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쳐다보는 눈빛이 좀 그렇더라니. 제냐는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뒤를 돌아봤다.
“잠시 나와 보게.”
성기사는 아이들이 있는 방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그녀를 불러내며 먼저 방을 나섰다.
제냐가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는 확신이 가득 담긴 행동이었다.
“무슨…….”
제냐는 앞으로 나서려는 루미에르의 등을 콕 찔렀다.
“하지 마요.”
“그래도.”
루미에르의 목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씨씨?”
“얘들아, 잠시 나갔다 올게. 그동안 손님분들과 함께 있으렴.”
제냐는 아이들과 똑같은 표정을 한 루미에르를 보며 옅게 웃다가 방을 나섰다. 방에서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성기사가 엄한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서둘러 문을 닫고 그 앞으로 다가가자마자 성기사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타박했다.
“루미에르 님께 아이들 이야기를 왜 한 거지?”
“죄송합니다. 이미 다 아시고 여쭤보셔서…….”
성기사가 눈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다.
“다 아신 상태였다고?”
“진 님께서 말씀해 주신 듯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고 진을 팔아먹은 제냐가 송구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하여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성기사가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아까 방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지?”
진의 뻗대던 태도에 질린 건지, 아니면 그냥 제냐가 더 캐묻기 쉬운 상대라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다. 뭐가 됐든 잘못된 선택이긴 했지만. 제냐는 이번에도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주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나?”
“그렇다기보다는 화가 나신 것 같았습니다.”
성기사가 심각하게 물었다.
“…많이?”
제냐가 침묵으로 긍정하자 성기사가 작게 혀를 차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잠시 여기 좀 맡아 주게.”
“네?”
“루미에르 님과 저 마법사가 여길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붙어 있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제냐가 할 말을 잃고 성기사를 쳐다봤다. 만약 그녀가 평범한 신관이었다면 절대 실현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이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다 내 잘못으로 떠넘기겠지.’
오늘 루미에르와 마법사를 만나게 했던 것부터 용사 후보와 루미에르의 만남까지 전부.
“이번 일만 잘하면 너도 본신전 소속이 될 수 있을 거다. 내가 잘 말해 주지.”
네가 무슨 힘이 있는데?
성기사는 제냐의 답을 듣지도 않고 뻔뻔한 얼굴로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격이네.”
저자에게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뭐, 솔직히 자업자득이었다. 이쪽 입장에서는 아주 잘된 일이었고.
비웃음을 머금은 제냐가 다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기가 무섭게 그 앞에 딱 붙어 서 있었던 것 같은 루미에르와 눈이 마주쳤다.
제냐는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에도 놀라지 않았다.
‘솔직히 이럴 것 같았어.’
아이들과 함께 있으라고 했지만 루미에르가 그 말을 들었을 리가 없었다.
제냐는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루미에르를 뒤로 밀어내며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녀가 딱히 화내거나 놀라는 기색이 없자 루미에르가 바로 질문을 던져 왔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다 들은 거 아니에요?”
무심하게 대꾸하자 루미에르가 곱게 미소를 지었다.
‘뭘 잘했다고 웃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는데, 얼굴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뭐…….”
당연히 시선의 주인이 마법사라고 여겼던 제냐는 방의 풍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당당하게 방 한가운데에 서 있는 마법사와 방의 주인이면서 방 한구석에 자기들끼리 오밀조밀 모여 있는 아이들.
그리고 이제까지 그녀를 쳐다보던 게 자기들이라는 듯 눈이 마주치자 그녀에게 우르르 몰려오는 모습까지.
그나마 이 방 안에서 믿을 만한 이는 제냐밖에 없다는 듯 아이들이 그녀의 손을 붙잡아 왔다.
“씨씨.”
“씨씨, 누구야?”
그러면서 은근슬쩍 제냐를 잡아당겨 루미에르와 떨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무서운가?’
제냐가 버티지 않고 아이들의 약한 힘에 끌려가는데, 옆에서 루미에르가 어깨를 감싸 왔다.
탁.
루미에르의 힘에 제냐가 자리에 멈춰 서자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급하게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다.
당황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제냐가 어깨를 붙들고 있는 루미에르의 손을 쳐 내려는데, 아이 중 용기가 있는 아이가 나섰다.
“아저씨, 누구예요?”
그러고 보니 성기사 때문에 루미에르를 제대로 소개도 해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저 얼굴을 꺼리기도 쉽지 않은데.’
제냐가 얼른 그를 소개해 주려는데 그보다 먼저 루미에르가 입을 열었다.
“씨씨를 좋아하는 사람.”
뭐래? 제냐가 홱 고개를 돌리는데 아이가 그녀에게 조금 더 붙어 서며 물었다.
“씨씨를 좋아해요?”
“응.”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하는 루미에르에 제냐가 어깨를 마구 털었다. 하지만 그의 단단한 팔은 그걸로는 풀리지 않았다.
“또 난리네. 아주 귀를 뜯어 버려야지.”
뒤에서 들려오는 마법사의 투덜거림에 제냐의 몸짓은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보란 듯이 반대 손도 끌어와 옆에서 제냐를 끌어안아 왔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제냐가 루미에르를 올려다봤다가 너무 가까운 거리에 다시 앞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사이 한 아이가 따지듯 외쳤다.
“내가 더 좋아해요!”
어린아이의 귀여운 투정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텐데 루미에르는 단호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그 냉담한 반응에 아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맞거든요? 나는 어, 5년 동안 좋아했어요!”
루미에르는 바늘 한 점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무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 루미에르의 표정에 자극을 받은 걸까? 아이들이 너도나도 입을 열었다.
“나는 3년.”
“나는 4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외치는 모습이 제법 비장했다. 그런 아이들의 외침을 전부 들어 주던 루미에르가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나는 10년.”
순 거짓말!
제냐가 코웃음을 치는데, 순진한 아이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시작했다.
“10년?”
“내 나이보다 많아.”
“나, 나는…….”
아이들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루미에르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좋냐?’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튀어나올 것 같았던 물음을 삼킨 제냐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자, 얘들아. 소개할게.”
제냐가 그녀를 안고 있던 루미에르의 손을 드디어 떨쳐 내고 옆으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손뼉을 치며 작위적으로 목소리를 밝게 만들었다.
“이분은 바로 용사, 루미에르 님이랍니다.”
보란 듯 손을 흔들어 가며 루미에르를 가리키자 아이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용사?”
“용사님?”
놀란 눈이 루미에르를 훑다가 이내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제냐를 돌아봤다.
“저희도 용사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맞아. 열심히 하면 사람들한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빛이 된다고 했는데!”
“모두가 우릴 좋아해 준대요!”
“맞아, 맞아.”
아이들을 어떤 식으로 세뇌하는지 안 봐도 뻔했다. 신전에 대한 욕을 삼키며 애써 웃는데, 한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용사님이 씨씨를 좋아하는 거예요?”
왜 계속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어색하게 굳은 제냐가 하하, 웃으며 답했다.
“루미에르… 님이 농담하신 거야.”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미에르가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
상반된 둘의 말에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 묘한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아이들이 다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용사가 되면 다들 우리를 좋아해 준다고 했는데.”
“아닌가 봐.”
그게 아니라고, 다들 너희를 좋아해 줄 거라고 이야기해야 하나?
‘그럼 나도 루미에르를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잖아.’
지금 여기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방금 아이들이 깨달은 게 사실이기도 했다. 신전이 한 모든 말들을 다 거짓부렁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들에게 너희는 다 속고 있다고 외칠 수도 없었다.
막막함에 제냐가 눈을 질끈 감는데, 루미에르가 그녀의 손을 붙잡더니 폭탄선언을 했다.
“이 사람은 씨씨가 아니야.”
제냐가 귀를 의심하며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한단 말인가?
하지만 루미에르는 제냐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이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냐도 얼른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쳐다봤다.
바깥에 사람들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큰 소리라도 내면…….
그러나 돌아본 아이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놀라지도, 무서워하지도 않는 그 모습에 되레 제냐가 놀라는데 아이 중 하나가 태연하게 답했다.
“저희도 알아요.”
“맞아. 완전히 다른 사람인걸?”
“응. 씨씨가 아니야.”
하나둘 제냐가 씨씨가 아님을 인정하는 그 모습에 제냐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걸 알면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군다고? 제냐가 입을 뻐끔거리는데 아이가 밝게 웃으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씨씨인데?”
“원래, 씨씨는 자주 바뀌는 거예요.”
“맞아. 씨씨는 6번째 씨씨야.”
“나한테는 5번째!”
설마, 이제껏 아이들에게 그들을 돌봐 주던 신관의 이름도 알려 주지 않았던 건가?
‘씨씨는 신관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을 돌봐 주던 사람들의 명칭이었던 거야?’
정말 대단하셨다. 신전의 믿기지 않는 행태에 코웃음이 나오는데, 아이들이 상황에 맞지 않게 순진하게 외쳤다.
“나는 지금 씨씨가 좋은데.”
“이번에는 오래 있으면 좋겠어요!”
“맞아, 맞아.”
“친절한 씨씨가 좋아!”
“냄새도 좋고, 화도 안 내!”
“응응.”
감당 안 되는 상황에 제냐가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