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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대상이 잘못됐는데요 (87) (87/145)

속으로 쯧, 혀를 찬 제냐가 책상 옆에 들고 온 쿠키를 내려놓는데 마법사가 당연하다는 듯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참자.’

덜그럭거리는 문을 보니, 아직 문밖에 성기사가 있는 것 같았다.

“너, 뭐 해? 눈이 없어? 차 따르라니까?!”

마법사의 히스테릭한 목소리는 분명 밖으로도 새어 나갔을 것이다. 제냐는 주의 깊게 문 쪽을 지켜보며 차를 따라 줬다.

‘루미에르나 마왕처럼 기척을 느낄 수 있으면 좀 좋아?’

조용해진 것 같기는 한데, 말을 해도 좋을지 아닐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마법사는 거리낌 없이 제냐에게 일을 시켰다.

“저쪽에 있는 종이 가져와.”

마왕보다도 더 오만해 보이는 이놈의 머리통을 내리치지 않기 위해 인내를 되새기며 제냐는 조용히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야 좀 잘하네. 그래, 거기도 잘 주물러 봐.”

일부러 마법사의 성질을 긁어 바깥에 아무도 없음을, 아니 안쪽에 무슨 소란이 있어도 딱히 관여하지 않을 성기사들을 눈치챈 제냐는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내가 진짜 오늘 얼마나 힘들었냐면…….”

꽈아악-

제냐가 어깨를 주무르고 있던 손에 힘을 주자 마법사가 꽤액, 신경질을 냈다.

“야, 너 손에 힘 안 빼?!”

제냐가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목소리에 힘을 빼는 게 좋지 않을까?”

째릿, 고개를 돌려 그녀를 노려보던 마법사가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지금 나한테 반말한 거야?”

제냐가 다시 한번 손에 힘을 주며 답했다.

“귀가 먹었나.”

꽤 아팠던 모양인지 악 소리를 내며 어깨를 부여잡던 마법사가 고개를 세게 치켜들었다.

“너 뭐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걸까?

“뭐가, 뭐야?”

제냐가 보란 듯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내렸다.

“…설마.”

마법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알아보네?”

“누, 눈 색이…….”

상황을 부정하려는 마법사에 제냐가 눈을 두드렸다.

“마법이야. 모르진 않지?”

나름 잘나가는 마법사라며. 제냐의 말에 흔적을 찾는 것처럼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마법사가 눈을 질끈 감고 물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그야, 써먹을 수 있는 상대가 한정되어 있으니까?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

“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루미에르와 만나야겠는데.”

그러자 마법사가 꼭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몸을 마구 흔들며 귀를 막았다.

“악! 그렇게 좋으면 너희 둘이 그냥 이야기하든가!”

꽤 큰 소리에 제냐가 짜증스레 손을 뻗었다.

“입.”

거칠게 입을 틀어막은 제냐가 흉흉하게 마법사를 노려봤다. 그러자 겁에 질린 마법사가 조금 전까지의 과격한 행동을 멈추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순해진 눈매에 제냐가 작게 콧소리를 냈다.

‘조금 더 해 볼까.’

아랫것들을 겁주는 걸 전문으로 하던 사람을 늘 옆에서 봐 오지 않았던가?

제냐는 그녀의 기억 속, 엘리고스의 시선 ver. 1 혐오하는 시선을 꺼내 들었다.

“멍청한 건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지. 그러니까 만나야겠다고 하잖아.”

시선이 부딪친 마법사가 흠칫 티 나게 몸을 떨었다. 역시.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눈을 내리깔고 엘리고스의 시선 ver. 2 무언의 경고까지 알차게 써먹자 마법사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듣자마자 제냐는 손을 거칠게 떼어 냈다. 가쁜 마법사의 숨결에 손에 습기가 가득했다.

제냐가 그 손을 마법사의 어깨에 마구 닦으며 말했다.

“그래서 루미에르를 만날 방법.”

“오, 오늘은 이미 만나서 또 보러 가는 건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 하지만 내가 노력해 봐야지.”

눈을 치켜들자 말을 바꾼 마법사가 혼잣말치고는 아주 크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디가 우아하고 친절하다는 거야? 흉악하기 짝이 없는…….”

제냐가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하자 혼자 찔린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오후에 티타임을 한 번 더 갖자고 해 볼게. 신전 측에는 조금만 더 대화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 될 거야.”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짧게 치고 빠지는 작전이니까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상관이 없었다.

“미리 약속 잡아 놔. 만나러 가기 전까지는 나랑 같이 있겠다고 하고.”

“너, 너랑 같이 있겠다고 하라고?”

꽤 겁을 먹은 것 같은 모습이 웃겼다.

“적당히 핑계 대면 되잖아. 시중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다든가.”

“나, 나는 거짓말을 못해!”

또 빤히 쳐다보자 마법사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삐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데도 안 미안하네.’

마법사가 방을 나서기 전 다시 한번 제냐를 돌아봤다가 흔들림 없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방을 나섰다.

제냐는 다시 얼굴을 가리고 마법사를 따라갔다. 레라지에와의 계약으로 허튼 말을 할 수는 없겠지만 또 혹시 모르니까 확인을 해야 했다.

마법사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기사 둘에게 다가갔다.

“루미에르에게 3시쯤 한 번 더 보자고 전해 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으니까 또 보자고 하면 받아들일 거다.”

“…그렇습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신관은…….”

제냐는 그녀에게 와 닿는 성기사의 시선에 눈을 접어 웃었다.

“시중들 사람이 필요해. 언제까지 내가 혼자서 준비를 다 해야 해?”

“하지만…….”

성기사의 머뭇거림에 마법사가 짜증을 냈다.

“왜, 이런 것 하나 못 해 주나?”

“…아닙니다. 그렇게 하시죠.”

제냐가 어쩔 수 없다는 성기사의 얼굴에 결국 한숨을 삼키는 척, 고개를 푹 숙였다가 마법사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하급 신관 말고 다른 신관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시선이 부딪친 마법사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제냐가 눈을 부라리며 경고를 한 뒤 그녀의 계획에 재를 뿌리는 성기사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녀에게 찡긋, 윙크를 하는 성기사를 발견했다. 제냐가 가려진 천 아래, 입을 벌리는데 성기사가 마법사를 보며 말을 이었다.

“더 수준에 맞는 분을 붙여 드리죠.”

마법사를 쳐다보는 시선에는 그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제냐는 얼른 마법사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마법사가 윽, 작은 소리를 내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너, 너 나랑 장난해?”

“네?”

“여기서 더 과한 걸 요구했다가 완전히 윗분들한테 찍히라고?”

쓸데없이 예민해 보이는 게 아주 연기를 잘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나한테 상관 말고 네 일이나 해! 넌 들어와서 마사지나 마저 하고!”

마법사는 성기사의 말을 듣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연기 못한다더니. 제냐는 안타까움과 미안함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성기사의 얼굴을 어색하게 피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언제 성기사를 꼬신 거야?”

황당함에 제냐가 이제껏 잡고 있던 고압적인 태도를 잊고는 되물었다.

“뭐라고요?”

마법사는 당황한 제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루미에르가 보면 난리가 나겠네. 쯧쯧.”

마법사가 몹쓸 것을 본다는 듯 그녀를 보며 혀를 찼다. 뭐지? 꼭 내가 잘못한 것 같은 이 분위기는?

“어휴, 저런 여자가 뭐가 좋다고…….”

억울함이 차올랐다.

“자기 약혼녀랑 시시덕거리고 있는 건 루미에르거든요?”

결국 애써 억누르고 있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한번 터진 봇물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제냐는 끝을 모르고 모든 걸 털어놨다.

“약혼자가 있는데, 어떻게 그걸 말하지 않을 수 있죠?”

“…….”

“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쳐요. 하지만 그래도 고백을 했으면 그 정도는 이야기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쾅, 책상을 내리치자 어깨를 떤 마법사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걔가 잘못했네.”

“그것만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자기 멋대로 키스까지 했어요.”

“정말 안 궁금하다.”

마법사가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제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놓고 자기는 홀랑 도망을 갔다니까요? 나 혼자 사람들의 시선을 다 받으면서 서 있는데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알아요?”

말 좀 해 보라고, 툭툭 건드리자 그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없지.”

“보내기 싫다고 했는데, 자기 멋대로 신관들을 따라가 버리고.”

눈을 끔뻑거리던 마법사가 다시 허공을 멍하니 바라봤다.

“기껏 걱정돼서 찾아왔더니 자기는 약혼녀랑 시시덕거리면서 산책이나 하고 있더라니까요?”

마법사가 제냐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냥 빨리 사귀지 그러냐?”

그 말에 더욱 열이 났다.

“고백받은 적도 없거든요?”

“고백했다며.”

마법사의 어이없다는 말투에 제냐가 했던 말을 정정했다.

“그러니까 좋아한다고는 했는데 사귀자고는 말한 적 없어요.”

그러자 마법사가 헛웃음을 흘렸다.

“걔도 웃긴다.”

그 긍정에 제냐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렇죠? 어이가 없어.”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여 준 마법사가 마찬가지로 아주 가볍게 덧붙였다.

“그럼 네가 고백해.”

“제가 왜요?”

그러자 마법사가 괴상망측한 얼굴로 제냐를 쳐다봤다.

“너도 좋아하잖아.”

“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결론을 낸 걸까.

‘멍청한 게 분명해.’

문맥 파악을 못 하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저도 좋아하죠. 그런데 그게 연애 감정인지 어떻게 알아요?”

제냐가 친절하게 되묻자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황녀랑 같이 있는 거 보고 화났다며.”

“제가 언제…, 그래요. 화를 내긴 했죠. 하지만 그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반사적으로 반발하던 제냐가 애써 객관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거기서 그만두면 좋을 텐데, 마법사는 한발 더 나아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무슨 의민데?”

“그건……!”

상황에 맞지 않게 루미에르가 태평하니까. 나 혼자 안달 났던 게 억울해서…….

하지만 아교가 붙은 듯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제냐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마법사가 지친 얼굴로 말했다.

“제삼자 입장에서 너희는 쌍방이니까 제발 그만 좀 해라.”

마법사가 마른세수를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루미에르는 오늘 두 시간 내내 네 이야기만 했고. 너도 지금 나 만나고 계속 루미에르 이야기만 하잖아. 내가 왜 둘 사이에 껴서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해?”

음, 이번에야말로 제냐는 남자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물어야겠다.

“루미에르가 제 이야기를 두 시간이나 했어요?”

“제발 좀!”

마법사가 질색한 얼굴로 제냐를 노려봤으나 그녀는 꿋꿋했다. 그런 제냐의 태도에 마법사가 아악!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 오늘 루미에르가 한 이야기를 얼기설기 엮어 들려주었다.

그렇게 제냐는 루미에르와 만나기 전 남은 시간을 알차게 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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