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사들을 줄줄이 달고 응접실에 도착하자, 황녀가 활짝 웃으며 루미에르를 반겼다.
“루미에르 님!”
루미에르는 뒤에 있는 성기사들을 의식하며 미소를 지었다.
“황녀 전하.”
제레미야가 한껏 표정을 꾸미며 친근한 척 다가왔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무사히 돌아오셨다지만, 부상이 깊으셨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날 만남이 너무 짧기도 했고. 잘 지내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조금은 무심하게 신변잡기식의 대화를 이어 나가는데, 황녀가 제안했다.
“으음, 좀 걸으실까요?”
성기사들을 의식하며 하는 말에 루미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있어 찾아왔을 게 뻔하니 예정된 일이었다.
정원으로 나와 성기사들과 적당히 거리가 벌어지자 루미에르는 지체하지 않고 방문 목적을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자 황녀가 기다렸다는 듯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 내고는 질문으로 답했다.
“아스트리아와는 어떤 사이죠?”
“그게 누구죠?”
루미에르는 놀라지도 않고 되물었다. 그러자 황녀가 답답한 얼굴로 외쳤다.
“황궁에서 당신과 함께 있던 그 사람 말이에요!”
소리를 치면서도 성기사들을 신경 쓰는 걸 보니 완전히 이성을 잃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루미에르는 성기사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황궁에서 제가 함께 있던 건 황녀 전하입니다.”
그 천연덕스러운 답에 황녀가 이를 악물었다.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에요.”
그런데? 당신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제냐가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루미에르가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도움이 되지 못해 안타깝군요.”
만들어진 미안함에 황녀가 간신히 분을 삭였다.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없어요. 당신과 함께 있던 건 아스트리아예요.”
루미에르는 옅은 미소만 띤 채, 황녀를 내려다봤다. 황녀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그 애는 내 사촌이에요.”
창백한 안색, 간절한 표정. 그리고 매달리는 것 같은 말투까지.
누군가는 이런 황녀를 보며 안쓰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루미에르는 아니었다.
제레미야만 언급되면 서늘하게 굳어 버리던 보랏빛 눈을 떠올린 루미에르는 망설임이 없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동명의 사촌분께서는 이미 돌아가신 것으로 압니다.”
“…….”
그 말에 충격을 받은 황녀가 비틀거렸지만 루미에르는 거기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이미 공표하신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그분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네 아비가 한 짓을 알면서, 이제껏 찾은 적도 없는 걸 아는데 왜 이러는 거냐고. 이렇게 반응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가 뭐라고 제냐를 생각하는 척하는 게 꼴사나웠다.
“황녀 전하.”
가증스럽긴.
“한 번 도움을 주기로 했다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건 주제넘은 일 아닌가요?”
사르르, 눈웃음을 친 루미에르가 상체를 숙여 황녀와 눈을 맞추고는 곱게 웃었다.
“스스로의 안위를 더 신경 쓰시는 게 좋겠어요.”
다정한 말투와 부드러운 목소리, 아름다운 미소와 달리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서릿발이 가득했다.
다정을 가정한 경고에 황녀가 몸을 잘게 떨며 눈을 치떴다.
“…내가 지금이라도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건데요?”
황녀의 협박에 루미에르는 코웃음도 나지 않았다. 정말 조급해진 건지, 이건 좀 멍청한 질문 아닌가?
루미에르가 조금 더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이미 소문은 날 대로 났잖아요?”
소문을 잠재우려면 진작 처리했어야지. 소문이 이렇게 널리 퍼졌는데, 이제 와서 네가 뭘 어쩌려고.
그림 같은 미소를 보이며 상체를 세운 루미에르가 스치듯 성기사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무심하게 닿았던 눈동자는 이내 충격을 받아 크게 흔들렸다. 성기사들 뒤로 제냐와 닮은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고작해야 뒷모습일 뿐인데, 너무나도 제냐를 닮아 있는 그 모습에 시간이 느리게만 흘러갔다.
루미에르는 그 여자가 복도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루미에르는 튀어나올 것 같은 이름을 삼키며 쓴 물을 삼켰다.
제냐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방에서 그런 것처럼 다시 또 제냐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버티지?’
제냐를 다시 만나기까지 남은 시간이, 그녀를 그리워할 시간이 아득했다.
‘역시 마법사를 불러와야겠어.’
그를 붙잡고, 제냐에 대한 이 감정을 좀 털어놓아야 진정이 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고백해 버릴지도 몰랐다.
“…반응이 격하네요.”
황녀의 목소리에 루미에르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다시 평정심을 찾은 황녀가 말했다.
“덕분에 나는 더욱 확신을 얻었어요.”
역시 마지막은 좀 과했나? 하지만 위선적인 행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루미에르는 예전처럼 열의 없는 미소만 지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또는 당신이 안타깝다는 듯.
그 웃음에 울컥한 것 같던 황녀가 다시 시선을 내려뜨렸다.
“이렇게 신경 쓰면서도 그 애를 두고 여기로 돌아왔다는 건, 아스트리아는 지금 안전하다는 뜻이겠죠.”
루미에르는 이번에도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녀는 홀로 결론을 내렸다.
“그럼 됐어요. 난 그걸로 족하니까.”
루미에르는 이걸로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혼자만의 추측이긴 해도 황녀도 원하는 답을 얻었고 그에게 잔뜩 화가 났을 테니 그대로 몸을 돌릴 거라고.
그러나 황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밝게 웃었다. 그 미소는 조금 전, 황녀를 긁던 루미에르의 웃음과도 닮아 있었다.
“그건 그렇고, 나를 얼른 돌려보내고 싶은가 봐요? 헤어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게 너무 잘 보이네요.”
순간 불안함이 치밀어 오르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러니 최대한 머물 수 있는 만큼 머물러야겠네요. 다행히 저는 시간이 많답니다.”
루미에르는 찌푸려지는 눈썹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 더욱 환하게 웃은 황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저쪽으로 가실까요?”
뻗어져 오는 손을 성기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흘려보냈다. 그러나 그의 몸이 틀어지기 무섭게, 황녀가 정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냥 무시하고 돌아갈까.’
하지만 꼭 그 생각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황녀가 다시 몸을 돌려 그에게 손을 뻗어 왔다.
따라오지 않으면 계속 이런 식으로 스킨십을 시도하겠다는 건가?
‘이걸 협박이라고.’
그런데… 협박이 됐다. 황녀가 소문을 부정하는 것과 루미에르가 직접적으로 황녀와의 스킨십을 피하는 건 파급력이 달랐다. 특히 지금처럼 지켜보는 시선이 있을 때는 더더욱.
결국 루미에르는 어쩔 수 없이 황녀가 만족할 때까지 한참 동안 그녀에게 끌려다니며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제냐.’
아무리 생각해도 제냐와 이 여자는 너무 달랐다.
* * *
황녀에게 시달리다 방으로 돌아온 루미에르는 마법사가 더 간절해졌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마법사를 불러들였다.
힘없이 의자에 기대앉은 루미에르의 앞에 마법사가 밀어 넣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가 알아서 간다니까……!”
“루미에르 님, 마법사 진 님을 모셔 왔습니다.”
모셔 왔다기보다는 끌고 온 모양새였으나 신관은 루미에르에게 깊게 고개를 숙인 뒤, 문을 꽉 닫았다.
마법사가 기겁하며 문에 달려들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루미에르를 돌아봤다.
경고가 잘 먹힌 건지 루미에르를 쳐다보는 마법사의 눈에는 불편함과 두려움, 꺼림칙함 등이 뒤섞여 있었다.
‘역시 상대를 잘 골랐어.’
이런 상태이니 제냐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크게 만족한 루미에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별다른 사전 작업 없이 곧장 제냐를 입에 담았다.
“참 우아하지 않습니까?”
“…뭐?”
단박에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마법사에 루미에르는 답답해졌다.
“차를 마시는 손짓 말입니다.”
“그게 무슨…….”
“잔을 짚는 손이나, 내려놓을 때의 동작을 말하는 겁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을 자세히 보면…….”
잔뜩 흥분해 말을 잇는 루미에르에 마법사가 다시 한번 의문을 표했다.
“뭐라는 거야?”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그 표정에 루미에르가 침음을 흘렸다.
‘너무 협박이 셌나?’
루미에르가 쯧, 혀를 찼다.
“당연히 당신의 손목을 말하는 거죠.”
조금 수상쩍게 들리는 말이지만, 마법사는 루미에르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마법사가 울컥한 얼굴로 외쳤다.
“이 잔악무도한 놈!”
이건 또 무슨 반응인가 싶은데, 마법사가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확인 작업을 했으면 됐잖아!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뭘요?”
“내가 실수로라도 그걸 입에 담을 줄 알아?! 웃기지 마!”
정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나는 마법사야! 무조건 마법사로 살다가 마법사로 죽을 거라고!”
원래도 이상한 사람이긴 했는데, 완전히 미쳐 버린 것 같았다.
“네가 아무리 날 시험하고 날 무너트리려고 해도 나는 무너지지 않아!”
루미에르가 미친놈을 보듯 그를 쳐다보자 마법사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을 팍팍 내리쳤다.
‘곤란한데.’
너무 미쳐 있으면 제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한참 혼자서 죽을 것처럼 굴던 마법사는 루미에르가 이걸 내쫓아야 하나 고민할 때쯤에서야 퉁퉁 부은 얼굴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맞다!”
그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외쳤다.
“이게 있었어!”
그게 뭔데.
루미에르가 흥미 없는 눈으로 그걸 쳐다보는데, 그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모르는 척 나를 속이려고 하다니. 이제 너도 부정할 순 없을걸?”
묘한 얼굴로 마법사의 손에 들린 하얀 종이를 바라보던 루미에르는, 얼른 받으라는 듯 눈을 부라리는 마법사에 어쩔 수 없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
마법사가 아무리 미쳤어도 그에게 당할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별다른 대비 없이 종이를 받아 든 건 전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루미에르는 숨도 쉬지 못한 채, 몸을 바짝 굳혔다.