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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93) (93/145)

문 안쪽에 있는 물건들은 솔직히 말하면 별로 대단치 못했다. 물론 조금 전 그들이 지났던 청소 비품들이 가득 들어 있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호화롭기는 했다.

화려하게 보석으로 장식된 장식품들과 여러 왕국의 보물과 미술품들, 그리고 과장을 보태면 산처럼 쌓여 있는 황금들까지.

전전대 교황과 전대 교황 그리고 성녀까지 이어 오며 축적된 부들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레라지에가 눈을 빛내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는…….”

뭐, 마르바스에게는 별 볼 일 없는 물건들이었지만 레라지에의 심미안에는 꽤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성녀의 개인 금고다.”

뇌물을 받은 것도 많겠지만 또 상당수는 마족에게 피해를 입었다던 영지와 가문들에서 갈취해 온 피에 젖은 물건들.

“아, 얼마나 아름다운지.”

레라지에가 보석들을 보며 경탄하는 모습을 대충 흘려 넘기며 마르바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서도 단박에 눈에 띄는 물건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발견한 건 어쩌면 당연하게도 레라지에였다.

“이건 여기에 있을 만한 급은 아닌데.”

화려한 장식품들 사이, 고급스러운 테는 나지만 그 수준이 다른 것과 비교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보석함이었다.

“그거다.”

“네?”

번쩍거리거나 진귀한 물건들을 보다 발견하면 정말 무관심하게 넘겨 버리기 딱 좋은 물건이었다.

그리고 물건의 소유자들이 원하는 게 바로 그런 취급이었고.

“너무 귀중해 보이면 오히려 더 눈에 띄고, 그렇다고 너무 허접해 보여도 눈에 띄니까.”

사람들의 관심을 사지 않을 정도가 딱, 성녀가 원하던 것이었을 것이다.

“설령 침입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 물건에 신경 쓸 사람은 거의 없겠지.”

다른 진귀한 물건들을 먼저 탐할 테니까.

마르바스의 말에 레라지에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뭐, 그렇긴 하겠지만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더 눈에 띄지 않습니까?”

“그건 그대라 그런 것 아닌가?”

레라지에는 좋아하는 걸 잘 찾아내는 것만큼, 자기 심미안에 떨어지는 물건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편이었다.

마르바스의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레라지에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아이, 그리 칭찬해 주시면 몸 둘 바를…….”

마르바스는 자연스레 그런 레라지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바닥 두 개를 합친 정도 되는 크기의 보석함을 살펴보던 마르바스가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말했다.

“백금으로 만들어졌군.”

“…아?”

“성력을 집어넣었을 가능성이 크지.”

신관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신구는 바로 백금이었는데, 그들의 하얀 복장에서 눈에 띄지 않는 장신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력을 담을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유심히 보석함을 관찰하던 레라지에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더욱 확실해지는 거군요.”

그 말대로였다. 하지만 확신을 하면서도 마르바스는 쉽사리 보석함에 손을 대지 못했다.

‘…만약 아니면?’

여기에 물건이 없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나? 만약 다시 시작한다면, 그러면 물건을 찾을 수는 있나?

복잡해지는 머리에 망설임이 길어지는데 레라지에가 당연하다는 듯 상자에 손을 올렸다.

“열어 볼까요?”

열어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도 레라지에는 태연해 보였다. 마르바스는 그 얼굴을 보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 보면 알겠지.’

이게 끝일지, 아니면 또 다른 시작일지.

마르바스의 답에 레라지에가 그를 뒤로 물리더니 곧장 보석함을 열었다.

화아앗-!

동시에 성력을 가득 품은 하얀빛이 보석함 밖으로 퍼져 나오고 레라지에에게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레라지에는 부득불 마르바스의 앞에 버티고 서서 그의 자리를 지켜 냈다.

잠시 뒤, 고통 섞인 신음이 끝나고 비틀거리던 레라지에가 걸치고 있던 로브의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그러고는 마르바스를 돌아보며 보석함을 내밀었다.

“…폐하.”

레라지에의 손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잔뜩 짓물러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가래가 낀 듯 잔뜩 거칠어져 있었다.

마르바스는 레라지에의 상태를 뻔히 짐작하면서도 담담하게 그가 건넨 보석함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그의 손가락만 한 열쇠를 발견했다.

그걸 집어 들자 레라지에가 비틀거리며 상자가 있던 바닥 밑에 자리한 조그만 구멍을 가리켰다.

마르바스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열쇠를 구멍 안에 넣고 돌렸다.

다닥,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커다란 진동이 일었다.

콰강, 강,

큰 소리와 함께 차례로 바닥이 가라앉고 이내, 동그란 구멍이 나타났다.

시커멓기 짝이 없어서, 안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검은 구멍이.

“들어가실 겁니까?”

“그래.”

손가락을 튕겨 빛무리를 구덩이에 밀어 넣어 보던 레라지에가 순식간에 흩어지는 마력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기에 한정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안에서는 마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상관없어.”

단호한 그의 태도에 잠시 침묵하던 레라지에가 뒤로 한 발 물러나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무사히 돌아오시길.”

누가 할 말을.

마르바스는 구멍이 만들어진 여파로 슬슬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입구 쪽을 쳐다보다 담백하게 답했다.

“그대도.”

작게 끄덕여지는 고개를 확인한 마르바스는 지체하지 않고 검은 구멍 안으로 뛰어내렸다.

* * *

마법을 한창 지켜보던 아이들은 덕분에 마법사에 대한 경계가 풀렸는지 이제는 그와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었다.

루미에르의 말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마법사도 꽤 열성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친해진 건 다행인데.’

제냐는 생각보다 늦어지는 신호에 애써 초조함을 달랬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살피던 제냐는 여전히 고요하기 짝이 없는 바깥의 모습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그녀의 옆에 있던 루미에르가 물었다.

“걱정됩니까?”

“네.”

“그 두 명이 뭘 하고 있는데요?”

그러고 보니, 루미에르에게 아직 그들이 뭘 하려는 건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저 사람이 같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계약을 했다지만, 저 마법사가 있는 곳에서 모든 걸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지금 저 마법사는 아이들 사이에서 잘난 척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물건을 하나 찾고 있어요.”

“무슨 물건요?”

“‘천계의 보석’ 또는 ‘천계의 눈’이라는 걸 알아요?”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던 루미에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 본 적 있어요.”

알고 있다니 그럼 이야기가 쉬워졌다.

“마왕이 찾는 게 그거예요.”

“…그걸요?”

사실 제냐는 여러 번 고민했었다. 루미에르에게 예언과 관련된 이야기를, 성녀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왕이 용사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은 것도 그가 더 이상 신전과 엮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신전은 마왕이 알아서 처리해 줬으면 좋겠어.’

루미에르는 그냥 편하게 이곳에서 타이밍을 기다리다가 몸 성히 신전을 나와 자유를 찾았으면 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으니까.’

고작 두 명뿐이라고는 해도 마왕과 레라지에는 강하니까. 마왕도 전면전을 할 생각은 없다고 했었고.

그러니까 이대로 모른 척 입을 다물고 싶었다.

“뭐, 우리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그건 마왕과 레라지에 담당이니까.”

그러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려는데, 루미에르가 먼저 그녀를 불렀다.

“제냐.”

“네?”

“제냐와 마왕의 사이는 뭔가가 바뀌었어요. 그렇죠?”

잠시 침묵하던 제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제냐와 마왕의 사이는 바뀌었다.

“달라졌죠.”

그러자 루미에르가 묘한 얼굴을 하더니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마왕이 곤란해지는 건 싫은 거죠?”

그 말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편하게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제냐가 몸을 일으키며 루미에르의 손목을 붙들었다.

“뭐 숨기고 있죠?”

루미에르가 잠시 창밖을 쳐다보며 여상하게 답했다.

“소란스럽긴 하네요. 많이.”

설마.

제냐가 말을 잇지 못하는데, 루미에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부딪치고 있어요. 아주, 크게.”

부딪치고 있다고? 제냐가 황급히 루미에르를 따라 창밖을 쳐다봤다.

“왜 난 안 들리는…….”

말을 하다 말고 무언가 깨달은 제냐가 마법사를 돌아봤다.

그러자 바뀐 이쪽 상황을 눈치챘는지, 그들에게 다가오던 마법사가 찔린 얼굴을 했다.

“지금 마법을 쓴 거예요?”

도대체 어느 틈에?

마법사가 황급히 눈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어이가 없어진 제냐가 마법사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정강이를 차 버렸다.

“야!”

악 소리를 내며 정강이를 잡고 방방 뛰던 마법사가 소리를 질렀지만 제냐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명령했다.

“시끄럽고 마법 해제해!”

“쟤가 시킨 건데 왜 나한테……!”

아까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인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 책임인지 따져 물을 시간은 없었다. 제냐가 마법사의 말을 잘라 냈다.

“빨리!”

그러자 마법사가 루미에르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눈을 감았다. 동시에 마법이 사라진 듯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콰강, 텅! 타앙-!

“하.”

이제까지의 고요가 거짓이라는 걸 증명하듯 귀가 웅웅 울렸다. 허탈한 숨을 내쉰 제냐가 루미에르를 올려다봤다.

“알려 준 이유가 뭐예요?”

이대로 모른 척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를 한 건…….

“제냐가 신경 쓰니까요.”

“…그래서요?”

“도와주고 싶어 할 것 같아서?”

제냐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그녀는 루미에르가 신전의 일에 엮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말대로 마왕이 이대로 당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마왕을 용서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랬다.

‘내 손이면 몰라도 신전의 손에는 절대 안 돼.’

제냐가 결연한 눈으로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나는 당신이 이 일에 엮이는 게 싫어요.”

“네.”

“당신도 아마 같은 마음이었겠죠.”

그러니까 마법사를 이용해 이런 마법을 썼던 거고.

루미에르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신 말대로 나는 마왕이 신경 쓰여요.”

이런 이기적인 부탁을 하게 된 게 너무 미안했다.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루미에르가 그런 제냐의 뺨을 손으로 붙잡으며 다시 시선을 맞췄다.

“그자 역시 당신을 신경 썼죠. 그래서 당신을 나한테 보낸 거고.”

푸른 눈이 다정하게 휘어졌다.

“나는 그게 고마워요. 그러니까 따지자면 나도 빚이 있는 거죠.”

제냐의 마음을 다 알고, 마음의 짐을 덜어 주려는 그가 고마웠다.

그러니까 이 말만은 제대로 해야 했다.

“루미에르, 나를 도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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