠났나 보네요.”

“그러게요.”

“아직도 꽤 격렬하고요.”

소리가 난지 한참은 된 것 같은데, 폭발음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가까워지긴 했나 봐요. 소리가 크네요.”

하지만 제냐는 오히려 그게 반가웠다. 이렇게 열렬한 소리가 계속 난다는 것 마왕과 레라지에가 아직 무사하다는 뜻이었으니까.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보는데, 조용하던 복도 끝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또 누가 오는 걸까? 여전히 얼굴이 잘 가려져 있는지 확인하는데, 맞은편에서 꽤 다친 것으로 보이는 성기사와 그를 부축하는 신관이 나타났다.

제냐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성기사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맙소사.’

왜 하필 많고 많은 성기사 중에 저 사람인가?

“루미에르.”

제냐는 성기사가 그녀를 알아보기 전, 미리 루미에르에게 상황 설명을 하기로 했다.

“아까, 그 윙크했던…….”

하지만 제냐가 설명을 끝내기 전, 꽤 먼 거리임에도 성기사가 제냐를 알아봤다.

“당신은……! 안 그래도 걱정이 됐었는데.”

아니, 다친 것 아니었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우렁차?

의아하다는 듯 제냐를 쳐다보던 루미에르가 제냐와 성기사를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계산을 끝낸 듯 그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제냐는 신관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오는 성기사의 상처를 바라봤다.

“많이 다치셨네요.”

제냐가 먼저 나서서 말을 걸자 성기사가 머쓱한 얼굴을 했다.

“아, 그…….”

도대체 얼마나 봤다고.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으면서 왜 저런단 말인가?

‘설마, 원래 씨씨랑 뭔가 있었던 것 아니야?’

아니, 뭔가 있었으면 씨씨가 바뀐 걸 바로 알아봤어야지. 더군다나 일하던 공간도 다른데.

찌푸려질 것 같은 눈을 애써 핀 제냐가 피가 곳곳에 묻어 있는 그의 옷들을 살피며 말했다.

“얼른 치료하셔야 할 것 같아요.”

제냐가 유독 붉은 성기사의 정강이를 쳐다보자 성기사가 부끄러운 낯을 지워 내고 신관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저쪽으로 더 가시는 건 위험하실 것 같은데.”

방금 자기가 지나온 곳이라고, 조금만 더 가면 이제 싸움의 여파가 닿을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제냐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루미에르 님이 함께 계신걸요.”

그리고 보란 듯 루미에르를 두 손으로 가리켰다.

“어…….”

그제야 루미에르를 발견한 듯 성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어떻게 저 잘난 얼굴을 발견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 제냐는 멍하니 루미에르를 쳐다보는 성기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발견하고 얼른 고개를 돌려 성기사를 부축하고 있는 신관의 눈치를 살폈다.

성기사에 비해 작은 체구의 신관은 딱 봐도 지금 매우 지쳐 보였고 얼른 이 자리를 정리하고 싶은 것 같았다.

흐려진 눈이, 일할 때 제냐의 눈 같기도 했다. 덕분에 루미에르의 표정에는 별다른 관심도 없어 보였고.

제냐는 루미에르가 감당 못할 말을 하기 전, 다시 성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다른 성기사님께서 용사님과 함께 있으라고 말씀하셔서요.”

그러면서 슬쩍 루미에르의 눈치를 보자 그는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하긴 마법사의 방문 앞을 지킬 정도면 이자도 루미에르와 신전 사이의 관계를 파악한 상태일 테니, 지금 이게 뭔 상황인지 파악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위험하실 텐데.”

“위험하지 않은 분이 어디 있겠어요. 치료 잘하시길 바랍니다.”

제냐가 이쯤에서 대화를 정리하려고 하자 머뭇거리던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순순하게 물러서는 남자에 이대로 헤어지면 되겠다고 기뻐하는데, 자축이 너무 일렀다.

“아, 그, 제 이름은 데릭입니다.”

오. 뜬금없는 자기소개에 제냐는 차마 루미에르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답했다.

“음… 씨씨예요.”

가명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제냐가 이름을 알려 주자 성기사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나중에 뵐 수 있었으면…….”

그리고 이번에는 제냐가 대꾸하기도 전 루미에르가 그 말을 잘라 냈다.

“이만 가죠.”

제냐는 옳다구나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러고는 점점 썩어 가는 얼굴을 하고 있던 신관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세요.”

“네, 수고하세요, 신관님. 그리고 용사님도.”

신관도 기다렸다는 듯 루미에르와 제냐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혹여 성기사가 또 말을 시작할까 봐 서두르는 모양새였다. 물론 그건 제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루미에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쳐다보고 있어요.”

누가? 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아하하.”

제냐는 그저 웃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그냥 얌전히 가지 도대체 왜 그러는데?

“자기가 뭔데 소개를 하는 거죠?”

“아, 그러게요.”

“쳐다보는 눈빛도 거슬려요.”

“하하.”

“그 눈으로 느끼하게 윙크를 했겠군요?”

“딱히 원하던 바는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제냐가 화를 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억울함을 삼켜 내는데, 루미에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잊어버려요.”

뜬금없는 말에 제냐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뭘요?”

“이름이요.”

이름? 순간 흐릿해져만 가던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데릭.

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었다.

“음, 그래요.”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루미에르가 만족한 얼굴을 했다.

거기서 끝내면 좋았을 텐데. 루미에르는 기어이 한마디를 더했다.

“나중에 확인할 거예요.”

나중에 언제? 그러면 더 잘 기억하지 않겠어? 지금도 그대로 잊을 뻔했던 이름이 다시 떠올랐는데.

하지만 제냐는 눈치 좋게 그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알겠어요.”

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다시는 신전에 오지도 말아요.”

“알겠다니까요.”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이 일이 다 끝나면 마계로 가는 게 좋겠어요.”

“…네?”

제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루미에르를 쳐다보는데, 그의 얼굴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마계로 가요. 다 짜증 나.”

전혀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충동적이긴 한데, 진심이 듬뿍 담겨 있는 것 같달까.

제냐는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히 그 이후, 루미에르는 다시 성기사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이번에야말로 무사히, 조용하게 마왕과 레라지에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상황은 언제나 제냐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제냐는 그들의 앞에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죄다 만나다니.

“루미에르 님?”

무리의 한가운데에서 화려한 복장을 한 여인이 튀어나왔다. 그 여인을 발견한 순간부터 제냐의 눈치를 엄청나게 보고 있던 루미에르가 정말 답하고 싶지 않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듯 느리게 대꾸했다.

“황녀 전하.”

굳이 이렇게까지 해 가면서 마왕을 구하러 가야 하나? 이렇게 구하러 가 봤자 이미 상황은 다 끝난 거 아니야?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아까보다 더 커진 폭발음이 펑펑 들려오고 있었고, 이제는 비명 소리도 들리는 것 같지만!

입 안으로 욕을 짓씹으며 제냐는 얌전히 루미에르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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