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냐는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루미에르를 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조금 짜증이 나서 신경질을 내긴 했지만 울려 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운다고 다 끝나는 건 아니잖아?’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따져 봤자 욕먹는 건 제냐였다.
‘이미 내가 나쁜 것 같은데.’
눈가를 벌겋게 물들이고 우는 걸 보고 있자니 괜히 눈치가 보였다.
제냐가 입만 뻐끔거리는데, 옆에 있던 마법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어이쿠, 울렸네. 정말 나쁘다. 너도 성기사 꼬셨잖아.”
“뭐?”
황당함에 마법사를 노려보던 제냐는 얼굴에 와 박히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폭포같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루미에르를 발견했다.
“아니, 그건…….”
저도 모르게 변명하려던 제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도대체 여기서 자신이 잘못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가 입을 다물자 루미에르의 서러움은 더 커진 모양이었다. 제냐는 크게 어깨를 들썩이는 루미에르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켜보다가 화살을 마법사에게로 돌렸다.
“너 때문에 더 크게 울잖아!”
그러자 마법사가 두 손으로 자기 몸을 감싸며 억울해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애당초 쟤는 요즘 내 말에 관심도 없거든?”
듣기에 따라서는 조금 슬픈 말이었지만 제냐는 그 정도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분풀이한 거야?”
“분풀이라니?”
제냐는 지금 누구에게라도 이 책임을 떠넘기고 싶었다.
“맞잖아!”
“그런데 왜 또 반말이야?”
“원래 처음부터 반말했거든?”
“아까는 존댓말 써 줬잖아!”
음, 그랬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다시 존댓말을 쓰는 건 우습지 않은가?
“내 맘이야.”
“너야말로 괜히 나한테 화풀이하잖아!”
눈치가 좋은데? 제냐는 그 속내를 숨기며 짜증을 섞어 말했다.
“네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렇지. 안 꼬셨다고! 자기 혼자 갑자기 윙크한 게 왜 내 탓…….”
“…윙크?”
루미에르의 주변으로 시커먼 안개가 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제냐가 서둘러 마법사를 돌아보며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좀 해 봐!’
그러자 마법사가 질색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해? 몰라!’
제냐가 눈에 힘을 주며 그의 심장을 가리켰다.
네 계약을 잊었냐고. 너는 우리를 도와줘야 한다고.
그러자 마법사가 억울한 얼굴을 했다가 누가 봐도 연기가 분명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누, 눈에 먼지가 들어갔었나 보지.”
그걸 연기라고? 아까 그 명연기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지만 타박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제냐는 얼른 마법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 맞아. 다 우리 착각이라니까?”
됐나? 마법사와 시선을 교환하던 제냐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루미에르에 답답해졌다.
“왜 또 울어요?”
따지듯 묻자 루미에르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그래, 왜. 벌어지는 입술을 빤히 쳐다보며 답을 기다리는데 어이가 없는 물음이 돌아왔다.
“왜 그렇게 친해진 거예요?”
친해졌다니, 누가?
어리둥절한 제냐가 마법사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루미에르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만 봐요.”
그 목소리가 마법처럼 제냐를 잡아끌었다. 고개를 돌리자 눈물 젖은 얼굴이 제냐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녀가 아스트리아에 대해 물었습니다. 제 앞에서 제냐가 소중한 척 구니까 역겨워서.”
역겨운데 왜 웃었나 싶은데 지금은 입을 열 타이밍이 아니라는 걸 모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비꼬고 모욕을 줬습니다. 모욕할 때는 웃는 얼굴이 효율적이니까…….”
그래서 그렇게 환하게 웃는다고?
‘개, 객관적인 시선이 아니었나?’
인정할 건 해야 했다. 그녀는 제레미야와 관련된 일에 과하게 예민한 편이었다. 민망해진 제냐가 눈을 돌리려는데, 루미에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냐가 한심하다고 생각할까 봐, 다시 만났는데 그 여자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고.”
다시 말끝이 잦아들고 눈물이 애처롭게 떨어졌다.
“미워하지 말아요.”
붉어진 눈가와 간절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민망함보다 미안함이 커졌다.
제냐가 얼른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 주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그 손을 붙잡고 얼굴을 묻었다.
“잘못했어요.”
음울한 목소리에 재빨리 마주 사과했다.
“나도 미안해요. 내가 예민했어요.”
루미에르가 고개를 젓더니 꼼지락거리면서 제냐의 손을 깍지를 껴서 잡았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차린 제냐가 팔 하나를 벌리자 루미에르가 냉큼 제냐를 끌어안아 왔다.
제냐가 어색하게 그걸 받아 주다가 허탈한 얼굴의 마법사를 발견했다.
“가지가지…….”
제냐가 눈썹을 치켜들자 마법사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보는 시선이 없어지자 훨씬 편해진 제냐가 편하게 루미에르의 등을 두드렸다.
뭔가 루미에르가 너무 강하게 허리를 껴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목에 닿은 숨결이 간지러웠지만.
일단은 아직도 울고 있으니까.
제냐는 그렇게 한참을 루미에르를 안고 있어야 했다.
* * *
루미에르가 울음을 그친 지도 한참. 이제 슬슬 대화를 했으면 하는데 루미에르는 딱히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왜요?”
제냐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옆에 딱 붙어 있는 루미에르를 슬쩍 쳐다봤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 그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몇 분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가 신경질을 냈다.
“징그러운 짓 그만하고 하려던 거나 해.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거야?”
제냐가 루미에르를 달래 주는 사이 방에 있는 쿠키를 전부 먹어 치운 먹보가 지루한 낯으로 의자에 늘어졌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관들에게 붙잡혀 있어야 한다니까?”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아냐고 소리를 지르는 마법사에 제냐가 귀를 막았다.
그쪽 사정이야 이쪽이 알 바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대화를 하긴 해야 했다.
제냐가 마법사를 무시하고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루미에르에게 물었다.
“진정됐어요?”
“네.”
물론 루미에르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지금 당장 양손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기에 얌전히 그에게 손을 넘겨준 제냐가 말했다.
“일단 지금 당장 탈출할 수는 없어요.”
“왜요?”
“신호가 와야 하거든요.”
“신호요?”
제냐는 그녀의 몸을 훑어보는 루미에르에 고개를 저었다.
“물건이 아니에요. 신호가 뭔지는 나중에 때가 되면 알 거예요.”
무슨 말인지 궁금할 텐데, 루미에르는 그녀를 채근하지 않고 순하게 웃었다.
“그래요.”
저 짧은 말 한마디가 뭐가 그렇게 불편한 건지 마법사가 루미에르를 보며 한껏 빈정거렸다.
“착한 척하기는.”
마법사와 투닥거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걸 아는 제냐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 신분을 유지하면서 당신과 있는 시간을 늘려야 하는데.”
제냐는 마법사의 생떼에 간신히 방으로 들어왔던 것을 떠올리며 루미에르를 쳐다봤다.
“불가능하겠죠?”
“네. 마법사도 곧 불러낼 겁니다. 지금도 바깥은 시끄러워요.”
“음.”
일단 그녀가 왔다는 걸 알렸고 루미에르가 무사한지도 확인했으니 지금 헤어져도 문제는 없었다.
‘운이 나쁘면 신호가 왔을 때나 루미에르를 볼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었으니까.’
지금은 그녀가 생각했던 최악보다 훨씬 상황이 좋았다. 따로 만날 장소를 정할 수도 있고 작전도 설명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제냐는 불안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번에도 나를 위한답시고 이곳에 남겠다고 하면 그걸로 끝이에요.”
혹여나 머뭇거릴까 걱정하는데 루미에르의 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안 그래요.”
목소리만이 아니라 그의 눈빛도 또렷하니 믿음이 갔다. 단호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제냐가 만족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여기서 제 신분은 용사 후보들을 돌보는 하급 신관 씨씨예요.”
제냐가 보란 듯 팔을 들어 입고 있는 옷을 보여 줬다.
“본신전 소속 신관들 대신에 신전 잡일을 하고 있다가 마법사에게 붙잡혀 그의 시중을 들고 있는 거죠.”
콕, 마법사를 가리키자 그가 미간을 좁혔다.
“네가 붙잡힌 게 아니라 내가 붙잡힌 거겠지. 그런데 용사 후보라니?”
이번에도 그의 말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뒷말은 설명해 줄 필요가 있었다.
“루미에르의 다음 용사를 만들려고 이미 준비 중이었던 모양이에요.”
말하면서 루미에르의 반응을 걱정하는데, 생각보다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괜찮아요?”
루미에르는 그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네, 이제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너나 우리나 소모품인 건 똑같네.”
사실 루미에르보다는 마법사의 안색이 묘하게 가라앉아 보이기까지 했다. 작게 중얼거리는 마법사의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루미에르가 제냐에게 물었다.
“후보들이라는 건 후보가 여러 명이 있다는 소리네요.”
“일단 내 담당은 다섯 명이에요.”
여태까지 총 몇 명의 후보들이 있었는지, 앞으로는 또 얼마나 있는 건지는 그녀도 몰랐다.
“이전에 왔던 후보들은 전부 부적합 판정을 받고 본래 신전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돌려보내진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오늘 그녀가 본 애들은 어떻게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애들을 판정하기 전에 루미에르가 돌아와서 일정이 붕 뜬 거죠.”
찝찝함을 무시하려 애쓰는데 마법사가 물었다.
“본래 애들 돌보던 신관은 어디 갔어?”
“돈 받고 신나서 떠났어요.”
“뻔하네.”
어깨를 으쓱이자 루미에르가 제냐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어요.”
갑자기? 제냐가 시선에 루미에르가 옅은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줬다.
“용사 후보들을 만나고 싶다고 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