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에르는 당연하다는 듯 제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루미에르의 도움을 받기로 한 건 좋았다. 하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자, 겁에 질린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쾅쾅거리는 소리들이 계속해서 들려오자 아이들이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게 보였다.
제냐가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자 루미에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냥 두고 가기 그렇죠?”
정말 여러모로 루미에르에게 너무 민폐였다.
“…네.”
제냐의 긍정에 루미에르의 미소가 짙어졌다. 물론 그 미소는 딱 봐도 가짜였다. 힐끗 그의 눈치를 살피는데, 작게 한숨을 쉰 루미에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나는 당신이 마계에 있었던 걸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네?”
가깝게 다가와 이마로 톡, 제냐의 이마를 친 루미에르가 입꼬리를 예쁘게 말았다.
“나는 저런 어린애들한테도 질투하거든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으면 농담도 잘한다고 웃었겠지만, 그 말을 하는 이가 루미에르였기에 이게 농담 같지 않았다.
제냐가 가까운 거리를 지적하지도 못하고 얼어서 그를 쳐다보고 있자, 루미에르가 맞닿은 이마를 천천히 떼어 냈다.
“당신은 너무 다정하니까.”
그러고는 제냐의 머리를 정돈하듯 매만지는 것이다.
“다정한 제냐가 좋지만. 그게 나한테만 향했으면 좋겠어요.”
사락사락, 간지럽다 못해 이상한 느낌이 들게 머리를 만져 주던 루미에르가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고는 상체를 세웠다.
“더 이상 당신의 관심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지 않으니, 별수 없네요.”
그녀의 주변으로 루미에르의 향기가 잔뜩 남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작게 숨을 몰아쉬는데, 루미에르가 아이들을 쳐다보며 웃었다.
“아이들을 그 저택으로 보내 놓죠.”
그러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음표를 둥둥 띄우고 있던 마법사를 보며 생긋 웃는 것이다.
“마법사를 데려오길 잘했네요.”
루미에르가 손가락으로 마법사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제냐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너희들 미쳤어?”
상황 설명을 전부 들은 마법사가 펄쩍 뛰고 있었다. 제냐는 귀찮은 얼굴로 그런 마법사를 쳐다봤다.
“뭐, 누구? 누구?!”
제대로 들어 놓고 몇 번을 다시 묻는 거야?
‘이렇게 부정할 거면, 처음부터 못 들은 척하던가.’
처음에는 마법사에게 이렇게 많은 걸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이미 제냐와 루미에르의 대화에서 마왕이라는 단어를 들은 뒤였다.
‘쓸데없이 귀만 밝아서는.’
이미 마왕이라는 단어를 들은 마법사에게 핑계를 주절거리는 게 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냐는 적당히 설명해 주고 시간을 단축하려고 했다.
어차피 계약으로 매여 있는 몸. 마왕과 레라지에에 대해 입도 뻥긋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우리와 관련된 내용을 기밀에 부쳐야 하고, 우리가 원한다면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게 계약의 내용이니까.’
결과적으로 마왕이 제냐의 일행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마법사는 마왕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까지처럼 투덜거려도 바로 계산을 시작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마법사의 발광은 길어지고 있었다.
“일반 마족도 아니고, 마왕?!”
쿵쿵 발을 구르는 모습을 보며 제냐는 혀를 찼다.
아이들이 대화를 들을 수 없게 그들 주위로 마법을 쳐 놓게 하기를 잘했다. 안 그랬으면 저 비명 같은 말들 때문에 아이들도 전부 상황을 이해하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너희들 인간을 팔아먹는 거야? 미쳤어?! 어디 붙을 놈이 없어서 마왕에게 붙어?”
누가 보면 자기는 엄청 청렴결백한 줄 알겠다.
제냐의 계산이 틀린 건, 전부 인간 세상에서 마족들과 마왕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뚫고 있다는 걸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오래 붙잡혀 있다니.
삐딱한 얼굴로 마법사를 쳐다보고 있던 제냐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는 본인은요?”
“내가 뭘?”
“당신이 계약한 상대는 마계의 귀족인데요. 무려 후작.”
“…뭐?”
마법사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제냐는 그런 마법사를 보며 생긋 웃었다.
“당신도 우리랑 같은 처지예요. 물론 우리는 강제가 아니고 자의로 움직이고 있지만.”
“그, 그.”
마법사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제냐는 얄밉기 짝이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당신이 우리를 배신한 순간, 당신은 마족들의 추적도 함께 받는 셈인 거죠.”
제냐가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뭐, 물론 계약을 파기해서 마법사가 아니게 된 당신이 그들을 무사히 따돌릴 방법 따위는 없고요.”
“허, 허!”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손가락질만 하는 그를 보며 제냐가 비웃음을 날리는데, 냉랭한 얼굴을 한 루미에르가 마법사의 손가락을 냉정하게 쳐 냈다.
“치워.”
“허!”
루미에르의 손짓에 손을 툭, 떨어트린 마법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쟤는 그렇다 치고, 너는 용사라는 놈이!”
네 위치에 대한 자각이 없는 거냐고 왈왈거리는 마법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루미에르가 귀찮은 얼굴로 말했다.
“입 좀 다물어. 시간 없으니까.”
“…너는 변명도 안 할 거야?”
마법사의 얼굴에는 배신감이 가득했다. 정말로 마족들에 대한 이미지가 바닥인 모양이었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은 제냐가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그도 한때 마족을 입에 담기만 해도 혐오감을 가득 드러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의 루미에르는…….
‘자기가 왜 변명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네.’
몰이해한 얼굴로 마법사를 내려다보던 루미에르가 무심하게 말했다.
“네가 알고 있던 모든 게 진실은 아니야. 하지만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을 틈은 없어.”
그러고는 빳빳하게 굳은 마법사를 향해 명령했다.
“그러니까 네가 할 일은 하나야. 쓸데없는 생각 말고 저 애들이 여기 일에 휘말리지 않게 지금 내가 건네는 좌표로 이동해.”
“…좌표?”
“그래, 좌표. 바깥의 소란은 너도 알고 있겠지. 쟤들을 여기에 엮이게 할 수는 없어.”
루미에르를 따라 삐걱거리며 아이들을 쳐다보던 마법사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어, 그 말은. 나도 가도 된다는 뜻?”
이게, 이게 끝이냐고. 이제 너희들과 엮이지 않아도 되는 거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저렇게까지 마족이라면 질색하는데, 그냥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계속 지금처럼 시끄럽게 굴어 대면 같이 다니는 것도 피곤할 테고.
계약 때문에 입을 열지도 않을 테니, 이대로 보내 버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너는 애들 보내고 돌아와야지.”
그 말에 마법사가 숨이 막힌 것 같은 얼굴로 되물었다.
“왜. 왜?!”
루미에르가 건조한 낯으로 이야기했다.
“네가 그랬잖아. 일행에 마법사가 있으면 도움이 된다고.”
그러자 마법사가 자기 입을 때려 버리고 싶은 얼굴을 했다. 루미에르는 그 얼굴을 뻔히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애들은 적당히 재워 놓고 너는 곧장 돌아와. 소란이 이는 곳으로 오면 우리가 있을 테니까.”
“내가 왜…….”
반박하려다 말고 스스로의 심장을 내려다본 마법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분한 듯 주먹을 꽉 쥐다가 몸을 돌려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 부들거리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제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저대로 보내도 되겠어요?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은데.”
혹시 아이들에게 분풀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지만 루미에르는 태연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린애한테까지 그러진 않아요. 동생이 하나 있거든요.”
오, 그렇다면야.
“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제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루미에르가 알고 있다는 듯 차분하게 답했다.
“저도 알아요.”
그걸 다 알면서. 제냐가 눈매를 좁혔다.
“그런데 아까 그 말은 왜 했어요?”
루미에르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했다.
“만만한 인상을 주면 기어오를 게 뻔하니까요. 혹시 모를 변수는 없애 놓는 게 좋겠죠.”
음, 하긴 그동안 봤던 마법사의 행동들을 떠올리면 아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자극하면 반대로 더 튀어 오르지 않겠어요?”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저 마법사가 너 죽고 나 죽자고 나설지도 몰랐다.
‘계약에 목숨이 아니라 마법을 걸자고 한 건 내가 제안한 거지만.’
마족과 신전의 일에 관계없는 인간이 더 희생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저 마법사는 신전과 아예 동떨어진 인물도 아니었고, 호감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제냐는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마왕은 그런 제냐의 고집을 받아 줬었고.
‘어차피 그 인간을 사용하는 건 너니까.’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그건 네가 알아서 하라고, 생각보다 쉽게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마왕에 안도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걱정이 되는 것이다.
제냐는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아이들을 데리고 마법을 써서 사라지는 마법사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사라지는 순간까지 눈에서 힘을 빼지 않던 마법사의 얼굴이 조금 찜찜했다.
‘정말 괜찮은 거겠지?’
하지만 제냐와 달리 루미에르는 아주 태평해 보였다.
“겁이 정말 많은 사람이니까, 그러지 않을 겁니다.”
하긴 이제껏 마법사와 오랜 시간을 보낸 건 루미에르였다.
제냐가 아이들이 떠난 자리를 쳐다보며 애써 찝찝함을 내리누르는데, 루미에르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이제, 갈까요?”
제냐는 잡생각을 떨치며 그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너무 늦어졌다.
“그래요, 가요.”
콰앙-! 하고 다시 한번 들려오는 커다란 폭발음을 들으며, 제냐는 루미에르와 소란의 중심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