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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88) (88/145)

진은 이 두 연놈의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심장에 묶인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의 만남을 도와줘야 했다.

진은 방에서의 광기 어린 모습과 달리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서요?”

엇비슷한 이야기의 연속이었다고. 같은 이야기를 표현만 다르게 한 거라고 몇 번이나 설명했는데, 여자는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야 성에 차겠다는 듯 끝까지 진을 닦달했다.

결국 진은 기억을 박박 긁어모아 루미에르가 했던 말을 내뱉어야 했다.

‘반절 이상은 다 지어낸 것 같아.’

아무리 진이 똑똑하다고 해도 흘려들은 이야기까지 전부 머리에 담고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스스로가 알고 있는 온갖 미사여구를 다 꺼내어 여자를 칭찬하고 나니 온몸이 피곤했다.

마음 같아서는 못 가겠다고 조금만 쉬다 가자고 버티고 싶었지만, 여자에게는 배려심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계약.”

말 한마디로 입을 다물게 한 여자는 냉정하게 그를 재촉했다. 마법사로의 삶을 담보 잡힌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이 여인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가증스럽긴.’

진은 방에서와 달리 지나가는 신관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는 여자를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진 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예의를 가장한 여인을 팩 외면한 진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방에는 어떻게 데리고 들어가라는 거야?’

루미에르의 방 앞에 있는 이들은 전부 다 성녀의 최측근들로서, 어영부영 닦달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아까처럼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이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 게 뻔히 보이던 성기사를 떠올리는 사이 발걸음이 느려졌는지 뒤에서 여자가 그의 등을 푹푹 찔러 댔다.

진은 가려운 등에 진저리를 쳤다. 뭐가 됐든 얼른 이 여자를 떨쳐 내고 싶었다.

‘이건 얼굴만 예쁘지…….’

성격이 글러 먹었다. 말만 부드럽고 행동이나 표정에 공갈과 협박이 늘 따라붙어 있었다.

“사람 얼굴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루미에르는 사람의 얼굴을 중시하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화려한 미인보다는 단정하고 우아한 인상의 미인을 좋아하나 보지.’

쯧쯧, 혀를 차는데 뒤에서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딴생각하지 말고 얼른 움직여요.”

“그래, 간다 가!”

진은 여자가 헐레벌떡 쫓아오는 걸 기대하며 뛰듯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먼저 체력이 떨어진 건 진이었다.

“허억, 헉!”

“…체력이 정말 볼품없네요.”

그 한심하다는 목소리에 진이 발끈했다.

“내가 뛰어다닐 일이 어디 있다고?”

마법사가 지구력이 좋은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몸으로 때우는 건 저기 성기사 같은 사람들이 하는 거지!

더군다나 최근 며칠간은 계속 방에만 갇혀 있었으니 더했다.

하지만 여인은 진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루미에르가 마족들을 다 처리했다고는 들었어요.”

“우리도 아예 안 한 건 아니야!”

“기여도로 따지면 어느 정도? 10%는 했어요?”

반 정도는 했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아무리 해도 많아 봐야 20%였다. 하지만 여기서 20%라고 정정하면 분명 저 비꼬는 어조로 그걸 자랑이냐고 하냐고 되묻겠지.

“이익!”

분함에 발을 구르는데 여인이 피식 그를 비웃었다.

“내가 말싸움으로는 마왕도 이겨 먹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얼른 움직여요.”

흥, 제가 무슨 마왕을 이겨? 허풍도 저런 허풍이 없었다. 하지만 여자의 말대로 이야기를 계속해 봐야 답답해서 속이 터지는 건 진이었다.

그 뒤로 진은 입을 꾹 다물고 여자를 안내했다.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진은 그동안 여인에게 당한 모든 분을 풀듯 성기사를 몰아쳤다.

“…마법사 진 님을 제외한 다른 분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완고한 성기사의 태도에도 진은 물러섬이 없었다.

“뭐? 그럼 차는 누가 타라고? 나는 차 탈 줄 몰라.”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성기사를 올려다보자 그가 온화한 미소를 띠고 답했다.

“저희가 준비해 드리겠…….”

진은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어 먹고 소리를 질렀다.

“그사이 차가 식어서 떫어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럼 냉침된 차를…….”

허! 보란 듯이 코웃음을 친 진이 상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게 진정한 차 맛을 모르네? 모름지기 차는 뜨겁게 먹는 게 제맛이야.”

진정한 차 맛이 뭔지 알게 뭔가? 하지만 진은 뻔뻔한 표정을 유지했다. 성기사의 입꼬리가 부들거리며 떨리는 게 예리한 눈에 표착됐다.

“그럼, 문밖에서 차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라고? 그러다가 이야기 흐름이 끊기면?”

“…….”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글부글 끓는 게 보이는데 성기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고, 속 시원해!’

보아하니 동료 중 루미에르와 이 정도까지 시간을 보낸 이가 자신뿐인 것 같았다.

‘더 당당해져도 된다!’

빠르게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계산을 끝낸 진이 이제까지의 경험을 토대 삼아 오만방자하게 외쳤다.

“나를 이렇게 박대했다가 네가 무슨 일을 당할지는 알고?!”

가진 것 없이 배짱을 부리니까 굉장히 흥분되고 재미있었다.

‘혹시 또 알아? 이 여자를 데려와 준 덕으로 루미에르에게 뭐라도 받을 수 있을지!’

한껏 부푼 자신감에 진은 턱을 한껏 치켜들고 가슴을 쭉 폈다.

“얼른 문 열어!”

지금 이 문을 열지 않으면 바닥에 주저앉아 행패를 부리겠다는 뜻을 가득 담아 성기사를 노려봤다.

성기사의 덜덜 떨리는 주먹을 보면서 진은 그의 승리를 만끽했다.

그리고 잠시 뒤.

스륵,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보며 진은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 * *

루미에르는 그의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 진상. 완전 최악이네요.”

“뭐? 네가 하란 대로 해서 그런 거거든?”

시계 속 제냐의 초상화를 쳐다보다가 마법사가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 또 레라지에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 하여 그의 방문 요청을 받아들였고.

그런데 왜 지금 그의 눈앞에 제냐처럼 생긴 여자가 서 있는 거지?

“난 나를 무사히 방으로 데려오라고 했지, 그따위로 굴라고 안 했어요.”

제냐처럼 생긴 게 아니라 정말 제냐였다. 역시 아까 본 사람이 제냐가 맞았다.

“허, 허! 내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

“보니까 자기도 즐기던데, 뭘.”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던 루미에르는 거슬리는 단어에 정신을 차렸다.

“…자기?”

그러자 이제껏 마법사와의 말싸움에 집중하던 제냐가 그를 돌아봤다.

“루미에르!”

눈 색이 다르긴 했지만 정말 제냐가 맞았다. 루미에르는 침대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너는 거기서 그게 문제야?”

옆에서 마법사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루미에르는 방해꾼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왜 제냐가 여기에……. 조금 전 자기라고 한 건 뭐,”

물론 완전히 무시되진 않았다. 마법사와 제냐의 사이가 너무 가까워 보여서.

그러나 제냐가 답을 하기도 전 마법사가 진저리를 쳤다.

“그건 됐다니까! 내 앞에서 또 사랑싸움하지 마!”

그 큰 목소리에 제냐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녀가 짜증스레 미간을 좁히며 마법사를 노려봤다.

“목소리 좀 낮춰요!”

“너나,”

또다시 소외되는 느낌에 루미에르가 얼른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제냐.”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하얀 천을 풀어내자 그토록 그리워하던 얼굴이 보였다.

“보고 싶었어요.”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나흘 만에 다시 본 제냐가 너무나 반가웠다.

더듬더듬 제냐의 얼굴을 매만지던 루미에르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냐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법사가 토할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진짜 싫다.”

이번에도 그 말을 가볍게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려는데, 그를 안아 줄 것처럼 손을 올리던 제냐가 움찔 몸을 굳히더니 손을 내려놨다.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린 루미에르가 제냐의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서늘한 눈으로 마법사를 노려봤다.

그러자 마법사가 눈을 굴리다가 어색하게 호응했다.

“…와, 와아! 보기 좋은 커플이네. 응. 그래.”

하지만 그런 마법사의 노력에도 제냐는 그를 밀어냈다.

제냐의 포옹을 받지 못한 루미에르의 눈이 더 사나워졌다. 물론 제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기색은 사라졌지만.

“이렇게 빨리 와 줄 줄 몰랐어요.”

눈매를 축 늘어뜨리고 제냐가 약한 표정을 짓는데, 붉은 입술이 보였다.

헤어지기 전 숨결을 나눴던 그 입술이었다. 그걸 자각하는 순간 몸에 열이 확 올랐다.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다시 한번 제냐를 끌어안으려는데, 가슴팍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정확히는 그를 밀어내는 그녀의 손길이.

‘역시 저놈을 치워야…….’

모든 게 함께 방에 있는 저 마법사 탓이라는 생각에 살벌해진 얼굴을 드는데, 귓가에 냉랭한 제냐의 목소리가 닿았다.

“그래서 제레미야랑 놀고 있었어요?”

응?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마주친 보랏빛 눈에 냉기가 철철 흘러넘쳤다. 차갑다 못해 살을 엘 것 같은 눈빛에 루미에르가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왜 화가 났지?’

그러니까 제레미야랑 놀고 있었다고.

‘아!’

굳은 머리가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그, 그게 제가 부른 게 아니라 자기가 찾아온 겁니다.”

“자기?”

뾰족한 눈매를 정면으로 마주한 루미에르는 초조해졌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조금 전 자기가 했던 짓은 생각 못 하고 조금 억울해졌던 루미에르가 얼른 말을 정정했다.

“아니, 황녀가…….”

“그래서 억지로 만났다?”

“…황녀를 피하는 건 소문에 악영향을 주니까…….”

소문을 이야기하자 자연스레 또다시 키스가 떠올랐지만 부끄러워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루미에르는 억지로 만난 사람한테 그렇게 예쁘게 웃어 줘요?”

“그건…….”

지금 상황에서 황녀를 모욕 줬다는 걸 말해도 되는 걸까?

안 그래도 화가 난 것 같은데.

루미에르가 우물쭈물 입을 열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르는데, 옆에서 한심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리 났다. 난리 났어.”

상황이 급박해 그 말을 또다시 무시하는데 말은 끊이지 않았다.

“아주 둘 다 똑같아요. 똑같아. 천생연분이야.”

저것보다는 제냐의 상태를 신경 써야…….

“그냥 사귀라니까. 아주 잘 어울리는데…….”

“입 좀 닥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마법사가 눈을 홉뜨고는 과장되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눈만 돌려 그의 옆을 쳐다보는 것이다. 그 시선이 닿는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지 않았다.

루미에르는 얼굴에 닿는 매서운 시선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제냐가…….’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

결국 루미에르는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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